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 자본시장이 빠르게 커지고 있다. 국민의 관심도 어느 때보다 높다. 자본시장을 활성화하고 부동산에 몰린 자금을 생산적인 분야로 이동시키겠다는 정책 방향에도 원칙적으로 동의한다.
그러나 지금 시장의 모습은 우리가 기대했던 생산적 자본시장과는 거리가 멀다. 기업의 성장 가능성과 가치를 살펴 장기적으로 투자하기보다, 주가의 단기 등락을 좇아 끊임없이 사고파는 시장으로 변하고 있다. 자본시장이 기업과 투자자가 함께 성장하는 장이 아니라, 시세차익만을 노리는 투전판으로 흐르고 있는 것은 아닌지 심각하게 돌아봐야 한다.
오전 8시부터 오후 8시까지 열린 시장
과거 주식시장은 오전 9시에 문을 열어 오후 3시 30분이면 끝났다. 지금은 프리마켓과 애프터마켓이 확대되면서 오전 8시부터 오후 8시까지 거래가 이어진다. 거래시간이 길어지면 투자자에게 더 많은 기회가 제공된다고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현실에서는 직장인과 자영업자, 청년과 퇴직자들이 아침부터 밤까지 휴대전화 시세판을 들여다보게 만든다.
직장에 출근한 뒤에도 업무보다 주가를 먼저 확인하고, 화장실과 복도에서 매매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 저녁에도 가족과 대화하거나 쉬지 못한 채 주가 움직임을 지켜본다. 시장이 국민의 삶을 풍요롭게 하기는커녕, 국민을 하루 종일 불안과 피로 속에 붙들어두고 있다.
주식시장은 사람의 삶을 지배해서는 안 된다. 삶을 위해 시장이 존재하는 것이지, 시장을 위해 국민이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프리마켓은 장 시작 전 충격을 완화하는 기능이 있을 수 있다. 그러나 오후 3시 30분 이후 밤 8시까지 이어지는 애프터마켓 운영은 과연 누구를 위한 것인지 다시 검토해야 한다. 과거처럼 일정 시간 단일가 매매를 허용하는 정도로 축소하는 방안도 충분히 논의할 수 있다.
자본시장은 ‘하우스’가 아니다
도박판에서는 오래 앉아 있는 사람이 이기는 것이 아니다. 결국 돈을 버는 쪽은 판을 운영하는 ‘하우스’다. 주식 거래가 지나치게 빈번해지면 증권회사와 거래소는 수수료를 벌고, 국가는 거래세를 거둔다. 관련 금융회사와 관계기관, 이른바 금융카르텔도 거래 증가의 혜택을 본다. 그러나 사고팔기를 반복한 개인투자자에게 남는 것은 손실과 피로, 무너진 일상일 수 있다.
지금 시장에서는 개인투자자가 몇 시간, 며칠 사이의 가격 변동에 지나치게 민감하게 반응한다. 기업의 본질가치보다 거래량과 테마, 유튜브와 온라인 게시판의 정보에 따라 움직인다. 레버리지 ETF 중심의 상품과 단기매매 중심의 금융상품은 이런 흐름을 더욱 가속하고 있다.
시장을 오래 열어놓고 거래를 많이 유도하는 것이 자본시장 발전은 아니다. 거래량이 늘었다고 해서 국민의 자산이 늘고 경제가 건강해지는 것도 아니다.
자본시장이 거대한 하우스처럼 변한다면, 시장을 운영하는 사람들만 이익을 보고 다수 국민은 손실과 중독의 위험을 떠안게 된다.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만 바라보는 시장
우리 증시는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 등 일부 대형 반도체 기업에 대한 쏠림이 지나치게 커지고 있다. AI 시대를 맞아 반도체 산업의 중요성이 높아지는 것은 분명하다. 두 기업이 세계적인 경쟁력을 갖춘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시장의 자금이 일부 대형주와 관련 ETF, 레버리지 상품에 과도하게 집중되면 시장 전체가 불안정해질 수 있다. 많은 투자자가 기업을 분석하기보다 지수가 오를 것인지 내릴 것인지만 바라보게 된다.
상장시장에는 반도체뿐 아니라 조선, 방산, 원전, 바이오, 콘텐츠, 소재·부품·장비, 그리고 K-컬처로 일컬어지는 K-푸드, K-뷰티, K-엔터 등 수많은 미래 성장기업이 많다. 또한 우리 삶과 더불어 매년 안정되게 성장하고 발전하면서 주주 환원에 적극적인 우량한 중소형 가치 있는 기업들이 많다. 자본시장은 투자자와 기업이 함께 성장하고 발전하는 최고의 공유시스템이다.
몇몇 대형주의 주가를 끌어올리는 것이 곧 자본시장 활성화는 아니다. 일부 종목의 급등을 시장 전체의 성공으로 착각해서도 안 된다. 시장의 건강성은 지수의 높이만이 아니라, 얼마나 다양한 기업에 자금이 흐르고 장기투자가 이뤄지는지로 평가해야 한다.
