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사의 재발견] 100년전 日여성운동 4인방 영향력 ‘지금도 막강’

1911년 라이초 ‘세이토’ 창간···“원시여성은 태양이었다”로?여성운동 주창

때로는 짧은 한 문장이, 그 어떤 장황한 연설보다 긴 여운과 깊은 울림을 남길 수 있다. 1911년, 일본 여성들이 스스로를 위해 자신들의 손으로 만든 잡지 <세이토>(靑革沓)1의 권두언에 실린 “원시 여성은 태양이었다”는 문장이 바로 그러했다. 하지만 “지금, 여성은 달이다.” 스스로 빛을 발할 수 있었던 태양에서 이제는 단지 태양의 빛을 반사하는 역할밖에 할 수 없는 달의 지위로 전락했다는, 잔인할 정도로 날카로운 자기인식의 선언이었다. 바로 이 선언으로 인해 1911년은 근대 일본여성사에 있어서 하나의 의미있는 시작이 되었고, <세이토> 창간을 주도하고 바로 “원시, 여성은 태양이었다”라는 문장을 썼던 히라쓰카 라이초(平塚らいてう)는 이로써 일본여성사에서 가장 유명한 1인이 되었다.

이날로부터 1931년 만주사변 발발로 여성운동의 침체기에 들어가기까지, 20세기 초반의 약 20년은 근대 일본여성에게 있어서 ‘특별한 시간’으로 기억될 만한 사건들이 이어졌고, 라이초 뿐 아니라 몇몇의 걸출한 여성운동가들을 배출했다. 본고는 바로 이 당시의 주목할 만한 여성들의 등장을 가능하게 했던 사회와 그들의 활동에 관한 이야기이다.

결코 여성들에게 호의적이지 않았던 20세기 초반의 일본에서 여성운동이 활발해질 수 있었던 배경에는, ‘여학교’와 ‘여성잡지’의 존재가 있었다. 개항 이후 일본이 부국강병을 지향하는 이른바 근대화를 위한 개혁에 착수하면서 소학교 의무교육 등 교육제도 정비에 심혈을 기울였지만, 사실 여성들은 주된 관심의 대상이 아니었다. 지금의 중고등학교에 해당하는 ‘여학교’에서는 여성들에게 ‘양처현모’(良妻賢母)가 되도록, 이를 통해 국가에 공헌하도록 지도하였고, 이에 필요한 국어(일본어)나 가정(家政), 재봉과 같은 과목이 중요시되었다. 근대 일본에서의 여성을 위한 학교교육은, 그들의 자아 각성이나 개성의 발휘 혹은 재능의 실현과 같은 것과는 거리가 멀었다. 그들은 남편이 안심하고 밖에서 일하는 동안 가장의 위탁을 받아 집안을 경영하는 좋은 아내이자, 일본 다음세대의 국민을 길러내는 현명한 어머니로서 존재하기 위한 준비과정으로서 학교교육을 받아야 했다.

여학교와 여성잡지,?일본 신여성 출현에 견인차

그러나 20세기에 들어서자 다양한 방식으로 여성들이 사회에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이는 당시 정부의 교육정책을 입안했던 사람들, 혹은 여성정책을 집행했던 남성 지식인들의 의도와는 좀 다른 것이었다. 물론 양처현모주의에 입각한 교육의 결과 ‘주부’(主婦)나 여성교사가 배출된 것은 본래의 교육 의도에 충실한 것이라 할 수 있겠으나, 결코 이 정도에 만족하지 않는 여성들이 나타났다는 점이 문제였다. ‘여학교’ 생활을 통해 이전에는 경험할 수 없었던 또래집단끼리의 여학생 시절을 보낸 이들은 서양 여성운동의 지식을 받아들이게 되면서 스스로 여성임을 ‘자각하기’ 시작했으며, 여성들이 부당한 대우를 받고 있는 현실을 문제삼기 시작했다. 이처럼 자각하기 시작한 여성들은 교사와 같은 안정적인 직업보다는, 스스로를 자신의 언어로 표현하는 문학?평론 등에 관심을 보였다. 앞서 언급했던 <세이토>는 바로 이처럼 근대 일본에서 자각하는 여성들이 등장했음을 알리는 상징적인 사건이었다. 그러나 언론과 대중은 이러한 <세이토>의 지향을 함께 하는 여성을 이른바 ‘신여성’(新女性)이라 부르며 비아냥거렸다.

