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사의 재발견] ‘두 얼굴의 지도자’ 모택동과 현대중국

20세기 중국의 역사는 잘 알려져 있다시피 혁명으로 점철된 파란만장한 역사였다. 1911년의 신해혁명에서 1920년대의 국민혁명, 오늘날의 중국을 성립시킨 1949년의 사회주의 혁명뿐만 아니라 1960년대의 문화대혁명까지 숨 쉴 틈 없을 정도로 벌어진 혁명의 연속이었던 것이다.

세계사적으로도 이러한 격변을 거친 나라는 사실 찾아보기 어려울 정도로 20세기 중국은 숨가쁜 걸음을 걸어왔다. 이를 통해 중국은 끊임없이 자신에게 적합한 근대적 정치체계를 모색하여 왔고, 그러한 실험은 아직도 미완성인 채 지속중이다. 1978년 이후 시작된 등소평의 개혁·개방 정책의 성과로 이제 바야흐로 세계 제2의 경제대국으로 등장한 현대중국의 경제발전 역시 ‘제2의 혁명’으로 간주될 수 있다면, 수천 년 이어진 고로(古老)의 제국(帝國)은 지금 100년 이상 동안 지속되는 정치적·경제적 격변 속에 놓여 있는 것이다.

현대중국 이끈?손문, 장개석, 모택동, 등소평···영향력 으뜸은 단연코 ‘모택동’

물론 이러한 급변하는 20세기 혁명 중국의 역사에서 손꼽을 수 있는 지도자는 신해혁명을 대표하는 손문(孫文)과 국민당의 집권을 주도한 장개석(蔣介石), 중국공산당을 이끌고 사회주의중국을 성립시킨 모택동(毛澤東), 그리고 오늘날 중국의 경제 번영을 이끌어낸 등소평(鄧小平)을 들 수 있다. 이 가운데 20세기에 한정하여 그 영향력을 평가한다면, 아마 누구나 모택동을 첫 번째로 지목하지 않을 수 없다. 중국과 대만 내지는 화교 세계까지 포함하여 가장 존중을 받는 인물을 든다면 물론 ‘손중산’이란 호칭으로 불리는 손문을 먼저 꼽아야 한다. 오늘날 중국의 어느 도시에나 ‘중산로’라는 도로가 번화가를 차지하고 있는 사실은 그 점을 잘 보여준다.

하지만 ‘존중’받는 것과는 상관없이 그 영향력을 따진다면 손문은 모택동에게 크게 미치지 못한다. 손문의 혁명은 미완이었기에 죽어가면서도 동지들에게 계속 분발하도록 유언을 남길 수밖에 없었지만, 모택동은 중화인민공화국의 성립이라는 사회주의 혁명의 성공을 거두었을 뿐만 아니라, 이후에도 그 사회주의가 어떤 형태가 되어야 하는 점에 대해 ‘계속혁명’을 통해 모색을 멈추지 않았고(지금으로서는 실패한 것으로 간주될 수밖에 없지만), 이것은 오늘날까지도 중국의 현재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기 때문이다.

미국의 <타임> 잡지에서도 그를 20세기에 가장 영향력을 미친 100인 가운데 한 사람으로 지목하기도 하였다. 특히 그가 만년에 주도하였던 문화대혁명은 실패로 끝났지만, 오늘날의 중국에 깊은 여운을 남겼으며, 등소평과 그 이 후 세대에 의한 개혁·개방은 이러한 모택동의 실험에 대한 철저한 반발의 결과이기도 하다. 하지만 실패한 모택동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강력한 유산을 남겨 두고 있다. 북경이나 상해, 장사 등지의 여러 대학에 여전히 모택동의 거대한 입상(立像)이 건재한 것은 아마 이러한 점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고나 할 것이다.

중국 사회주의 혁명과 뒤엉킨 모택동의 인생 자체를 자세히 검토할 여유는 없을 것이다. 따라서 제목에 따라서 중화인민공화국 성립 전의 눈부신 성공을 거둔 모택동과, 성립 이후 수억의 중국 인민을 거대한 실험에 따른 엄청난 고난으로 몰아넣은 후반기로 나눠서 그가 현대중국에 미친 영향을 살펴보고자 한다. 그는 이른바 두 얼굴을 가진 지도자인 셈이다.

