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사의 재발견] 600년전 明영락제가 북경으로 수도 옮긴 까닭은?
1398년 주원장(朱元璋)이 사망했다. 명조를 개창하고 31년 동안 권좌에 앉아 통치 기반을 다졌던 홍무제(洪武帝)가 71세의 나이로 생을 마감하면서 차세대 지도자가 등장해야 했다. 공교롭게도 14세기 후반 동아시아 각지에서 새로운 정권(政權)이 수립되었다. 조선(朝鮮), 무로마치 막부, 류큐의 상씨(尙氏), 베트남의 진조(陳朝), 타이의 아유타야(Ayutthaya), 믈라카(Malacca) 등. 바야흐로 동아시아 세계는 시대적 전환기에 처해 있었던 것이다.
유혈의 테니스트리···주원장 4남 주체, 조카 ‘건문제’?물리치고?’영락제’ 즉위
하지만 중국의 황위는 생존하던 주원장의 여러 아들 가운데 전수되지 않고, 손자 주윤문(朱允?)에게 넘어갔다. 명조의 두 번째 황제로 기록된 건문제(建文帝)다. 아들이 아니라 22세의 손자에게 황위가 넘어간 까닭은 본래 황태자로 책봉된 장자 주표(朱標, 1355-1392)가 홍무제의 통치 기간 중에 사망했기 때문이다. 주원장은 적처(嫡妻) 마황후(馬皇后)의 소생이었던 주표와 그의 장자인 주윤문을 연달아 자신의 후계자로 선정했는데, 이는 전통적인 적장자(嫡長子) 후계 방식을 따름으로써 명조의 안정적 황위 계승의 기초를 구축하기 위함이었다. 하지만 도리어 이로 인해 명조의 정치는 큰 혼란 속에 빠져들었다.
권좌에 등극한 건문제는 삼촌뻘이 되는 여러 번왕(藩王), 즉 할아버지 홍무제의 여러 유력한 아들들을 제압하려 했다. 남경(南京)에 도읍을 정했던 홍무제는 몽골 초원으로 쫓겨 간 몽골세력 및 변경의 반란 세력을 방어하기 위해 북변 지역에 9명의 아들을 왕으로 분봉(分封)시킨 바 있었다. 그들에게는 왕위 세습, 거액의 연봉, 그리고 대규모 군대를 통솔할 수 있는 권한이 부여되어 있었으므로, 어린 건문제에게 여간 정치적 부담이 아닐 수 없었다. 여러 번왕들 역시 호시탐탐 홍무제의 뒤를 잇기 위해 경쟁하던 상황에서 ‘허무하게도’ 조카에게 권좌가 넘어갔으니, 건문제에 대한 감정이 좋을 리 없었다.
번왕 가운데 건문제의 등극에 가장 불만이 강했던 이가 홍무제의 29명의 아들 가운데 넷째이자 연왕(燕王)에 책봉되었던 주체(朱?, 1360-1424)였다. 홍무제가 사망할 무렵 홍무제의 둘째와 셋째 아들까지 모두 사망한 상태였으므로, 주체는 그야말로 제왕지장(諸王之長), 즉 가장 권세가 컸던 인물이었다. 황태손 주윤문만 제외하면 황위 계승 서열 0순위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게다가 주체는 어릴 적부터 용맹이 뛰어나서, 아버지 홍무제는 그의 나이 11살에 원의 수도였던 대도(大都, 오늘날의 북경)를 거점으로 한 연왕으로 책봉했고, 기존 군사력에 투항한 몽골 병사들까지 합하여 강력한 군사력을 구축했다.
물론 주체에게는 친모가 마황후가 아니라 조선인으로 추정되는 후궁이라는 약점이 있었다.
하지만 주체의 입장에서 볼 때, 어차피 황태자가 사망했으므로 부친 홍무제가 마지막 순간 굳이 적장자 제도를 고수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을 법했다. 이전 왕조인 원조는 세조(世祖) 쿠빌라이 이래 대권을 놓고 여러 아들 사이에 경쟁을 시키고 그 가운데 능력 있는 아들을 다음 대칸으로 선출하는 이른바? 테니스트리(tanistry, 부친을 계승하기 위해 형제들이 경쟁하는 관습)’ 방식으로도 거대한 제국 경영에 성공했음을 당시 지도자들은 모두 충분히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물론 이 과정에서 형제간의 살육이 벌어지는 일이 흔했는데, 이는 ‘유혈의 테니스트리’라고 부를 수 있다.