교육과 더불어 이른바 자각하는 여성들의 등장과 이후의 활동에 기여를 한 또 하나의 요인으로, 바로 근대 일본의 큰 특징이라 할 수 있는 눈부신 출판산업의 발전을 들 수 있다. 개항 이후 근대 일본에서는 일찍부터 출판업이 크게 발전했는데, 그들 중 일부는 잠재적인 고객층으로 학교 교육을 받기 시작한 여성들을 점찍었다. 그리고 이들을 겨냥한 잡지들을 만들기 시작하는데, 처음에는 주로 남성들이 여성들을 가르치려 하는 계몽적인 내용이 주를 이루었다. 그러나 앞서 소개했던 바와 같이, 1911년 <세이토>의 등장은 하나의 분기점이 되었다. 냉소적인 어감을 담은 ‘신여성’은 이제 하나의 개념으로 정착하게 되었고, 남성 지식인을 위한 대표적 잡지였던 <중앙공론>은 오히려 여성문제에 관한 특집을 편성하여 인기를 끌었다. 이제 이른바 ‘여성문제’(婦人問題)가 ‘팔리는’ 소재가 된 것이다. 이후 <세이토>가 수명을 다하고 이를 중심으로 모였던 신여성들이 흩어지게 되자, <중앙공론>은 이들을 흡수하여 자매지 <부인공론>(婦人公論)을 창간(1916), 본격적으로 여성 담론을 선도하게 된다.

‘세이토’ ‘중앙공론’ ‘부인공론’ 등 여성지?20세기초?’계몽’ 앞장?

그러나 사실, 1920년대에 일본에서 여성잡지가 크게 유행했던 것에는 더 큰 이유가 있었다. 바로 도시문명의 발달과 함께 봉급생활자로 대표되는 도시중산층이 새로 대두한 것이었다. 이른바 근대화에 진행함에 따라 지역 공동체와 가업을 떠나 사람들이 모여사는 도시가 발달하게 되고, 도시에는 학교교육을 받은 후에 의사, 변호사, 공무원, 교사 등 전문적인 직업에 종사하면서, 집안의 자산에 의존하지 않고 매달 ‘월급’을 받아 생활하는 계층이 생겨나게 되었다. 이들은 대개 부인과 자녀만을 거느린 ‘핵가족’이었고, 가정 안에서의 여성은 ‘주부’로서의 역할을 부여받게 되었다. 그리고 지역과 가족공동체를 떠난 그들이 생활을 위해 필요한 정보를 입수할 수 있는 주요한 수단이 바로 여성들을 위한 잡지였다.

즉 <부인공론>과 같이 여성해방을 지향하는 내용을 담은 잡지뿐 아니라 가정주부들을 위한 생활정보와 오락기사를 담은 대중적인 여성잡지가 크게 유행했는데, 여성잡지들의 과열경쟁이 더해진 1930년대 <주부지우>(主婦之友)의 판매부수는 100만부를 넘어설 정도였다.

1930년대 ‘주부지우’ 100만 독자···참정권, 모성보호, 낙태 등 ‘불꽃논쟁’

또 다른 의미에서 이들 자각하는 여성들은 여성잡지의 유행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었다. 여성 운동가들은 의도적으로 잡지 지면상에서 격렬한 ‘논쟁’을 벌임으로써 대중의 주목을 받으려 하는 경향이 있었다. 저명한 여성운동가 대부분은 참정권 획득과 같은 중요 사안에 대해 대개 뜻을 같이 했음에도, 지면을 옮겨가며 운동전략과 우선순위를 놓고 치열한 논쟁을 벌임으로써 대중의 시선을 끄는 경향이 있었다. ‘모성보호논쟁’ ‘정조논쟁’ ‘낙태논쟁’과 같은 다수의 논쟁을 벌이는 가운데, 이들은 서로 낯이 붉어질 정도의 감정적인 비난도 서슴지 않았다. 당대의 대표적 여성운동가인 히라쓰카 라이초와 요사노 아키코가 여성의 출산과 육아에 정부의 보호가 필요한가를 두고 논전을 벌였던 이른바 ‘모성보호논쟁’(1916~1919) 당시, 무명의 신진운동가인 야마카와 기쿠에(山川菊榮)가 이들의 논전을 싸잡아 비난하며 등장하면서 자신의 이름을 알렸던 것은 그 대표적인 사례였다. 물론 논리정연한 이론과 빼어난 문장력을 구비했기에 가능했던 일이었다.