중국의 인터넷 검색엔진 ‘바이두(百度)’에서 모택동을 검색을 해보면 그는 중국혁명가, 전략가, 이론가이자 시인,중국공산당과 중국인민해방군 및 중화인민공화국을 만들어낸 지도자, 모택동 사상의 주요 창립자, 1949년부터 1976년까지 중화인민공화국의 최고지도자로 묘사되고 있다.

모택동 “하늘, 땅, 사람과의?싸움 속엔 끝없는?즐거움이 있다”

가라는 평가는 중국혁명의 지도자라는 모택동의 역할을 간결하게 보여준다. 그가 젊어서부터 타고난 혁명가라는 것은 스승 양창제(楊昌濟)에게 배우면서 읽은 <윤리학원리>의 폐이지 여백에 써놓아 남긴 메모의 내용에서도 잘 드러난다. “하늘과 더불어 싸우는 것은 그 즐거움이 끝이 없고, 땅과 더불어 싸우는 것 또한 그 즐거움이 끝이 없으며, 사람과 더불어 싸우는 것 역시 그 즐거움이 끝이 없다.” 이러한 분투의 정신이 그를 결국 중국혁명의 지도자로 끌어올린 것이 틀림없지만, 당시 세대의 청년층과 마찬가지로 젊어서부터 어떻게 하면 새로운 중국을 만들 수 있을까 고심하던 그는 결국 1921년 7월 중국공산당의 창립 멤버로 참가한 다음 마르크스·레닌주의의 길로 들어선다.

그리고 중국공산당의 창립을 이끌어낸 소비에트 러시아의 ‘지도’ 아래 국민당과의 합작으로 국민혁명을 추진하던 과정에서 그는 분명하게 자신의 색채를 본격적으로 드러낼 수 있는 계기를 잡았다. 그것은 그가 바로 1927년에 자신의 고향인 호남성의 농민운동을 조사한 다음 내놓은 <호남농민운동 고찰보고>였다. 그는 여기서 “손중산 선생이 국민혁명에 힘쓴 지 거의 40년 동안 이루려 하였지만 이루지 못한 것을 농민은 단지 몇 달만에 모두 해치워 버렸다. 이것은 40년 또는 수천 년 동안 이루어본 적이 없는 기적이다. 만일 민주혁명을 완성하는 공적을 10이라고 한다면, 도시의 시민과 군대의 공적은 단지 3을 차지할 뿐이며, 농민이 향촌에서 이룬 혁명적 공적은 7을 차지한다”고 적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여기 인용한 모택동의 글은 오늘날 널리 알려진 <모택동선집>에서는 이미 보이지 않는다는 점이다. 여기서 그가 농민의 역할을 크게 강조한 것은 기본적으로 노동자를 혁명의 주력군으로 보고 농민은 그 연맹의 대상 정도로나 간주하는 정통 마르크스·레닌주의의 입장에서 보면, 정도에서 크게 벗어나 있는 대단히 ‘위험한’ 주장이기 때문이다. 그가 이 글을 중공 기관지인 <향도(嚮導)>에 발표하였지만, 후반부는 계속해서 싣지 못하였던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잘 알려진 것처럼 여기서 그는 이 당시 급속하게 발전한 농민운동을 ‘너무 지나친 것(過火)’이라 보지 않고 오히려 그것을 부추기는 입장에 섰다. 농민을 마주하고 서서 그들을 말려서는 안 되고, 오히려 앞장서서 부추겨야 한다고 우긴 것이다.

국민당과 중공이 합의한 ‘소작료 인하’ 정도의 수준을 넘어서 호남의 농민들은 토지의 몰수와 재분배까지 자발적으로 시행하기에 이를 정도였으므로 중공 중앙도 국공합작의 유지를 위해 이를 억제하는 입장을 택하지 않을 수 없었던 상황이었기 때문에 이런 주장이 특히 위험한 것으로 간주되었다. 그리고 결국 이러한 농민운동의 급진화가 국공합작의 파열을 가져오지만, 모택동은 바로 이 시점에서 중국의 혁명이란 인구 85%를 차지하는 농민의 힘을 끌어내지 않고서는 불가능하다는 교훈을 끄집어 내었다.