결국 건문제가 번왕의 권한을 빼앗는 삭번(削藩) 정책을 추진하자 주체는 적장자 계승 방식을 거부하고 ‘유혈의 테니스트리’로 맞대응하는 방식을 선택했다.
건문제가 삭번을 추진하면서 연왕을 위협하는 과정도 신중했지만, 이를 미리 예견하고 쿠데타를 준비하는 연왕 주체는 더욱 치밀했다. 당시 연왕의 세 아들은 수도 남경에 있었는데, 연왕은 꾀병을 부리며 일부터 미친 척하였다. 물론 이는 아들들을 자신의 거처로 안전하게 송환하는 동시에 상대방을 안심시키려는 술수였는데, 이를 눈치 채지 못한 건문제는 1399년 주체의 아들들을 돌려보냈다. 아들을 안전하게 확보한 주체는 바로 건문제의 정치적 문제점을 지적하며 군사봉기의 명분을 내세우는 포고문을 반포하고 거병했다. 이후 3년 동안 지속된 내전에서 승리한 주체는 1402년 황제로 등극하고 영원한 복락을 기원하면서 ‘영락(永樂)’이라는 연호를 제정했다.
영락제는 황제로의 등극과 동시에 자신이야말로 부친 홍무제를 계승하는 명조의 두 번째 황제임을 분명히 했다. 이를 위해 역사책에서 ‘건문(建文)’이라는 연호를 모두 지워버리는 대신 홍무제가 이미 사망한 뒤인 1402년까지 ‘홍무(洪武) 35년’으로 기록하게 하고, 건문제에게는 묘호(廟號)도 부여하지 않았다. 자신의 쿠데타를 “나라의 위난을 평정한다”는 뜻을 지닌 ‘정난(靖難)’이라고 명명한 것도 같은 맥락에서 이루어진 일이다. 하지만 역사의 힘은 무서운 법! 200여 년이 지난 후 만력제(萬曆帝, 재위 1572-1620)는 건문제의 연호를 다시 부활시키고 ‘은혜로운 황제’라는 뜻을 담은 혜제(惠帝)를 주윤문의 묘호로 추서(追敍)해 주었다. 영락제는 원조의 유산(legacy)인 ‘테니스트리’에 따라 자신이 황제에 등극하는 과정에 아무런 문제가 없다고 생각했지만, 적장자 후계 방식에 경도된 명조 후반의 황제는 이 점을 문제시 삼고 역사를 다시 쓴 셈이다. 영락제가 홍무제의 후예이자 동시에 “쿠발라이의 후예”라고 불리는 것도 바로 이 때문이다.
수도이전 프로젝트···관리들 반대 무릅쓰고?북경으로 옮겨
북경에서 성장했던 영락제는 남경에서 황위에 올랐다. 당시 수도가 남경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남경 황성에서 마주해야 했던 조야(朝野) 관리들의 태도는 싸늘했다. 명조를 개창했던 국부(國父) 홍무제의 뜻을 어기고 쿠데타를 통해 황제에 오른 영락제이기에, 유교적 이념을 지닌 문관(文官)들에게 통치의 정당성(legitimacy)을 확보하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여러 지식인들과 백성들 역시 무력을 앞세운 영락제보다 유약해 보였던 건문제에게 동정을 느꼈다. 정난의 변 당시 대화재에 휩싸인 황궁에서 건문제의 주검을 찾지 못했는데, 이를 두고 건문제가 살아남아 그 후손이 이어졌다는 소문이 명 중엽까지 이어진 것은 당시 이러한 민심의 향배를 보여준다. 무력을 통해 권력을 장악했으나 통치의 정통성을 확보하고 민심을 얻어내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였다.