20세기초 일본여성운동 4인방···라이초?모토코?후사에?우메코

관료 집안에서 태어나 일본여자대학에 진학한 이후 주로 문필로 이름을 떨쳤던 히라쓰카 라이초가, 이토록 유복한 자신의 배경이나 평소의 문필활동, 그리고 ‘모성보호’2 중심의 주장에서 벗어나 새로운 움직임을 보이기 시작한 것은 1919년경의 일이었다. 그는 교사직을 그만 두고 새로운 길을 모색 중이던 약관의 이치카와 후사에(市川房枝)를 끌어들여 ‘신부인협회’라는 조직을 만들었는데, 이는 여성들에게 일체의 정치활동을 금지한 ‘치안경찰법’의 개정과, 성병에 걸린 남자들의결혼 금지 입법화를 목표로 하는 것이었다. 본격적인 활동에서 약 1년여 후인 1921년 6월경 라이초는 요양의 필요를 이유로, 후사에는 재충전과 새로운 모색을 위해 각각 ‘신부인협회’를 떠났고, 남은 이들만이 운동을 계속하여 1922년 3월 가까스로 치안경찰법의 개정을 이끌어냈다. 하지만 정치결사의 창설이나 활동은 여전히 금지된 채, 오로지 정치집회의 ‘참석’만이 가능해지는 최소한의 성과를 얻은 것에 불과했다.

?1924년에는 신부인협회를 떠나 1년 반 동안 미국에 체류했던 이치카와 후사에가 귀국했다. 그는 귀국하자마자 동조자를 규합하여 단체를 조직했고, 이전보다 한걸음 더 나아가 여성들의 ‘참정권’ 획득을 위한 본격적인 활동을 시작했다.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 서구의 많은 국가에서, 이른바 ‘총후’(銃後)에서의 헌신에 대한 대가로 여성들에게 참정권에게 주어졌던 것이 큰 자극이 되었던 때문이다. 실제 1920년대의 일본에서도 여성의 참정권 획득은 시간문제로 여겨졌고, 1925년 남성들의 보통선거 실시는 여성들의 기대를 더욱 높였다. 실제 1931년에는 조건부로나마 여성에게 참정권을 부여하기 위한 법안이 중의원을 통과하기도 했다. 그러나 결국은 귀족원의 벽을 넘지 못했고, 1931년 만주사변 발발로 일본이 본격적인 ‘전시상황’으로 돌입하면서 여성의 참정권 문제는 관심에서 멀어지게 된다. 그리고 라이초, 기쿠에, 후사에 등 일본 여성운동의 전성기를 이끌었던 이들은, 여성이 더 좋은 ‘국민’임을 입증함으로써 참정권을 획득하고자 하는 욕심에 이끌려 전쟁협력의 길로 나서고 만다.

하니 모토코, ‘사상하며, 생활하며, 기도하며’ 운동 주도

근대 일본에는 앞서 소개한 일군의 ‘자각하는 여성 혹은 ‘신여성’과는 별개로, 그들과 다른 방식으로 존재하며 전혀 다른 영역에서 리더십을 발휘하는 또 다른 여성운동가들이 존재했다. 즉 신여성들처럼 사회에 진출하여 두드러진 개성을 발휘하기보다는 도시 중산층의 가정을 묵묵히 지키고 있는 다수의 주부들을 위해, 그들을 위로하고 일상의 가정생활을 지탱할 수 있도록 실제적으로 도와주는 운동가들이 있었다. 그 대표적인 존재는 기독교적 배경을 가지고 성장하여, 평생을 가정생활 합리화와 교육사업에 매진했던 하니 모토코(羽仁もと子)였다. 이후 ‘하니’라는 독특한 성은 그의 데릴사위인 마르크스주의 역사학자 하니 고로(羽仁五郞)와, 바로 그의 아들인 유명 영화감독 하니 스스무(進) 등에 의해 더 널리 알려지게 되지만, 가장 먼저 ‘하니’라는 성을 널리 알린 것은 바로 하니 모토코였다.?하니 모토코 역시 이른바 여학교 교육을 받으면서 성장했고, 여성잡지를 주된 무대로 활동했다는 점에서는 앞서의 여성들과 비슷했다.

하지만 그는 아오모리(靑森)의 시골 출신으로 어렵사리 도쿄 유학을 결행한 이래, 낯선 서구적 도시 문화에 매료되어 학업은 물론이고 신여성들에게는 중요한 문제였던 ‘정치’에 대해서도 관심을 잃었다. 라이초나 후사에가 개정을 위해 노력하며 저항했던 여성의 정치집회 참여 금지 법률은 그에게 전혀 문제가 되지 않았다. 오히려 모토코는 여성들의 정치활동을 따분하고 매력없는 것으로 느꼈다. 연애와 결혼, 반년만의 이혼과 가정부 생활, 그리고 신문기자 생활을 거치면서 그가 착목한 것은 여성들의 미래를 위한 ‘정치’가 아니라, 현재 여성들을 고달프게 하고 있는 가정의 ‘생활’ 문제였다. 그는 이후로 ‘생활’ 문제를 평생의 과제로 삼았고, 이른바 ‘가정생활합리화’는 이후 그의 평생의 업이 되었다.