중국혁명의 새 전략은 ‘농민혁명,?폭력혁명, 농촌의 도시포위’

소련에서 배워온 정통 마르크스·레닌주의를 중국의 상황에 적용할 때 이러한 중국적 특성의 중요성을 간파한 것은 거의 전적으로 그의 기여라고 할 수 있다. 나아가 그는 이러한 입장에서 국공합작의 결렬 이후 중공 중앙의 도시에서의 무장 폭동 노선을 무시하고 독자적인 노선을 추구함으로써 이것을 실천에 옮겼다. 토비를 비롯한 잡다한 농촌의 소외된 하층 민중을 동원하여 독자적인 군대인 홍군(紅軍)을 건설하고 농촌근거지를 마련하는 실험, 나아가 1920년대 후반 이후의 혁명전략은 바로 그의 독자적인 판단에서 비롯되었다. 이러한 노선은 중공중앙 등으로부터 <수호지>를 너무 많이 읽었다는 식의 조롱을 받을 수밖에 없었지만, 이후 그가 호남성·강서성의 접경지대인 정강산에서 이루어낸 성적은 결국 농민(토지)혁명과 폭력혁명(紅軍의 조직), 농촌에 의한 도시의 포위라는 중국혁명의 새로운 전략을 중공이 채택하지 않을 수 없게 하였다.

여기에 모택동의 홍군이 도입한 유격전술은 중공의 군사적 성공을 담보하는 주된 밑거름이 되었다. “좋은 쇠는 못을 만드는 데 쓰지 않고, 좋은 남자는 군인이 되지 않는다”는 중국의 속담이 있는 것처럼 청말 이래의 군대는 민간으로부터 결코 좋지 않은 평가를 받아오고 있었고, 이러한 것이 청말의 신식 군대로 개선이 되는가 싶었지만, 결국 군벌 시대로 들어오면서 다시 상황은 예전으로 돌아갔다. 특히 하남성과 같은 일부 지역에서는 군대나 토비나 마찬가지라는 식의 ‘병-비세계(兵-匪世界)’가 출현하였던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국민당의 국민혁명군도 초기에는 좋은 평판을 유지하였지만, 수많은 군벌 군대의 합류 이후에는 역시 마찬가지가 되었다. 모택동과 주덕(朱德)이 건설한 홍군은 이러한 기존의 평가를 확실히 바꿔놓음으로써 공산당의 군사적 승리에 사실상 핵심적인 역할을 하였다. 더구나 “적이 오면 도망가고, 적이 쫓아오면 계속 도망간다. 적이 멈추면 괴롭히고, 적이 도망가면 공격한다”는 식이 유격전술이나, 반드시 다수로 소수를 공격한다는 원칙, 즉 절대로 소수로 다수를 공격하지 않고, 적이 분산되어 소수의 유격대 보다 규모가 작아질 때까지 기다렸다가 공격하는 대단히 ‘비겁한’ 유격전의 전략은 장개석이 주도한 정강산 근거지 포위공격을 세 차례나 막아내는 성과를 가져왔다.

물론 일본의 열하 침공으로 중단된 제4차의 포위공격 다음 제 5차의 포위 공격에서는 100만 대군을 동원한 국민당군의 전면 봉쇄?토치카 전술이 크게 먹혀들어, 결국 홍군은 근거지를 포기하고 정처 없는 대탈주를 시작하지 않을 수 없게 하였다. 중국혁명의 서사시라 일컬어지는 홍군의 대장정이 바로 이것을 가리키지만, 결국 이 대장정 도중 준의회의 무렵 군사적 지도권을 장악한 모택동은 이 거대한 ‘실패’를 마침내 거대한 ‘성공’으로 바꾸어 놓는데 성공하였다. 그만큼 그의 군사적 재능은 천재적이었다. 이후 혁명지도자로서의 그의 지위가 확고해진 것은 말할 것도 없지만, 더불어 코민테른을 통한 소련의 지도에서 벗어나 독자적인 중국 혁명의 독자 노선을 찾아내고, 그것을 이른바 ‘모택동사상’으로 결집시킨 것도 이 시기였다.