영락제는 이러한 정치적 문제를 외교적 차원과 거국적인 국가 프로젝트 사업을 통해 극복하려 했다. 시작은 남경에서 북경으로의 수도 이전 프로젝트였다. 앞서 언급했듯 영락제는 11살에 연왕에 봉해진 이후 44살에 황제에 오르기까지 33년간의 청·장년기를 북경에서 지냈다. 당시 북평(北平)이라 불리던 북경에는 원 대도의 흔적이 남아있었고, 다소 거친 듯한 몽골의 잔족 세력과 환관 및 북방인들이 영락제에게 익숙했던 인물이었다. 당연히 남경의 관리들과 고상한 남방인들의 문화가 막 황위에 오른 영락제에게 편할 리 없었다. 이를 눈치챈 예부상서(禮部尙書) 이지강(李至剛)은 황제에게 재위 원년부터 북경으로의 천도를 부추겼다. 이지강이 내세운 논리는, 고래로 포의(布衣) 신분으로 황제에 오른 선조들은 모두 ‘자신이 발흥했던 지역(肇迹之地)’을 숭상하는 법이라면서, 주원장 역시 고향인 봉양(鳳陽)을 중도(中都)로 승격시켰음을 상기시켰다. 이에 영락제는 수도 남경에 대칭되는 ‘북쪽의 수도’라는 북경(北京)이라는 이름을 변경 도시 북평에 붙여주었다.
북평을 북경으로 호칭 바꿔···수도 이전 프로젝트의 ‘서곡’
북평에서 북경으로 호칭을 바꾼 것은 수도 이전 프로젝트의 서곡이었다. 그렇지만 수도 이전은 결코 쉬운 문제가 아니었다. 명조의 개국 공신들과 남방의 한인(漢人)들은 북경을 북방민족들의 근거지로 인식하였다. 북방 이민족의 침략에 대한 피해의식이 팽배했던 한인에게 요(遼)ㆍ금(金)ㆍ원의 공통된 수도였던 북경은 그야말로 북방 ‘오랑캐’가 개발한 식민 신도시나 다름이 없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대단히 조심스럽고 비밀리에 북경 황성 건설이 이루어졌다. 무엇보다 남경에서 900km 이상 북쪽에 위치한 북경으로 수도를 이전할 경우 경제 중심지 강남(江南)으로부터의 물자 조달에 큰 어려움이 예상되었다. 이 문제를 극복하기 위해 영락제는 황폐해져 있던 대운하의 대대적인 재건을 명령했고, 1415년 항주(杭州)에서 북경을 이어주는 1800여 km에 달하는 경항대운하(京杭大運河)가 새롭게 개통되었다. 이듬해인 1416년 영락제는 북경 천도를 자신 있게 선포했고, 다시 5년 뒤인 1421년 자금성(紫禁城)을 완성하면서 남경의 각종 관서(官署)와 제단(祭壇)
이 모두 북경으로 이전한 것을 상징하는 조하(朝賀) 의식이 북경에서 거행되었다. 1403년 호칭 변화부터 무려 18년이 걸려 천도가 완료된 셈이다.
직할 대신 외교 치중···일본과 조공관계 재개
영락제의 북경 천도는 단순히 수도를 옮긴 정도에 그친 것이 아니라 명조의 성격을 크게 일변시켰다. 홍무제가 강남 경제력의 안정적 확보를 최우선 과제로 수도를 남경으로 결정했던 것과 달리, 영락제의 북경 천도는 제국의 중심을 강남에서 북경으로 이동시킴으로써 ‘강남정권’이라는 꼬리표를 떼어낸 셈이 되었다. 물론 이 때문에 정치중심지와 경제중심지가 분리되어 강남과 북경을 잇는 대운하 없이는 제국이 유지되기 어려운 사회ㆍ경제적 구조를 탄생시켰으나, 덕분에 전 중국을 안목에 둔 정국운영이 가능케 되었다. 변경의 군권(軍權)을 황제가 직접 장악하게 되어 변경 방어력이 한층 강화된 것은 물론이다.
실제 영락제는 이를 통해 자신이 통치하는 명의 국세(國勢)가 이전보다 크게 확장되길 희망했다. 그는 자신보다 약 130년 전 수도를 북경으로 이전하면서 대운하를 개통했던 쿠빌라이 칸을 하나의 모델로 생각했을 가능성이 높다. 영락제는 직접 군대를 이끌고 고비사막 이북에 잔족하는 몽골세력을 진압하기 위해 5차례에 걸쳐 원정을 감행했고, 만주에서는 여진인들을 복속시켰다. 남쪽으로는 진조(陳朝)의 내란을 틈타 1406년 군대를 파견하여 1428년까지 베트남을 그 지배하에 두었다.