7년 연하남편과?재혼 ‘가정지우’ 창간···요즘도?주종자들 ‘하니종파’ 형성?

7년 연하의 남편 하니 요시카즈(羽仁吉一)와의 재혼 후 가장 먼저 착수한 일은 ‘가정’의 문제를 다루기 위한 잡지 <가정지우>(家庭之友)의 창간(1903)이었으며, 첫딸의 출산과 잡지 창간호의 발행은 하루 차이를 두고 이루어졌다. 이를 가정생활을 위한 정보 뿐 아니라 여성들의 교양 증진과 심지어는 시사평론까지를 담은 잡지 <부인지우>(婦人之友)로 재창간한 것은 1908년의 일이었으며, 1921년에는 ‘생활’과 ‘교육’을 접목시킨 대안학교 ‘자유학원’을 설립하였다. 그리고 <부인지우>의 독자모임 ‘도모노카이’(友の?)는 전국적인 네트워크를 형성하여 1931년 전국대회를 개최할 정도로 성장했다. 하니 모토코가 여성에 대한 편견과 활동의 제약이 컸던 시대에 이 정도의 조직력을 확보하여 리더십을 발휘할 수 있었던 것은 주목할 만한 사실이지만, 더욱 놀라운 일은 주로 ‘생활’과 관련이 깊은 모토코의 세 가지 대표적인 성과물이 21세기인 지금까지도 건재하다는 점이다. 그를 따르는 제자와 추종자들을 ‘하니종’(羽仁宗)이라고 비아냥거리는 사람이 있을 정도로, 하니 모토코에 대한 지지와 충성은 특별할 정도다. 도대체 무엇이 그를 이토록 특별한 존재로 만들었던 것일까?

여러모로 보아 그는 앞서 소개한 신여성들과는 상당히 다른 독특한 캐릭터를 가진 인물이었던 듯하다. 천성적으로 그는 어린 시절부터 소소한 일상생활과 주변의 일에 호기심이 많았고, 궁금한 일에 대해서는 답을 찾기까지 견디지 못하는 성격이었다. 그가 뚝심있게 추진했던 가계부의 창안과 보급, 학생 자치에 의한 급식제도, 남녀공학의 설립 등 당시로서는 낯선 시도들은, 대부분 그 자신의 어린시절부터의 경험과 문제의식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특히 그는 가부장적이고 억압적인 환경 속에 신음하는 여성들을 위해 다양한 메시지를 발신했다. 가정(家政)과 가사(家事)의 합리화를 위한 다양한 정보와 제언을 통한 실제적인 조언 뿐 아니라, 그들의 마음을 위로하고 교양을 높이며 정신을 강하게 하는 역할도 마다하지 않았다. 이러한 역할을 감당할 수 있었던 것은 단순히 그가 크리스찬이어서만은 아니었다. 오히려 그의 강점은 깊은 ‘종교심’보다 깊은 ‘현실’에 대한 관심과 이해였던 것 같다. 바로 이러한 점이 다른 여성운동가들과 구분되는 그의 두드러진 특징이었다. 그는 매일 아침을 ‘한손에 신문을, 또 한손에 성경을’ 들고 맞이했다. 그는 기독교인이었지만 현실에서 유리되지 않았으며, 그렇다고 해서 시시각각 변하는 사회?정치?경제 문제에 함몰되어 신앙인의 길을 망각하지 않았다. 일상생활과 현실정세에 대한 남다른 관심과 이해가 있기에, 많은 여성들을 위한 조언자가 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는 항상 “사상하며, 생활하며, 기도하며” 살아갈 것을 권했는데, 이는 누구보다 그 자신이 지향하는 것이기도 했다. 앞서 ‘자각하는 여성’ 혹은 ‘신여성’들이 좋은 국민으로 인정받고자 하는 덫에 걸려 일본의 침략전쟁에 대해 방조 혹은 협력하는 길로 나아갔다면, 모토코와 같은 경우는 당시 일본 사회의 중추라 할 수 있는 중산층 주부들의 생활 안정을 지원했던 그 활동의 연장선상에서 전쟁협력의 길로 자연스럽게 이어졌던 것 같다.

