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사의 재발견] 남송(南宋)의 효종, 난국 속 이룬 작은 평화①
태조 죽음 미스테리, ‘촛불 속의 도끼 소리’
북송의 제1대 황제 태조 조광윤과 그 뒤를 이은 태종 조광의 사이의 제위 계승은 베일에 가려져 있다. 태조와 태종은 형제간이었다. 976년 12월20일, 중병에 걸린 50세의 태조는 환관 왕계은을 시켜 둘째 아들을 불러오게 했다. 그에게 황제 자리를 물려줄 심산이었다. 하지만 왕계은은 즉시 이 사실을 태종에게 알렸다. 왕계은은 이미 오래 전부터 태종과 내통하고 있었다. 태종이 태조의 병실(寢殿)에 들어간 이후 두 사람 사이에는 큰 소리가 오갔다. 촛불 속에 태종이 이리저리 오가는 모습이 보였고, 또 심상치 않은 도끼 소리도 들려왔다. 이러한 상태에서 태조가 죽고 이튿날 태종이 황제의 자리에 올랐다.
후일 태조가 태종에 의해 죽임을 당했다는 소문이 널리 퍼졌다. 이러한 태조의 죽음을 둘러싼 미스테리를 ‘촛불 속의 도끼 소리(燭影斧聲)’라 부른다. 태종이 황제가 된 이래 황제 자리는 태종의 후손에게 전해졌다.
태조 조광윤은 북송을 창건하였지만 그 후손들은 황제 자리에서 배제되었다. 하지만 민간에서는 훗날 언젠가 태조의 후손들이 다시 황제의 자리를 차지하게 될 것이라는 풍설이 생겨났다. 태조의 후손을 황제로 옹립하고자 하는 움직임도 심심치 않게 일어났다.
태종이 황제가 되고 무려 186년 후 그 풍설은 거짓말처럼 실현되었다. 바로 남송의 두번째 황제 효종에 의해서다. 효종은 고종에 의해 선택되어 황제가 된 인물이다. 고종은 아들이 없었고, 그래서 멀리 태조의 후손 가운데 후계자를 선택하였다. 그리하여 태조의 7대손인 효종이 난데없이 황제가 될 수 있었던 것이다.
효종이 황제의 자리에 있었던 기간은 1162년부터 1189년까지의 28년간이다. 효종의 통치기는 남송 전체를 통해 가장 사회가 안정된 시기라는 평가를 받는다. 남송 말기의 학자들은 효종 시대를 ‘성세(盛世)’라 부르며 동경하였다. 북방의 여진족이 세운 금의 압박도 효과적으로 견제하였을 뿐더러, 정치와 경제 등의 분야에서도 안정적인 상태를 유지하였다.
멀고도 험난했던 즉위과정
남송은 건립 이후 멸망에 이를 때까지 지속적으로 이민족의 위협에 시달려야 했다. 초기에는 여진족의 금에게, 그 다음에는 더욱 강력한 세력인 몽골의 압박에 쫓겼다. 대외 위기로 말미암아 정치, 경제, 사회 구조도 심각하게 왜곡되었다. 이러한 남송의 역사 가운데 효종의 시대만은 이례적으로 평화가 깃들었던 것이다. 난국 속에서 안정을 일궈낸 군주, 효종의 치세는 어떻게 시작되어 어떻게 굴절되어 갔던 것일까? 효종 시대에 드리워진 문제는 무엇이었으며 이에 대해 효종은 어떻게 대처해 갔던 것일까?
남송을 세운 황제 고종에게는 아들이 없었다. 아니 정확하게는 21살에 얻은 아들이 하나 있었으나 요절하였다. 이후 오랫동안 자식을 얻지 못하자 종실 가운데 양자를 들이기로 마음먹었다.
고종은 태종 계열보다는 태조의 후손 가운데서 후보자를 찾았다. 혈연적으로 가까운 태종의 자손을 제쳐 두고 굳이 태조 후손에서 양자를 들이고자 했던 것은 이유가 있었다. 될 수 있는 대로 먼 친척 중에서 뽑아야 더 고마워하고 또 그런 만큼 자신의 말을 더 잘 들을 것이라 여겼기 때문이다.
1132년(소흥 2) 5월, 수소문 끝에 태조의 7대손인 조백종(趙伯琮)과 조백호(趙伯浩)가 선발되어 궁궐에 들어왔다. 두 사람을 두고 고종이 직접 한 사람을 고르기로 했다. 둘이서 고종 앞에 서있을 때 마침 고양이 한 마리가 갑작스레 달려왔다. 이를 보고 백호는 발로 걷어찼으나 백종은 미동조차 하지 않았다. 결국 백호는 성격이 경박하다는 이유로 탈락하고 백종이 최종적인 낙점을 받았다. 당시 조백종의 나이는 6살이었다.