영락제의 최종 목표가 어디까지였는지는 알 수 없으나 그가 침공한 모든 지역을 직할(直轄)하려고 했던 것이 아니었음은 분명하다. 이는 영락제가 집권 3년차인 1405년부터 북경 천도가 마무리된 1421년까지 6차례 파견했던 정화(鄭和)의 원정을 통해서도 알 수 있다. 무슬림이자 환관으로 일찌감치 연왕 주체에게 발탁되었던 정화는 주체가 황제에 오르자마자 바로 거대한 선단을 이끌고 해외 여러 ‘번국(蕃國)’에 다녀오라는 명령을 하달 받았다. 당시 정화가 이끌었던 원정단은 60여 척의 대형선박에 약 2만~3만명이 탑승하여 18만5000km 이상의 거리를 항해했다. 남경에서 제작된 대형선박은 각종 진귀한 보물을 싣는 배라는 뜻으로 ‘보선(寶船)’이라 불렸는데, 길이가 약 126m에 폭이 약 44m에 달할 정도로 거대했다.
정화가 막대한 예물을 싣고 위험하고도 먼 항해를 떠난 이유는 분명했다. 바로 기존에 조공체제에
포함되지 않았거나 아니면 관계가 소원했던 해외의 여러 나라들과 조공관계를 새롭게 갱신하거나 성립하는 것이 정화에게 부여된 임무였다. 1405년에서 1407년까지 지속된 첫 번째 파견에서 인도의 서남해안까지 다다르고 돌아온 정화는 1413년에서 1415년까지 지속된 네 번째 파견에서 아프리카 동부해안까지 진출했다. 정화는 조공국으로 알려진 모든 나라에 가서 영락제가 새 황제로 등극했기에 영락제에게 조공을 바쳐야 한다는 사실을 선포했다.
영락제는 조공국이 이러한 요구를 거절하지 못하도록 정화에게 상당한 군사력을 동원하게 했지만, 군사력에는 정복에 대한 의도가 담겨있지 않았다. 중국은 이미 아시아의 해양세계로 연결된 상업망을 더 발전시키는데 관심이 있었고 중국상인들은 정화의 함대를 통해 자신의 무역확대에 이득을 본 측면이 있지만, 경제적 투자라든가 제국주의적 정복은 정화의 목적이 결코 아니었다. 사라진 건문제를 찾기 위해 파견되었다는 소문 같은 이야기도 전해지지만 사실로 보기는 어렵다. 요컨대 정화의 목적은 외교적인 데 있었다.
“국력의 성장을 체감시켜라”
그렇다면 수도 이전과 군대 파견 뿐 아니라 정화의 원정대 파견과도 같은 거대한 프로젝트는 모두 영락제의 취약한 통치 정당성을 극복하기 위한 대단히 적극적인(positive) 일련의 정책임을 확인하게 된다. 정권을 장악하는 과정에서 무리수가 있었으나 일단 권좌에 오른 후 명조의 국력이 이전보다 강해진 것이 체감되고 또 이를 주변국들이 인정한다면, 영락제에 대한 부정적인 여론도 결국은 약해질 것이기 때문이었다.
이를 염두에 둘 때 영락제가 정권을 장악하는 과정에서 일본과의 국교정상화, 즉 조공관계가 재개된 것도 의미심장하다. 이미 두 차례에 걸친 쿠빌라이의 일본 침공이 모두 실패로 끝난 상황에서 명조를 개창한 홍무제 역시 여러 차례 일본에 사신을 파견해 조공해 올 것을 유인했으나 성과가 없었다. 그런데 건문제가 집권하던 무렵 일본에서는 남북조(南北朝)의 분열을 종식시킨 무로마치(室町) 막부의 3대 장군 아시카가 요시미쓰(足利義滿)가 국내경제의 회복과 발전에 힘을 기울이고 있었다. 이를 위해 중국과의 무역 재개를 희망했던 아시카가는 1401년 사절을 영파(寧波)로 파견했고, 쿠데타로 황위를 찬탈한 영락제는 1402년 자신의 즉위 사실을 즉각 일본에 사신을 보내어 알리면서 이전에 파견되어 온 아시카가의 사절단을 융숭하게 대접해 주었다. 이를 계기로 중국과 일본 사이에 조공관계가 성립되었는데, 이는 ‘왜 5왕(倭五王)’ 이래 900년 가까이 끊어져 있었던 공식적인 조공-책봉 관계의 재개인 동시에 중국과 일본 사이의 마지막 조공관계이기도 했다. 당시 명조는 조공의 대가로 무역할 때 사용이 가능한 감합(勘合)을 발행하여 일본측에 전달했지만, 일본 내부의 분열로 인한 영파쟁공(寧波爭功, 1523년) 이후 양국관계는 소원해지기 시작하고, 1547년 중국에 도착했던 사절단을 마지막으로 양국 사이의 조공관계는 완전히 두절되었다.