일본의 전면 침략이 여기에 크게 기여하였고, 그 결과 항일전쟁 시기를 통하여 중공이 다시 원기를 회복할 수 있었다는 점도 잘 알려진 사실이다. 장정의 막바지에 연안에 도착한 홍군의 규모가 1만 이하로 줄었던 것이, 1945년이 되면 팔로군과 신사군으로 재편된 홍군이 이미 120만에 가까운 수로 늘어난 것은 이미 항일전쟁 중에 이후 국민당과의 내전에서 승리할 기초를 닦아놓았다는 평가를 밑받침해 준다. 그 결과 1947년 본격화된 내전에서 공산당은 미군의 확실한 뒷받침을 받는 장개석의 500만 군대를 물리치고 3년 만에 역전승을 거둘 수 있었다. 모택동이 이끄는 중국 인민해방군이 미군의 도움으로 도시를 장악한 국민당군의 허점을 노려 ‘농촌으로 도시를 포위하는’ 전략을 성공시켜 1949년 10월1일 모택동은 천안문 위에 올라서서 중화인민공화국의 성립을 선포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이러한 거대한 군사적 승리를 바탕으로, 중화인민공화국의 성립 선포 직전 모택동은 “중국인민은 일어섰다”고 표현하여 저간의 성공과 미래에 대한 희망을 드러내었고, 그 자신 또한 더할 나위 없는 영광을 누리게 되었다. 그 자신이 1936년에 <심원춘 설(雪)>에서 표현하였던 것처럼 “정녕 영웅호걸을 찾으려거든 그대로 우리 시대에 눈을 돌리라”고 자부할 수 있는 위치에 올라선 것이다. 19세기 이후 열강의 침략과 내부적 붕괴에 빠져들었던 중국은 이제 하나의 강력한 중앙정부를 지닌 통일국가로 다시 일어서게 되었고, 여기에는 낙후된 농업국가 중국의 대다수 인민을 차지하는 농민의 힘을 끌어내어 동원할 수 있었던 그의 혁명전략이 큰 역할을 한 것은 분명하다. 모택동은 그런 점에서 영웅을 찾으려거든 “우리 시대에 눈을 돌리라”고 장담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근대 중국이 원하였던 부유하고 강력한 국민국가의 건설은 이제 막 시작 단계에 들어섰을 뿐이고, 어떠한 방식으로 그러한 과업을 이룰 수 있을 지에 대해서 모택동도 중국공산당도 사실 제대로 된 프로그램을 가지고 있지는 않았다. 모택동이 제시한 ‘신민주주의 혁명론’이 있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혁명투쟁을 위한 이론이지 국가건설을 위한 이론은 아니었다. 어쩌면 너무 빨리 국민당이 무너져서 얻은 신속한 승리 때문일 수도 있지만, 이런 점은 모든 혁명과 혁명정당에서는 언제나 나타나는 현상이기도 하다.

‘프롤레타리아 국제주의’ 무시하는 스탈린 못마땅히 여겨

이 시점에서(그리고 그 이전에도) 중국공산당의 정권이 성립하기까지 여전히 국민당과의 합작에 미련을 지니면서 ‘프롤레타리아 국제주의’를 무시하고 국익에만 시선을 고집하였던 스탈린의 소련이 모택동으로서는 내키지 않은 ‘선배’였음에 틀림없다. 하지만 이 무렵 강화된 냉전 체제의 경쟁은 중국이 선택할 수 있는 여지를 없앴다. 농민이 집중된 농촌 사회와 농촌 근거지에서 벗어나 이제 대도시와 전국적인 중앙권력을 처음 장악하게 된 중공 정권으로서는 새로운 국가의 재건을 위해서는 사회주의 국가의 선배인 소련의 모델을 배우지 않을 수 없었다. 이른바 ‘소련 일변도’가 불가피해진 것이다.

중화인민공화국은 토지개혁과 농업 집단화, 상공업의 사회주의적 개조를 추진하면서 점차 전쟁의 폐허에서 벗어나 사회주의 체제의 건설에 몰두하였다. 1952년에는 이미 전쟁 이전의 수준을 회복하였으며, 1953년부터 시작된 제1차 5개년 계획은 근대 중국의 역사에서 처음으로 중앙정부의 강력한 추진 아래 이루어진 경제성장의 청사진이었다. 그 결과 1956년이 되면 제1차 5개년 계획을 1년 미리 앞당겨 달성하였다고 선포할 수 있었고, 이후 진행되는 공업화의 기초는 여기에서 마련되었다. 매년 8% 정도의 경제성장율은 개혁·개방 이후 오늘날의 중국만을 특징지우는 것은 아닌 것이다.