백종은 입궁하여 후궁 장씨(張氏)의 처소에서 양육되기 시작하였다. 이름도 조원(趙瑗)이라 바뀌었다. 이때로부터 1162년 황제로 즉위할 때까지 30년 간, 그는 고종의 눈에서 벗어나지 않기 위해 숨을 죽이고 살아야 했다. 1134년(소흥 4) 조원에게 경쟁자가 하나 생겼다. 후일 황후가 되는 고종의 총비 오씨(吳氏)가 또 다른 아이의 양육을 청원하여 조백구(趙伯玖)를 입궁시켰기 때문이다. 조백구는 조거라 개명되었다. 조거는 조원보다 3살이 어렸다. 조원과 조거는 똑같은 처우를 받으며 자랐다. 하지만 조거의 후원자인 오씨는 자신이 키우는 아이(조거)를 후임 황제로 만들기 위해 백방으로 노력하였다.
조원, 궁녀 10명?범한 조거 대신 고종 아들에 낙점
조원과 조거는 16살이 되면서 관례에 따라 차례로 출궁하여 바깥에서 거주하게 되었다. 두 사람의 거처는 동부(東府)와 서부(西府)라 불렸다. 호칭과 처우도 동일하게 주어졌다. 조정의 관료 가운데는 두 사람과 선을 대며 미는 사람들도 생겨났다.
조원은 조용하고 근면한 성격의 소유자였다. 어려서부터 희로애락을 안색에 드러내지 않았다. 항상 독서에 몰두하고 무예를 닦았다. 입고 먹는 것 또한 매우 검소하였다. 이 때문에 고종은 조거가 입궁한 이후에도 내심 조원에게 마음을 기울이고 있었다.
고종은 조원과 조거 두 사람을 마지막으로 시험하기 위해 각각 궁녀 10명씩을 하사하였다. 얼마 후 궁녀들을 모두 불러 살펴보니, 조거는 10명 모두를 범하였지만 조원은 하나도 건드리지 않은 상태였다. 고종을 이를 보고 마침내 조원 쪽으로 마음을 정했다.
1160년(소흥 30) 2월, 마침내 조원은 정식으로 고종의 아들이 되었다. 이름도 다시 조위(趙瑋)로 고쳐져서 건왕(建王)에 봉해졌다. 조거는 고종의 조카(皇姪)로 정해졌다.
오랜 세월 기다린 끝에 난관을 모두 극복한 듯 보였다. 하지만 조위에게는 또 하나의 위기가 찾아왔다. 1161년(소흥 31) 금의 해릉왕이 남침했을 때의 일이다. 고종은 금의 대거 남침이라는 위기에 직면하여 장병들의 사기를 북돋우기 위해 친정을 발표하였다. 이에 건왕 조위가 고종의 환심을 사려고 군대를 이끌고 선봉에 서겠다고 자원하고 나섰다. 이것에 고종이 대노하였다. 고종은 당 중기 안사의 난이 발생했을 때, 황태자가 군대를 이끌고 반란 진압에 나섰다가 자립하여 황제(肅宗)가 되었던 사실을 떠올렸던 것이다. 건왕 조위는 스승으로 있던 사호(史浩)의 권유를 받아들여, 고종을 호위하며 자식으로서의 도리를 다 하겠다는 내용의 상주문을 올렸다. 또 어떠한 직위도 맡지 않고 고종의 좌우에 머물겠다고 다짐하였다. 이러한 거듭된 다짐에 고종의 의심이 가까스로 풀렸다.
금과의 전투가 일단락된 1162년 5월, 고종은 건왕 조위를 황태자로 삼았다. 그리고 그 한 달 후인 6월, 고종이 퇴위하고 건왕 조위가 황제로 즉위하였다. 당시 고종의 나이는 56살, 효종은 36살이었다. 고종은 태상황이 되었고 황후 오씨는 태상황후가 되었다. 그들은 과거 권신 진회가 살던 곳을 덕수궁(德壽宮)이라 이름을 고치고 그리로 이주하였다.
금과의 대립과 절충
효종은 즉위 직후부터 금과의 관계를 재정립하는 문제에 매달려야 했다. 금 해릉왕의 남침은 1161년 11월 남송의 명신 우윤문(虞允文)이 채석(采石)의 전투에서 대승을 거둠으로써 끝났다. 해릉왕은 내부의 반란으로 피살되고 그 대신 금에서는 명군이라 일컬어지는 세종이 즉위하였다. 금은 효종이 즉위한 이듬해인 1163년 3월 사신을 보내왔다. 금측은 송에 대해, 채석의 전투 이후 송측이 점령한 지역의 반환 및 세폐의 지급을 요구하였다.