주식투자의 본질은 기업과의 동행이다
주식은 숫자가 아니다. 주식 한 주를 산다는 것은 그 기업의 주인이 되는 일이다. 투자자가 제공한 자금으로 기업은 기술을 개발하고, 사람을 고용하고, 새로운 제품과 서비스를 만든다. 기업이 성장해 이익을 내면 투자자는 배당과 기업가치 상승을 통해 그 성과를 공유한다. 이것이 자본시장의 본질이다.
그런데 지금은 기업이 무슨 일을 하는지, 어떤 가치를 창출하는지보다 내일 주가가 오를 지만 묻는 사람이 많다. 주식을 사는 것이 아니라 가격표를 사고 있다. 투자자가 아니라 시세의 추종자가 되고 있다.
주식투자는 기업과 오랫동안 동행하는 일이어야 한다. 좋은 기업을 찾아 적정한 가격에 투자하고, 기업이 성장할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 물론 모든 기업이 성공하는 것은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더욱 공부하고 분산하며, 자신의 판단에 책임져야 한다.
단기간에 몇 배의 수익을 얻겠다는 환상에서 벗어나야 한다. 시장은 누구에게나 쉽게 돈을 벌게 해주는 곳이 아니다. 투자 경험이 부족한 청년이 부모에게 받은 돈을 넣고, 퇴직자가 노후자금을 한꺼번에 투자하는 현실은 매우 위험하다.
노동과 기업가정신이 사라져선 안 된다
더 우려스러운 것은 주식 광풍이 노동의 가치와 기업가정신까지 약화시키고 있다는 점이다. 아침에 출근해서 자신의 일에 집중하기보다 하루 종일 시세를 확인한다면, 직장은 어떻게 되고 기업의 생산성은 어떻게 되겠는가. 주식을 사고파는 행위 자체가 노동을 대신할 수는 없다.
육체노동이든 정신노동이든, 사람은 자신의 일을 통해 사회에 기여하고 보람을 얻는다. 기업가는 새로운 사업에 도전하고 일자리를 만들며, 근로자는 자신의 전문성과 성실함으로 기업을 성장시킨다.
건강한 자본시장은 노동과 기업 활동을 지원해야 한다. 노동을 대체하거나 기업가정신을 무너뜨려서는 안 된다.
주식으로 빨리 돈을 벌겠다는 생각이 사회 전체를 지배한다면, 사람들은 자신의 직업과 기술을 발전시키기보다 시세판에서 기회를 찾게 된다. 그런 사회는 오래 지속될 수 없다.
정부와 금융당국이 점검해야 할 것
정부와 금융당국은 자본시장 활성화를 단순히 지수 상승이나 거래대금 증가로 평가해서는 안 된다.
첫째, 오전 8시부터 오후 8시까지 이어지는 거래시간이 국민의 삶과 투자 행태에 미치는 영향을 면밀히 조사해야 한다. 특히 애프터마켓 운영시간을 축소하거나 기존 단일가 매매 방식으로 전환하는 방안을 검토할 필요가 있다.
둘째, 레버리지와 단기매매를 부추기는 금융상품이 시장 변동성을 과도하게 키우고 있지는 않은지 살펴야 한다. 금융상품의 편의성과 다양성 못지않게 투자자 보호가 중요하다.
셋째, 특정 대형주와 산업에 자금이 과도하게 집중되는 현상을 점검해야 한다. 경쟁력 있는 중견·중소 상장기업에도 장기 자금이 흐를 수 있도록 시장 구조를 개선해야 한다.
넷째, 투자자 교육의 방향을 바꿔야 한다. 매매기법이나 단기 수익률을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기업의 가치와 재무제표, 경영자의 철학, 산업의 미래를 살펴보는 방법을 가르쳐야 한다.
다섯째, 배당 확대와 주주와의 소통, 투명한 기업지배구조를 통해 투자자가 기업의 장기 성과를 공유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장기투자자가 존중받는 시장을 만들어야 한다.
시장을 살리려면 국민의 삶부터 지켜야 한다
나는 오랫동안 ‘주식농부’라는 이름으로 좋은 기업에 투자하고 기다리는 문화를 이야기해 왔다. 씨앗을 뿌린 뒤 매일 땅을 파헤쳐 싹이 났는지 확인하는 농부는 없다. 기업도 마찬가지다. 좋은 기업을 선택했다면 성장할 시간을 줘야 한다.
오늘날 한국 자본시장에 필요한 것은 더 긴 거래시간이나 더 자극적인 상품이 아니다. 기업의 가치를 믿고 기다릴 수 있는 시장, 투자자가 기업의 성장과 결실을 함께 나누는 시장이다.
자본시장을 활성화하겠다는 정책의 출발점은 옳다. 그러나 운영 방식이 잘못되면 생산적 자본시장이 아니라 거대한 투전판을 만들 수 있다.
지금이라도 멈춰 살펴야 한다. 국민을 하루 12시간 시세판에 붙들어놓고 거래대금과 세수가 늘었다며 성공이라고 말해서는 안 된다.
시장은 사람을 행복하게 해야 한다. 국민의 일과 가정, 건강과 평안을 무너뜨리는 시장은 결코 선진 자본시장이 아니다.
이제 한국 증시는 투기적 거래의 속도를 늦추고, 투자와 기업 성장이라는 본래의 길로 돌아가야 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