그러나 경제전문가로 지목된 진운(陳雲)의 주도 아래 이루어진 이러한 계획경제의 눈부신 성과에 대해 모택동은 만족보다는 우려를 표명하는 쪽으로 나아갔다. 공산당 관료가 주도하는 계획경제를 바탕으로 소련식 경제건설을 추진하는 것은 농민과 농촌을 희생시키면서 도시와 노동자, 그리고 공업을 발전시키는 결과를 낳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었다. 이것은 근대 경제의 발전 과정에서는 사실상 어디서나 불가피한 현상이지만, 특히 고립되고 낙후된 농업국가 중국 역시 농업과 농민에 대한 일종의 ‘원시적 수탈’을 기반으로 공업 건설을 위한 잉여를 착취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러한 현상이 지속되면 농촌 사회의 농민을 동원하여 그들을 위한 국가를 세우겠다던 모택동의 야망은 결국 수포로 돌아가지 않을 수 없었다.

오늘날에도 여전히 농촌의 호구와 도시의 호구가 철저히 분리되어 농민이 사실상 ‘2등 국민’이 되어 있는 현상은 바로 이 시기에 출현하기 시작하였다. 이리하여 모택동은 중국식 사회주의의 방향을 모색하면서 독자적 경제개발 노선을 모색하지 않을 수 없었다. 1950년대 중후반 이후 제기된 ‘자력갱생’, ‘두 다리로 걷는 경제건설’의 지향과 ‘소련을 뛰어넘는 공산주의 사회 건설’ 시도는 바로 모택동의 이러한 시도를 잘 보여준다. 그리고 이러한 시도가 잘 알려져 있다시피 대약진운동과 인민공사 건설로 이어졌지만, 중소관계의 균열로 인한 소련의 지원 중단과 연이은 대재해가 겹친 데다가 충성경쟁에 몰린 중공 기층간부의 과장된 허위보고의 열풍 속에서 그의 실험은 엄청난 실패를 맛보지 않을 수 없었다.

중국의 대표적 인구사 연구자인 조수기(曹樹基)의 최근 연구에 의하면 대약진운동시기인 1958~1962년 중국의 각성 재해지구에서 ‘비정상적으로 사망한 인구’는 약 3250만에 이른다. 그보다 적거나 많게 잡는 학자들도 많지만, 사천성 920만, 안휘성 633만, 하남성293만, 호남성 248만 등지에서의 엄청난 ‘비정상 사망자’가 출현한 것은 도대체 어떻게 20세기 후반의 지구에서 이러한 일이 발생할 수 있었는지 도무지 이해하기 힘든 현상이다(그보다 약 100년 전 화북을 휩쓸었던 대기근에서도 300만의 사망자가 났지만, 이것은 철도도 없고 다른 교통수단으로도 이 지역에 식량을 공급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대약진운동과?문화대혁명기의?참사 책임?

이 시기의 비정상적 사망자 가운데 6~7%(약 250만)는 간부나 민병에게 맞아죽은 경우이고, 나머지는 대부분 집단화된 마을의 식당에 출입을 거부당해(물론 인민공화의 집단화로 집안의 부엌도 이미 없어졌다) 굶어죽을 수밖에 없었다는 지적은 ‘공산주의화’의 모색이 가져온 일종의 ‘광기’를 엿보게 한다. 결국 이러한 엄청난 실패에 책임을 지고 모택동은 국가주석의 자리에서 물러나 유소기(劉少奇)나 등소평(鄧小平)이 추진하는 조정정책의 추진을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그가 이러한 ‘퇴진’에 불만을 품고 다시 대권을 장악하기 위해 이른바 ‘문화대혁명’을 일으켜 다시금 중국을 10년 동안의 ‘대동란’으로 몰아넣은 것은 어쩌면 당연한 결과였다. 문화대혁명이 가져온 혼란은 두말할 것도 없이 유명하지만, 이 역시 1천만 이상의 사상자를 낳는 엄청난 인명 피해를 낳았다.