남송은 고종 시대인 1142년 금과 강화 조약을 맺었다. 이를 당시의 연호를 따서 소흥(紹興)의 화의(和議)라 부른다. 소흥 화의에서는 금과 남송의 관계를 군신 관계로 규정하였다. 또 남송이 금에 대해 매년 은 25만 냥과 비단 25만 필을 지급하고, 이를 세공(歲貢)이라 부르기로 했다.
금이 사신을 보내 소흥 화의의 이행을 요구하자, 남송은 양국의 지위를 평등하게 하고 국경을 재조정하자고 응답하였다. 금은 이를 거절하였다. 효종은 전쟁을 통해 굴욕적인 대금 관계를 청산하고자 했다.
1163년 5월 남송은 6만의 군대를 동원하여 북벌에 나섰다. 하지만 남송의 군대는 금과의 국경인 회수를 건넌 직후 대패하였다. 남송의 군사력은 금의 남침을 가까스로 막을 정도는 되지만, 금의 영역으로 진군하여 화북을 탈환할 수 있는 상태는 아니었던 것이다. 남송의 북벌이 실패로 끝난 후 금은 다시 사신을 보내왔다. 금이 제시한 강화의 조건은 소흥 화의에 비해 다소 남송측에 유리한 것이었다. 대신들 사이의 의견은 엇갈렸다. 효종 역시 금이 제시한 조건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러자 진회 계열 탕사퇴(湯思退)가 주장하였다. “태상황에게 알려 그 뜻을 따르는 게 좋겠습니다.” 이 말을 듣고 효종은 화를 냈다. “저들이 이처럼 무례한데도 그대는 화의를 주장하는가? 현재 금의 기세는 과거 진회 때와는 다르다.”
하지만 태상황으로 물러나 있던 고종은 효종에게 금과의 화의를 강요하였다. 이에 밀려 효종은 어쩔 수 없이 화의를 진행시켰다. 남송과 금 사이의 강화는 1164년(융흥 2) 12월에 체결되었다.
이를 당시의 연호를 따서 ‘융흥(隆興)의 화의’라 부른다. 융흥 화의에서는 종래 군신 관계로 규정되어 있던 금-남송 관계를 숙질, 그러니까 숙부와 조카 사이로 바꾸었다. 물론 남송의 황제가 금황제에 대해 숙부라고 칭하기로 한 것이다. 또 매년 금에 지급하는 물자의 양도 ‘은 20만 냥 비단 20만 필’로 정했다. 이전에 비해 각각 20%가 줄어든 셈이다. 또 그 명칭도 ‘세공(歲貢)’이 아니라 ‘세폐(歲幣)’라 부르기로 했다.
융흥 화의로 인해 남송의 지위는 이전에 비해 현저히 높아졌지만 여전히 굴욕적이었다. 이를테면 금의 사자가 국서를 갖고 오면, 남송의 황제는 자리에 그대로 앉아 있지 못하고 반드시 자리에서 내려와 받아야만 했다. 효종은 이후 계속 금에 대해, 금 사신 접대 방식의 개정과 북송 황릉(皇陵) 지역의 반환을 요구하였다. 하지만 금의 반대에 부닥쳐 끝내 이를 실현시키지 못하였다.
한편으로 효종은 금을 정벌하기 위한 준비도 병행하였다. 효종이 북벌 준비의 중책을 맡긴 인물은 1161년 금 해릉왕의 남침을 저지한 명신 우윤문이었다. 1167년(건도 3) 우윤문은 서방의 사천선무사로 파견되었다. 그는 군사를 조련하고 성채를 보수해 나갔다. 중앙 정부는 적극적으로 재정을 지원해 주었다.
이와 동시에 중앙에서도 군비의 강화에 심혈을 기울였다. 우윤문이 준비를 완료하고 서쪽으로부터 진군해 가면 효종도 중앙의 군대를 내어 동시에 금을 공격하기로 했다. 1172년(건도 8) 9월, 효종은 우윤문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다.
“만일 경이 서쪽에서 진군함에도 불구하고 짐이 머뭇거리면 그것은 짐의 책임이요, 반대로 짐이 이미 움직였는데 경이 머뭇거린다면 그것은 경의 잘못이 될 것이오.”
하지만 당시 우윤문은 이미 회갑을 넘긴 나이였다. 그는 1174년(순희 원년) 65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이와 함께 효종의 북벌에 대한 의지도 기세가 꺾였다. 이후 효종은 북벌에 대한 꿈을 접고 내치에 전념할 수밖에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