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사의 재발견] 日 초대 천황 덴무가 국가 기틀 다진 비결은?
덴무(天武, 631?~686)는 일본에서 최초로 천황이라 불린 군주이다. 또한 대화개신(大化改新) 이래 추진해 온 중앙집권적 고대국가의 기틀을 다진 인물이기도 하다. 그는 672년 ‘임신의 난(壬申の亂)’이라는 일본 고대사에서 보기 드문 대규모 내란을 통해 조카로부터 왕위를 쟁취하였다. 그는 어떤 인물이었는가?
壬申의 난···덴무,?황태자 조카 죽이고 군주에 올라
원래 그는 자신의 형인 덴찌(天智, 626~672)로부터 왕위를 물려받도록 되어 있었다. 대황제 동궁태황제(大皇弟?東宮太皇弟)라는 지위를 가지고 있었는데, 이는 그가 왕위를 계승할 황태자에 준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덴찌의 아들인 오토모 황자(大友皇子,648~672)가 장성하면서 덴찌의 마음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아들은 체격과 용모가 훌륭하고 박학하였으며 문무에 모두 재주가 있었다고 전한다. 덴찌가 처음 생각했던 것과 달리 자신의 왕위를 아들에게 물려주려고 한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그래서 오토모를 신하로서는 최고의 지위인 태정대신(太政大臣)에 임명하고 정사의 경험을 쌓도록 하였다.
671년 병이 깊어진 덴찌는 동생 덴무를 병상에 불러 들였다. 그리고 왕위를 계승해서 자신의 아들을 잘 돌봐달라고 넌지시 의중을 떠보았다. 그러자 덴무는 “형님이 병석에 누워계신데 어찌 왕위를 잇겠느냐”면서 왕위는 황후에 물려주고 오토모가 집정하는 것이 좋겠으며, 자신은 머리를 깎고 출가하여 형님의 병이 낫도록 기도를 하겠다고 했다. 원래 덴찌는 덴무를 제거할 요량이었으나, 출가해서 자신의 병이 낫도록 기도하겠다는 동생의 말에 차마 죽이지 못하고 출가를 허락했다. 덴무는 그 자리에서 머리를 깎고 부인과 아들 그리고 시종 몇 명을 데리고 요시노(吉野)라는 산 속으로 들어갔다. 이때 사람들은 덴무를 죽이지 않고 풀어준 것은 “호랑이에게 날개를 달아준 격”이라고 수군거렸다.
오토모 황자에게 요시노에 머물고 있는 덴무는 목에 걸린 가시와 같았다. 그래서 덴무의 행동을 감시하는가 하면, 어떻게든 그를 제거할 기회를 엿보고 있었다. 덴무는 오토모 황자 측의 동향이 예사롭지 않다고 여기고 드디어 요시노를 벗어나 동쪽으로 이동하기 시작했다. 그 과정에서 지방의 중소호족들을 규합해서 결국 한달 만에 오토모 황자를 죽음으로 내몰았다. 덴무가 동원한 병력
은 주로 현재의 나라 남부, 나고야, 나가노, 기후 등의 세력이었다.
그러나 과연 <일본서기(日本書紀)>가 기록하고 있는 것처럼, 덴무가 요시노로 들어갔다가 오토모 측의 견제로 부득이하게 병력을 모아 거병한 것으로 보아도 좋은 것일까? 최근에는 모든 행동이 미리 계획된 것으로 보는 견해도 있다. 아무런 준비가 없는 상황에서 한달 만에 모든 상황을 정리했다고 하는 <일본서기>의 내용을 그대로 믿기 어렵다. <일본서기>는 침묵하고 있지만, 요시노에 머물고 있던 6개월 간, 거병을 위한 치밀한 계획을 세우고 이를 실행하였기 때문에 짧은 시간 많은 병력을 모았다고 보는 것이 자연스럽다.
특히 덴무 일행이 통과한 이가(伊賀)라는 지역은 오토모 황자 생모의 근거지였다. 그럼에도 덴무는 이 지역을 무사히 통과하였을 뿐 아니라 호족들의 협력을 얻어냈다. 때마침 신라정벌을 위한 병력을 동원하기 위하여 중앙에서 사신들을 파견하고 지방호족 세력의 병력을 징발하고 있던 중이었다. 이들이 모두 덴무 측에 가담한 것을 보면, 덴무 측의 사전 공작이 있었던 것이 분명하다. 결국 요시노로 들어간 행위 그 자체가 중앙조정의 눈길을 피해 비밀리 각 지역에 파견된 사신과 현지 호족세력이 접촉하기 위한 포석이었을 가능성이 크다. <고사기(古事記)>의 서문에 “인사가 갖추어지자 동쪽 지역으로 호랑이처럼 걸어나갔다“고 한 것은 그런 상황을 보여준다.
덴무를 ‘신적인 존재’로 여기며 ‘천황’ 호칭···부인이 천황직 승계??
덴무는 불과 수십명으로 출발해서 수만명의 병력을 모았고 마침내 오토모 황자 측의 군사들과 맞서 싸워 승리를 거두었다. 사람들은 그를 인간의 능력을 넘어선 신적인 존재로 여겼다. ‘천황’이라는 호칭은 신적인 존재인 덴무에서 시작된다. ‘천황’이라는 용어가 어디에서 비롯된 것인지 논란이 끊이지 않고 있다. 그런데 덴무의 시호 ‘천정중원영진인(天渟中原瀛眞人)’을 보면 도교와의 관련성을 알 수 있다. ‘영(瀛)’은 불로불사의 신선들이 사는 이상향을 뜻하는 말이고, ‘진인(眞人)’도 불로불사를 체득한 신선을 가리킨다. 그런 점에서 ‘천황’은 중국 도교의 최고신인 ‘천황대제(天皇大帝)’에서 온 것일 가능성이 크다.
