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북아 신뢰퍼즐] 동북아 평화, 북한 ‘경제개발’이 열쇠
중일러미 셈법…북한 협력 어떻게 이끌어낼까
아시아 평화를 위해 극복해야 할 첫번째 과제가 바로 북한 문제. 한반도 주변 4국, 6자회담 당사국인 중국, 일본, 러시아, 미국의 대표 학자들이 머리를 맞대고 ‘북한 개발협력에 대한 동북아 국가들의 시각과 전략’을 내놓았다. 지난 11월19일 서울 여의도 콘래드서울에서 열린 ‘동북아 평화증진과 북한개발을 위한 국제협력’ 콘퍼런스에 참석해 밝힌 이들의 생각을 살펴본다.
중국 “홀로 선 김정은 활용해 개방 이끌어 내라”
자오후지(Zhao Huji, 중국공산당 중앙당교 정법부 교수):
소련, 동구권이 무너졌고 중국 역시 동조하지 않는데 북한은 ‘냉전의식’을 강화하고 있다. 김정일 시대 선군정치는 강자가 약자를 억누르는 ‘흑백논리’였다. 또한 정치의 극한인 ‘총대’를 내세운 ‘총대제일주의’를 선언했다.
이밖에도 ‘죽음을 두려워하지 말라’는 ‘사생결단논리’를 강조했는데 이런 논리로 어떻게 북한이 개혁개방을 하겠는가. 2002년 7·1조치로 경제개혁을 했어도 개방이 안 따라주고 있다. 1992년 한중수교를 기점으로 소련과 미국의 냉전구조에서 북미대결이 되면서 북한은 핵개발에 매달리고 있는 상황이다.
이제 김정은은 2가지 모험 중 선택해야 한다. 중국처럼 개혁개방을 하는 것이다. 기존 이념과 체제를 개혁하면 효과가 있겠지만 정당성 상실과 통치 위기를 맞게 된다. 그렇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 제3의 길, 즉 타협의 길로 갈 수밖에 없다. 가능성이 없지 않다. 김정은은 김정일과 3가지 면에서 다르다. 첫째, 젊다. 경험이 적지만 정치적 이념이 확고하게 자리 잡지 않았으므로 무모한 짓도 할 수 있다. 둘째, 외국경험이 있다. 스위스에서 최선진국을 경험했다는 것은 김정일과 큰 차이다. 셋째, 선택의 폭이 크다. 김정일은 김일성 그늘 밑에 20년 있다가 집권했지만 김정은은 곧바로 홀로 서 있다.
결론적으로 중국은 가능성을 열어 놓고 여러 실험을 통해 개방을 이끌어내야 한다.
일본 “납북자 문제, 공격적 교섭 모색의 호기”
이소자키 아츠히토(Isozaki Atsuhiti, 게이오대학 교수):
일본은 핵과 미사일보다 납북자문제에 더 관심이 많다. 김정은은 납북문제에 직접 관여하지 않은 것이 분명하므로 장기적으로 관계개선이 가능하다. 지난 2년간 김정은이 발표한 노작(勞作) 30여 편을 김정일과 비교해보면 ‘이데올로기’라는 단어가 거의 없다. 그런 점에서 실리지향적인 지도자다. 가장 주목할 것은 ‘핵개발과 경제 병진노선’이다. 핵개발을 해야 하는 이유와 그 중심에 경제건설이 있다는 것이 김정은의 노작에서 명확해졌다.
2002년 9월17일 일조(북일) 정상회담이 실현됐다. 김정일은 납북문제를 인정했고, 일본은 북한에 무상자금협력과 인도주의지원 등을 하기로 했다. 이때 채택한 평양선언은 일본과 북한이 정상회담에서 교환한 유일한 문서다. 그 배경이 뭘까? 회담직전 북한의 경제개혁 ‘7·1조치’가 있었고 개성공단과 금강산관광 등의 논의가 있었다. 나름대로의 개혁개방으로 향하는 새로운 전략 가운데 북일회담이 있었던 것이다.