대약진 기아에 대한 또 다른 연구자인 Frank Dik?tter는 유소기 아들의 회고를 소개하고 있다. 그에 의하면 1962년 7월의 어느 오후에 유소기는 서둘러 모택동이 북경으로 돌아오기를 요구하였고, 기분이 나빠진 모택동의 질책에도 불구하고 유소기는 평소와는 달리 발언을 멈추지 않았다. 그리고 바른 소리로 말을 이어갔다. “이렇게 많은 사람이 죽었습니다.” “역사는 당신과 나에 대해 이렇게 쓸 것입니다. 사람이 사람을 잡아먹었다, 바로 이렇게 쓰일 것이라는 말입니다.” 이러한 발언에 모택동은 대노하여 “어째서 그런 일도 제대로 막지 못하느냐? 내가 죽으면 어떻게 할거냐”고 질책을 하였다. Dik?tter는 죽은 다음 이러한 재앙의 책임이 몽땅 자기에게 돌아올 것을 두려워한 모택동은 결국 이 때문에 문화대혁명을 일으켰고, 그때 다른 사람은 몰라도 유소기만은 결코 용서하지 않았다고 해석하고 있다. 모택동이 통치시기에 “사람이 사람을 잡아먹는” 참상이 있었다고 역사에 기록된다면, 모택동으로서는 일생동안 자신이 쌓아온 ‘공로’가 물거품이 될 지도 모른다는 공포에 사로잡힐 만하다.

사실상 책임소재를 따지자면 1950년대 이후 모택동의 거대한 실험은 사실상 중공 지도층의 적극적인 찬동 아래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는 점에 주목해야 한다. 이 무렵부터 모택동은 수십 년 이상 지속될 것으로 여겨졌던 ‘신민주주의 체제’를 서둘러 ‘사회주의 체제’로 전환시켰고, 유명한 1957년의 반우파 투쟁 역시 그가 단독으로 추진하였다. 모택동이 추진하는 것을 무조건 맹종하는 모택동주의자’는 많았지만, 대다수 다른 중공지도자들은 내심으로는 뭔가 미심쩍다는 생각을 품으면서도 그의 독단에 반대할 수 없었다. 모택동은 이 시기 가장 중요한 결정은 사전에 당의 동의를 거치지 않은 채 대부분 당 밖의 집회에서 독단적으로 발표하는 일이 많았다. 그렇게 보면 사실 진정한 모택동주의자는 모택동 한사람뿐이었던 것으로 볼 수도 있다. 그의 꿈은 그만큼 현실에서 유리된 이상주의에 물들어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당시 아무도 이러한 그의 꿈을 가로막지는 못하였다.

특히 1957년의 반우파 투쟁으로 정권에 비판적인 모든 지식인과 학생들을 철저하게 탄압해버린 것은 이후 중국에서 당 내외를 막론하고 어떠한 ‘건전한’ 반대의견의 제시도 불가능한 것으로 만들어버렸다. 그 직접적인 결과가 바로 모택동의 독단으로 밀어붙인 대약진운동과 문화대혁명, 그리고 이어진 엄청난 참상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이를 통해 모택동은 어쩌면 위대한 중국혁명의 지도자·교사에서 점차 ‘늙고 고집 센 추악한 황제’로 변신하게 되었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그러한 변신이 가져온 엄청난 격변과 희생 때문에 부강한 중국을 만들겠다던 애초의 꿈은 한참 뒤로 미루어질 수밖에 없었다. 등소평 이후 추진된 개혁·개방으로 부강한 중국의 건설은 이제 현실로 나타났지만, ‘농민의 중국’을 꿈꾸었던 모택동이 이제 다시 도시와 경제의 비약적 발전이라는 그늘 아래 심각해진 빈부격차, 공산당의 부패, 그리고 도시에 엄청 뒤쳐진 농촌과 농민·농업이라는 ‘삼농(三農)’ 문제에 골머리를 앓고 있는 현대중국의 모습을 발견하게 된다면, 그는 과연 어떠한 반응을 보이게 될까?

하지만 이것이 이야기의 끝은 아니다. 모택동의 ‘다른 얼굴’은 좀더 이야기를 전개할 만한 여지를 남겨두고 있기 때문이다. 1949년의 승리 속에서 의기양양한 모택동은 ‘유심역사관의 파산’이란 글에서 미국의 <중국백서>를 비판하면서 이렇게 주장하였다. 미국 국무장관 애치슨은 말한다. “중국인구는 18, 19세기에 2배나 증가하였고, 그래서 토지는 감당할 수 없는 압력을 받았다. 그래서 인민의 먹는 문제는 중국정부가 부딪치는 첫 번째 문제가 되었으며, 지금까지 어떤 정부도 이것을 해결하지 못했다.” 뭘 모르는 사람이 보기에는 아주 그럴듯하다. 혁명의 발생이 인구가 너무 많기 때문이라고? 고금중외의 모든 혁명은 모두 인구가 너무 많아 발생했는가? 미국의 독립혁명도 인구가 너무 많아서 발생했던가? 애치슨의 역사지식은 제로에 가깝다. 아마 미국 독립선언도 읽어보지 못한 것 같다. 중국인민이 역대로 스스로의 봉건조정을 무너뜨린 것은 봉건조정의 인민에 대한 압박과 수탈 때문이지 무슨 인구과잉 따위 때문은 아니다.