이러한 일련의 역사를 염두에 둔다면, 일본과 조공-책봉 관계를 회복했던 외교적 업적은 정치적으로 취약했던 영락제에게 적지 않은 힘을 실어주었을 것이다. 이처럼 영락제는 외교적 차원과 거국적인 국가 프로젝트 사업을 통해 자신의 정치적 약점을 극복해냈다. 티베트 라마 승려에 대한 영락제의 아낌없는 후원 역시 몽골과의 협력을 미연에 차단하기 위한 전략으로 설명하곤 했지만, 취약한 통치의 정당성을 대외관계의 확대를 통해 만회하려는 방식으로도 해석이 가능하다. 1407년 영락제는 티베트의 5대 카르마파(Karmapa) 하리마(Halima, 哈立麻)를 수도 남경으로 초대했다. 그리고 카르마파의 방문과 관련하여 발생했던 기적적인 현상들을 50m가 넘는 호화로운 실크 두루마리에 그림으로 남기고, 중국어, 페르시아어, 티베트어, 몽골어 등의 언어로 설명을 덧붙이도록 명했다. 이러한 행위는 모두 자신의 통치 정당성을 종교적으로 인정받고자 하는 영락제의 간절한 염원이나 다름없다. 영락제는 새로 건설된 수도 북경에 라마교 사원을 건립해주었다. 이후 티베트 지도자와 영락제는 정기적으로 서로의 나라에 사절단을 파견했으며, 다음 세기 동안 명조의 황제들은 이러한 관행을 이어갔다.
정주 vs 유목의 경계에서 대륙 vs 해양의 경계로
1424년 영락제는 65세의 노구를 이끌고 몽골 진압을 위한 다섯 번째 정벌을 떠났으나, 돌아오는 중에 사망했다. 어린 나이에 몽골의 재침입을 방어해야 하는 연왕(燕王)으로 책봉되고 이를 계기로 세력을 키워 황제까지 올랐으므로, 몽골 방어가 영락제에게는 숙명처럼 여겨졌던 것일까? 어쩌면 그래서 그는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늘 몽골의 유산 속에 살아가면서 ‘송조(宋朝)의 회복’을 표방했던 명조에 원조의 특성을 적지 않게 이식시켰다. 하지만 그의 죽음과 함께 명조는 다시금 균형을 잡아가기 시작했다.
정화의 7번째 원정단을 마지막으로 명조는 더 이상 공식적으로 해양 진출을 중단했을 뿐 아니라 정화에 관한 기록마저 모두 파기하려 했다. 황제의 친정(親征) 역시 영락제만큼 주도적으로 반복했던 경우는 없었다. 시간이 지나면서 영락제의 유산은 점차 정리되는 듯했다. 북경 천도마저 다시 원점으로 돌아갈 뻔했다. 하지만 남경으로의 환도는 끝내 이루어
지지 않았고, 그 결과 오늘날까지 북경은 중국의 수도로 그 위상을 유지할 수 있는 동력이 마련되었다. 정주세계와 유목세계를 마치 ‘중심―주변’과 같은 형극으로 파악했던 전통시대, 북경은 정주와 유목세계의 접경에서 ‘긴장’과 ‘통합’의 상징기능을 수행하였다.
해금(海禁)의 시대가 종결되고 해양세력으로 대표되는 서구와의 대결과 경쟁이 본격화된 19세기 이후 북경에는 대륙과 해양 세계의 경계라는 새로운 중요성이 부여되었다. 향후의 북경이 대륙과 해양세계의 경계에서 대립과 긴장의 상징으로 남게 될지, 아니면 소통과 통합의 아이콘으로 승화될지는 미지수이지만, 정주와 유목이라는 구도 속에서 수도 북경이 수행했던 역사적 기능의 무게는 앞으로의 정세 변화에도 결코 적지 않은 영향을 줄 것이다. 영락제와 그 시대의 유산은 아직까지도 사라지지 않은 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