생활의 간이화, 혹은 합리화로 표현되는, 여성들의 불필요한 소비와 노동을 최소화하는 생활합리화운동의 지향은 공교롭게도 전시기 일본 정부가 가장 지향하는 생활의 모습과 일치하는 것이었다. 현실에 발을 딛고 가정과 사회, 심지어는 국내외 정세변화에 대해서까지 일관성있고 합리적인 방식으로 해석하여 이해시키고자 했던 평소의 노력은, 일본의 침략전쟁이 본격화되면서 방향을 잃었다. 그에게는 옳지 않은 상황을 문제시하고 저항할 수 있는 근거로서 기독교 신앙이 남아 있었지만, 메이지시대 교육의 영향으로 애국심이 신앙을 압도했던 것인지 혹은 그의 신앙이 이미 일본적 기독교로 변질되었던 때문인지, 더 이상 그의 양심을 일깨우지도 시세를 거스를 용기를 주지도 못했다.

여성운동가와 그 남편들···모토코 ‘외조형’, 라이초?’한량형’?

?히라쓰카 라이초와 하니 모토코를 비롯한 근대 일본의 여성운동가들을 ‘생활’이라는 키워드를 가지고 살펴보는 것도 흥미롭다. 모토코가 그야말로 하루하루의 일상생활에 관심을 가지고 이에 천착하여 생활합리화운동을 펼친데 반해, 라이초는 자신의 생활조차도 제대로 돌보지 않았던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그는 때로 반찬값을 걱정할 정도로 곤궁한 날을 보내다가도, 원고료가 들어오기라도 하면 온 가족이 비싼 멜론을 사다 먹을 정도로 즉흥적이고 무계획적인 생활을 했던 것으로 유명했다. 심지어는 각자의 남편들조차 매우 대조적이다.

모토코의 남편 요시카즈는 평생 부인의 활동을 위해 그림자처럼 헌신했던 데 비해, 라이초의 남편 오쿠무라 히로시(奧村博史)는 남편으로서의 역할은커녕 예술 활동을 핑계로 한량과 같은 나날을 보냈다. 모토코는 더 나은 가정을 만드는 방법을 찾고자 매달렸지만, 라이초는 제도에 의존하는 결혼과 가정 대신 공동체적 관계로서의 동거를 고집했다. 또 한명, 앞서도 잠시 등장했던 이치카와 후사에는 평생을 독신으로 살면서 전전에는 여성의 참정권 획득을 위한 여권운동, 전후에는 정치인으로서 여성의 권리신장과 여성의 국제적 연대를 위해 공적인 삶에 헌신하여, 사실상 사적인 ‘생활’의 영역을 포기했다. ‘여성’으로서의 공적인 삶에 헌신했던 또 한명의 대표적 인물로서 쓰다 우메코(津田梅子)도 빼놓을 수 없다. 1871년 서양에 대한 견문 확대와 조약개정을 목표로 파견되었던 이와쿠라(岩倉)사절단에 동행하여 유학생으로 미국에 남겨졌던 것은 그의 나이 겨우 8세 때의 일이었다. 훗날 귀국하여 ‘경제적으로 독립하고 전문적 지식을 가진 온전한 여성(allround woman)’을 육성하기 위해 세운 여학교가 지금의 사립 명문여대인 쓰다주쿠(津田塾)대학이 되었다.

근대 일본에는 이상과 같이 다양한 방식으로 다른 여성들에게 용기뿐 아니라 실제적인 도움을 주곤 했던 여성운동가들이 있었다. 어떤 이들은 ‘모성보호’를, 어떤 이들은 실제적인 생활의 개혁을, 어떤 이들은 여성의 참정권 획득과 국제적 연대를, 어떤 이들은 여성의 독립과 전문화를 위해 주도적으로 활동했는데, 바로 라이초?모토코?후사에?우메코의 4인은 이들 각각의 영역을 대표하는 인물들이었다. 때로는 서로 협력하고 때로는 서로 논쟁했지만, 근대 일본이라는 격변하는 사회, 여성들에게 결코 호의적이지 않은 시대를 살면서 사회적 약자인 여성들을 더 나은 삶으로 인도하기 위해 노력했다는 점에는 차이가 없다.

흥미로운 것은, 거의 100년 전에 전개되었던 이들의 문제의식과 활동의 내용이 21세기인 지금에도 여전히 시대에 뒤떨어진 것, 혹은 이미 영향력을 상실한 것처럼 보이지 않는다는 점이다. 이들의 식견과 활동이 뛰어났기 때문일까, 아니면 지금의 우리 상황이 여전히 한 세기 전과 다를 바 없이 구태의연하기 때문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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