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사의 재발견] 유목왕조의 성립과 쇠망···흉노, 몽골

7월 여름이 시작되는 몽골 초원에는 상쾌한 공기 속에 끝없이 올록볼록 엠보싱이 간 벌판을 따라 펼쳐진 녹색의 물결과 들꽃, 그 사이를 한가롭게 풀을 뜯는 양과 염소들, 그리고 힘차게 뛰어다니는 귀엽고 앙증맞은 조랑말의 모습이 그림처럼 펼쳐진다. 이 무렵을 몽골 사람들은 ‘젖이 흘러넘치는 축복의 계절’이라고 부르며, ‘아이락’이라고 불리는 계절 음식인 마유주를 마시고 ‘나담’이라는 축제를 즐긴다. 이 시기 초원을 따라 펼쳐진 풍요로운 전원적 풍경과 함께 나담에 참가한 강인한 몽골 사람들의 모습이 교차될 때 필자의 머릿속에는 이렇게 짧은 여름을 즐기기 위해 얼마나 혹독한 겨울의 추위를 견뎌냈을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왜냐하면 녹록하지 않은 삶을 영위해야만 하는 몽골 사람들이 어떻게 자연의 역경을 이겨내면서 강인한 생존력을 갖게 되었는가 하는 것이 궁금하기 때문이다.

나담축제는 ‘몽골의 강인한 생존력’ 경연장

실제 몽골 초원에 사는 사람들의 삶은 혹독한 자연 환경 속에서 반복되는 겨울을 나기 위한 준비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들을 둘러싼 자연환경은 대륙성 기후로 인해 영하 40도까지 떨어지고 눈보라가 심하게 몰아치며 어둠이 지속되는 혹독한 겨울만이 아니라 고비라 불리는 사막과 산지를 끼고 있는 초원으로 이루어져 척박하기 때문에 사람의 생존에 적합하지 않다. 따라서 몽골 초원은 소위 역사가 만들어지는 무대인 습윤한 온대지역의 환경과 달라 농경을 기반으로 도시를 만들고 인구를 집중시켜 소위 ‘문명’을 형성했던 것과는 많이 동떨어진 곳이다. 이런 어려운 환경은 그들의 삶을 녹녹하지 못하게 만들었고, 지금도 그런 현실은 바뀌지 않고 있다. 그럼에도 몽골 초원에는 기원전 3세기 흉노(匈奴)로부터 돌궐(突厥), 그리고 몽골(蒙古)에 이르기까지 거대한 유목제국이 건설된 것에서 그치지 않고, 나아가 그 주변에 있는 거대한 정주 농경사회를 기반으로 만들어졌던 중국(中國)과 지속적인 대립과 통합하는 역사를 만들어내기도 했다.

유럽<-페르시아<-몽골->중국->한국

또한 그들로부터 시작된 역사의 물결은 중국만이 아니라 인도와 페르시아, 그리고 러시아 초원을 넘어 유럽에 이르기까지 엄청난 파장을 일으켰다. 즉, 몽골 초원으로부터 시작된 폭발적인 힘은 전근대시기 세계사를 이끌어가는 수레바퀴의 한 축을 담당했다고 평가할 만큼 강력했다. 따라서 그들이 혹독한 환경을 극복하고 만들어냈던 바람과 같은 역사를 이해하는 것은 무한경쟁 속에 노출된 우리에게 노하우를 줄 수도 있을 것이라는 생각을 갖게 한다.

몽골 초원의 주민들이 국가를 세우고 강한 힘을 갖게 된 배경에는 초원이라는 환경에 완벽하게 적응한 그들 나름의 독특한 생활 방식이 있었다. 그것은 인류가 빙하기가 끝나고 동물을 길들여 그로부터 필요한 자원을 획득하는 목축을 시작하게 된 이후 점차 삶의 영역이 확대되면서 극한의 환경을 극복하는 과정에서 고안해낸 유목(遊牧: nomadism)이라는 특화된 가축 사육 방법과 무관하지 않았다. 유목은 유라시아 대륙에 널리 퍼져 있는 발굽 동물(유제류, 有蹄類)을 길들인 다음 개별 동물들의 생체 리듬에 맞추어 계절의 변화에 따라 초지 파괴를 막기 위해 이동함으로써 재생산 구조를 유지하는 목축 방식이다. 이것은 특히, 양과 같이 초지를 파괴하는 동물들을 이동시켜 한정된 초지 자원을 유지함으로써 재생산 구조의 안정적인 확보만이 아니라 의식주에 필요한 다양한 자원을 얻어내는 기술적 혁신의 결과물이었다.

기마민족 스피드, 가축사육 노하우로?’극한환경’ 극복

그리고 이를 위해 초원의 주민들이 아주 간략하게 정리된 생활 도구만 갖고 이동하는 모습은 단순하게 보일지도 모르지만 실제로는 집약적 생산에 투여되는 벼농사만큼의 기술을 필요로 했으며 그 과정에 불굴의 인내와 의지 투여된 것이었다.