‘위대한 중국혁명’의 승리는 인구 때문이 아니라 계급투쟁 때문이라고 장담하는 모택동의 이러한 이해는 이후 대약진 운동과 문화대혁명 못지 않은 엄청난 ‘후과’를 남기게 된다. 특히 1957년 <신인구론>을 발표하여 1953년 말 이미 5억9천명에 이른 중국의 인구를 제대로 조절하지 못하면 경제발전의 효과가 모두 상쇄되어 버릴지도 모른다는 우려를 표명한 경제학자이자 북경대학교 총장이었던 마인초(馬寅初)에 대해 대규모 비판투쟁을 벌인 것은 바로 그러한 재난의 출발점이었다. 당시 모택동은 소련과의 핵전쟁을 염두에 두고 있었기 때문에 인구가 많으면 많을수록 좋다고 생각하였다는 설명도 있고, 근대 자본주의경제를 제대로 경험해보지 못한 농촌 출신의 혁명가 모택동은 기계가 아니라 바로 인구(노동력)가 생산력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라고 하는 설명도 있다.

여하튼 모택동이 주도한 이러한 ‘정치적’ 비판에 학문적 진리를 추구한 고집 센 학자 마인초는 결코 굴복하지 않았지만, 엄청난 ‘문해전술(文海戰術, 마인초를 비판하는 글이 엄청나게 발표됨)’ 앞에 입을 다물지 않을 수는 없었다. 마인초는 사망한 다음인 1970년대 후반에 가서야 복권이 된다.

유소기와 모택동의 엇갈린 운명

그 결과 거대한 인구의 ‘조절’이란 문제는 모택동의 사망 이후에야 다시 일정에 오르게 되었다. ‘1가구 1자녀’ 정책이라는 현대중국을 특징짓는 인구 정책이 본격화된 것은 바로 1970년대 후반부터이지만, 이때는 이미 인구가 8억을 넘어선 다음이었다. 그리고 현재 중국의 인구는 이미 15억을 돌파한 지 오래이며, 인구학자의 예측에 의하면 장차 20억에 이를 것이라고 한다. 지난 수백 년 동안 중국의 인구는 항상 인류의 1/4 정도를 차지해 왔지만, 어쩌면 그 비중은 좀더 늘어날 지도 모르는 것이다. 이 거대하게 늘어난 인구를 어떻게 먹여 살리고(생존), 나아가 보다 사람답게 살 수 있도록 하는가? 정말 생각만 해도 골치 아픈 엄청난 유산과 과제를 모택동이 남겨 놓은 것이다. 아무리 땅이 넓고 물산이 풍부한 중국(거기에다 오늘날에는 사람이 많다는 것도 추가되었다)이라 할지라도 이것은 정말 감당해내기 어려운 버거움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오늘날 중국에서 1년에 배출되는 대학생만 해도 500만명이라는 통계(우리의 10배가 된다!) 하나만으로도, 청년실업의 문제가 심각해진 오늘날의 한국인은 그 심각성을 충분히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중국에서는 “한 사람을 잘못 비판해서 인구가 3억5천만명이 더 늘어버렸다”는 속설이 나오게 되었지만, 궁극적으로 모택동에게 돌아갈 이러한 과잉 인구의 책임은 실제로는 대약진 운동이나 문화대혁명보다 훨씬 더 큰 ‘실책’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인민공사는 폐지하면 되고, 문화혁명은 중단하면 되지만 이미 15억 이상으로 늘어난 인구는 도무지 ‘줄일’ 방법이 없기 때문이다. 1950년대 중반에 시작되었던 늙은 고집 센 황제의 ‘독주’ 또는 ‘몽상’은 그야말로 엄청난 ‘영향력’을 발휘하였던 것이다. 서두에서 이야기하였던 그의 영향력은 결코 과장이 아니었지만, 그것이 반드시 바람직한 방향으로만 전개되지는 않았다는 것, 이것이 바로 문제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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