칼럼

개혁과 더불어 시작된 변질

1993년 2월 25일 김영삼 대통령 취임식. 그는 이날 ‘변화와 개혁’으로 신한국 건설을 반드시 이루겠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사진=유튜브>

*잠깐묵상 | 예레미야 1장

“아몬의 아들 유다 왕 요시야가 다스린지 십삼 년에 여호와의 말씀이 예레미야에게 임하였고”(렘 1:2)

요시야 왕은 남유다 역사상 가장 강력하고 철저한 개혁을 시도했던 인물입니다. 그런데 그런 시대에 굳이 예레미야가 활동을 시작할 필요가 있었을까요?
당시 남유다는 영적 절정기였습니다. 온 나라가 각종 우상을 다 버리고 하나님만을 섬기기로 결단했습니다. 성전과 예배가 회복되었습니다. 잃어버렸던 율법책을 발견했고, 왕으로부터 나라 전체가 회개하며 하나님 앞에 돌아왔습니다. 수십 년 동안 중단되었던 유월절을 다시 거행하며 국가적 차원의 부흥을 경험하고 있을 무렵 하나님은 예레미야를 보내셨습니다.

역사의 이면에는 늘 모순이 존재합니다. 개혁이 거행되자 개혁을 주도한 층이 강력한 중앙 권력을 갖게 되었습니다. 성전이 정화되고 예배가 예루살렘으로 집중되자 성전 기득권을 쥔 자들이 권력의 핵심으로 떠올랐습니다.

요시야가 살아 있을 때는 그것이 문제가 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그가 떠나자 모든 것이 문제가 되기 시작합니다. 개혁의 공신이었던 사람들이 율법을 독점했고, 정치 세력과 야합하여 새로운 기득권층으로 변모했습니다. ‘올바름’을 수호한다는 명분 때문에 누구도 저지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이것이 훗날 사두개파로 이어지는 권력의 계보가 됩니다.

남유다의 이 역사는 오늘날 본질과 개혁을 부르짖는 모든 집단을 향해 돌직구를 날립니다.

본질을 얘기하지 않는 교회가 어디 있습니까? 개혁을 외치지 않는 정당이 어디 있습니까? 기존의 질서와 싸워서 공정, 정의, 사랑, 본질, 개혁과 같은 가치를 일으켜 세운 자들이 새로운 기득권이 되는 아이러니를 우리는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요?

개혁의 주역이었던 제사장들이 성전 안에서 괴물이 되었듯 내가 선하고 의로운 일을 잘 감당했다고 확신하는 순간 우리의 내면에는 교만이라는 흉측한 우상이 세워집니다. 도덕적 우월감과 개혁에 대한 공로 의식, 사람들의 인정과 지지는 그 우상에게 생기를 불어넣습니다.

“선 줄로 생각하는 자는 넘어질까 조심하라” (고전 10:12)

가장 잘 서 있을 때가 가장 위태할 때입니다. 잘하고 있다고 평가받을 때 이미 타락이 시작되었을 수 있습니다. 스스로가 대견해질 때 변질의 씨앗이 싹을 틔웁니다.

임기 3개월을 앞두고 대국민사과를 하고 있는 김영삼 전 대통령
▼ 아시아엔 후원계좌 ▼
독자 여러분의 소중한 후원은 아시아엔과 아시아 저널리즘의 발전에 크게 도움이 됩니다.
우리은행 1005-601-878699 (주식회사 아자미디어앤컬처)

석문섭

베이직교회 목사

필자의 다른 기사

Leave a Reply

Your email address will not be published. Required fields are marked *

본 광고는 Google 애드센스 광고이며, 본 사이트와는 무관합니다.
Back to top button
AI 에이전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