아베는 지난 10년간 역대 총리 중 납북문제에 가장 관심을 쏟고 있다. 납북문제대책본부도 설치했다. 높은 지지율을 얻고 있는데다 지난 5월엔 정부요원이 평양을 방문하기도 했다. 납북문제 해결이 목표라면 수단이 불합리해도 계속 펴 나갈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김정은이 ‘병진노선’을 채택해 경제를 중시한 것은 11년 만의 중요한 움직임이다. 일본으로서는 교섭을 공격적으로 모색할 수 있는 오랜만의 호기인 것이다.
러시아 “평양 ‘신중산층’ 주목, 김정은 권력기반 될 것”
게오르기 톨로라야(Georgy Toloraya, 러시아과학원장):
북한에서 김정은의 입지는 어떤가. 유럽에서 교육받았다는 것은 장점이기도 하지만 북한 안에서는 의구심을 받을만한 이력이기도 하다. 따라서 스스로 권위 있는 지도자이며 북한이 변화에 굴종하지 않을 것임을 주민과 정적들에게 입증하기 위해 도발적 행동을 할 수 있다. 내부투쟁이나 외부적 요인에 대한 도발 등이 그런 모습이다.
병진정책은 선군정치보다 좀 더 현실적이어서 군비를 줄이고 경제에 기여할 것이다. 시장부문도 민간기업과 주민들로 확대되고 있다. 정서적으로도 소비자주의에 큰 변화가 있다. 특히 평양에 ‘중산층’이 등장했는데 이들은 이념에 관심이 없다. 자신들의 삶에 집중하고 소비를 늘린다. 군부가 아닌 이들 ‘신중산층’이 미래 김정은 권력의 토대가 될 것이다.
러시아 입장에서 북한의 진정한 변화를 위해서는 경제제재를 줄이고 조건 없는 협력을 늘려 나가야 한다. 지난 시기 북핵 감시에만 집중했기 때문에 북한은 실질적 핵무장 국가가 됐다. 사이버전 능력도 우려되는 상황이다. 한러 유라시아협력방안 프로젝트는 고무적이다. 신 실크로드가 러시아를 거쳐 유럽까지 뻗어나간다면 한국은 지금처럼 고립된 ‘섬’이 아닌 ‘대륙국가’가 될 수 있다. 파이프라인 프로젝트는 한국 자본과 러시아 기술, 북한 인력을 결합하는 모델이 될 수 있다.
미국 “비핵화, 전제조건 삼으면 안돼”
멜 거토프(Mel Gurtov, 포트랜드주립대 명예교수):
미국은 최근 이란과 관계를 회복했다. 위험성이 높지만 정치적인 용기를 좀 더 발휘해야 한다. 대북관계도 과거와 달라질 수 있다. 북한을 정당한 협상대상으로 인정해야 한다. 신뢰구축에 있어 ‘북핵’이 변수인데, ‘비핵’하라고 고집하면 아무 문제도 해결할 수 없다. 장기적으로 북한과 비즈니스 할 각오가 돼야 한다. 포용의 가장 큰 적은 내부에 있다.
권위주의 정권이라도 내부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중요하므로 북한에게 ‘평화가 더 낫다’는 메시지를 전달하려면 내부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 북한에 대한 제재가 문제를 해결하지 못했으므로 포용해야 한다. 그건 김대중 정부가 잘 이해했다. 물론 북한 정권이 지속되어야 한다는 말은 아니다. 북한에 선택의 여지를 주자는 거다. 안보에 대한 두려움을 해소해서 기회를 주자는 것이다.
포용할 때는 평화 교류의 구체적 예를 보여줘야 한다. 북한의 정권교체를 목표로 삼으면 안 된다. 상징적 조치도 필요하다. 즉 북한의 비핵화는 미래 언젠가의 목표가 되겠지만 포용과 협력의 전제조건이면 안 된다. 적과의 협력에 있어 최악의 협상은 ‘가장 어려운 문제를 가장 먼저 해결하라고 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