천황(天皇)이라고 쓰고 일본어로는 ‘스메라미코토’라고 읽는다. 이는 ‘더없이 청정하고 존귀한 존재’, ‘한 점의 더럽힘도 없는 존재’라는 뜻이다. 덴무와 그를 이어 왕위에 오른 부인 지토(持統, 645~703)는 자신들을 종전의 군주와는 구별해서 신성하고 고귀한 존재로 위치시키고자 했다. 권력은 그것을 분식할 논리를 갖출 필요가 있었던 것이다. 덴무는 임신의 난에서 실제로 전투에는 참가하지 않았다. 비파호 주변과 나라 분지에서 양 진영의 전투가 치열하게 벌어지고 있는 사이에도 최후방에 머물러 있었다. 전투의 지휘는 아들인 다케찌황자(高市皇子,654~696)에 맡기고, 자신은 손에 피를 묻히는 자들과 구별했다. 그래서 덴무, 지토 그리고 그 자식들을 단순히 아마테
라스오미카미(天照大神)의 후손 즉 신의 후손이 아니라 현인신(現人神)으로 위치시켰다. 인간의 모습을 하고 있지만 실제로는 신이며 비록 죽음을 통해 인간의 모습을 버리더라도 신으로서는 영원히 존재하는 것으로 여기도록 했다.
중앙집권 기틀 다져···수도이전, 호족 성씨부여, 호적정리, 토지지급, 율령반포
임신의 난을 통해 왕위를 차지한 덴무는 오토모 황자 측에 가담한 유력호족들을 숙청하고 중요한 자리에는 모두 자신의 아들을 비롯한 황친을 앉혔다. 바로 황친정치(皇親政治)의 시작이다. 덴무를 제거하려고 했던 중 앙호족들은 덴무의 전제에 저항할 수 없었다. 한편 새로운 권위를 가진 천황을 위한 장치들이 만들어져 갔다. 먼저 오토모 측의 거점이 된 도읍을 버리고 새로운 수도를 만들기 시작했다. 후에 후지와라경(藤原京)이라고 불리게 되는 수도이다. 중국의 <주례(周禮)>에
보이는 도성제에 따라서 궁을 한 가운데 둔 거대한 규모의 도성을 건설하였다. 이 도성은 정방형이었으며 한변의 길이가 5.3km에 달했다. 덴무는 그 완성을 보지 못했지만, 그의 부인인 지토의 시대에 새로운 도읍이 완성되었다. 새로운 시대를 규제할 제도도 연속적으로 제정하였다.
호족들의 지위를 나타내는 8가지의 성씨를 정하고 신하의 우열을 분명히 하였다. 씨성(氏姓)의 연원을 밝히기 위한 호적도 작성했다. 이때부터 6년에 한 번씩 호적 1 역사 속에서 본 전환기의 새
을 작성하는 관례가 시작되었다. 이를 근거로 백성들에게 일정한 토지를 지급하는 제도도 확립되었다. 이런 과정 속에서 중국의 율령을 모방하여 ‘정어원령(淨御原令)’이라고 하는 새로운 법령의 제정에도 착수하였다. ‘일본’이라는 나라 이름도 이 무렵에 만들어진 것으로 보인다. 오랫동안 ‘왜(倭)’ 혹은 ‘왜국(倭國)’이라 불리던 일본열도사회는 드디어 ‘일본’이라는 새로운 이름으로 역사무대에 등장하게 된다.
덴무에서 쇼토쿠에 이르는 8대 천황 모두 덴무 부인·직계 독차지
덴무 이후 지토에서 쇼토쿠(稱德)에 이르는 8대 천황?중 겐메이(元明, 덴찌의 딸이자 지토의 동생. 덴무와 지토 사이의 아들인 草壁의 부인)를 제외하고는 모두 덴무와 지토 직계 후손들이다. 직계를 왕위에 올리기 위해서 나라시대 내내 여자 천황들이 연이어 즉위하는 특이한 상황이 전개되었다. 지토도 덴찌의 딸이었고, 오토모는 지토의 배다른 남동생이었다. 덴무의 고손녀에 해당
하는 쇼토쿠가 죽은 후 새로운 천황으로 선택된 사람은 고닌(光仁, 709~781)이었는데 그는 덴찌의 손자였다. 전체적으로 보면 나라시대는 덴찌와 덴무의 직접적인 후손들이 왕위를 계승한 시기였다.
덴무는 일본 고대사 초유의 대규모 내란에서 치밀한 전략으로 승리를 거두고, 왕권강화에 걸림돌이 되는 중앙호족세력을 억압하면서 강력한 중앙집권국가를 지향하였다. 또한 ‘천황’이라는 칭호, ‘일본’이라는 국호, 율령제의 도입, 항구적인 도성의 건설 등 많은 특징들이 덴무의 통치기간에 연원을 두고 있다. 그런 점에서 덴무와 그의 충실한 내조자였던 지토는 일본 고대국가의 설계자들이었다. 또한 근대에 재생되는 천황을 중심으로 한 일본국의 원형을 만든 인물이라고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