이 과정에서 유목민들에게 순육된 다양한 가축들 중에서도 생활에 가장 기초가 되는 소와 양, 그리고 염소 등과 함께 말의 이용이 가장 주목된다. 가축을 돌보는데 필요한 말을 길들이고 원활하게 시용하게 됨에 따라 그들은 ‘속도(speed)’라고 하는 인류발전의 중요한 동력원을 얻게 되었다. 소위 ‘문명(civilization)’의 발생과 발전은 다양한 요소를 기초로 설명되기도 하지만 그 중에서 중요하게 다루어져야 하는 것의 하나가 바로 속도의 제한을 극복하려는 노력이었다. 인류가 속도를 낼 수 있게 된 것은 먼저 바퀴라고 불리는 효과적인 수단을 발명하게 되면서부터였고 그것에 날개를 달아준 것은 바로 말의 순육과 이용이었다.

즉, 말과 수레의 결합을 통해 본격적인 이동의 수단으로 바퀴가 최적화될 수 있을 만큼의 속도를 얻게 되었고, 이것은 문명의 확산과 주변에 대한 지배라는 놀라운 발전을 가능하게 했다. 이를 기반으로 농경 정주사회에서도 문명의 발생과 함께 등장한 국가가 발전할 수 있었으며 결국 산업혁명이라고 불리는 2차 기관의 발명 이후에는 지금까지도 속도의 추구가 더욱더 가속화되고 있다는 점은 주지의 사실이다.

안장, 재갈, 등자?등 馬具 발명···수레문화가 기마문화로 대변신

정주 농경사회가 마차의 사용을 통해 효과적인 발전을 이루어내는 동안 초원에서도 말이 중요한 수단으로 자리를 잡게 되었다. 건조한 환경을 좋아하는 말의 습성에 적합한 초원은 그의 구득만이 아니라 순육에도 적합했다. 초원의 주민들은 말을 효과적으로 길들여 이용했을 뿐만 아니라 그것을 쉽게 타는 노하우 즉, ‘기승(騎乘)’이라고 하는 방식으로 말을 이용하게 되었다. 초기 바퀴를 발명해 이용한 정주민들에게 말은 수레에 연결해 쓰는 대상에 불과했고, 직접 올라타는 기마의 대상이 아니었다. 그와 달리 초원에서는 가축을 돌보는 생활 방식에 맞추어 그에 적합하게 말을 길들여 자유자재로 활용했다. 미국에 로데오라고 불리는 경기종목이 있을 정도로 기마는 숙련을 위해 많은 시간과 노력이 필요한데, 초원에서는 이를 위해 특별한 기술과 도구의 발명이라는 혁신 즉, 말에 올라타 조정에 필요한 재갈이나 등자, 그리고 안장 등과 같은 마구를 만들어냈다. 이런 마구의 제작은 이후에 말에 익숙하지 않은 정주민들이 기마를 하는 데에도 큰 도움을 준 중요한 발명품이기도 했다.

초원에서 유목에 용이하게 말을 길들여 타게 된 것은 단순한 생활의 혁신만이 아니라 전술적으로도 기동력을 기반으로 한 기마대의 전격 전술 도입을 가능하게 했다. 그리고 기마에 적합한 작은 활인 합성궁(彎弓)과 단검(短劍), 그리고 장창(長槍)을 효과적으로 구사한 초원의 유목민들은 전차와 보병 부대를 상대로 절대적인 우위를 점할 수 있었다. 그리고 이것은 이후 정주지역에서 기병이 발달한다고 해도 쉽게 극복될 수 있을 만한 것이 아니었고, 대포와 같은 강력한 무기가 만들어지기까지 지속적으로 유지되었다. 따라서 이런 속도를 기반으로 한 초원 주민들의 효과적인 변신은 건조하고 열악한 초원이라는 환경에서 가질 수밖에 없는 생산의 한계를 극복하고 나아가 그들이 오랜 동안 세계사를 이끌어갈 수 있는 힘의 원천이 되었다. 물론 이런 그들의 특화된 강력한 군사력은 초원이라는 열악한 생활 기반을 극복하고 국가를 세울 수 있는 하나의 중요한 기초가 될 수 있었다. 상대적으로 정주사회에 비해 소수에 불과한 유목민들의 국가건설이 군사적인 힘만으로 가능했다고 보기 어렵다. 왜냐하면 국가라는 것이 그냥 만들어지는 것도 아니고 더욱이 그것이 유지되면서 지속되기 위해서는 그 나름의 다른 요소의 도움이 필수적이기 때문이다. 특히, 하나의 체제를 만들어내고 그것을 유지할 수 있는 힘이 없다면 그 국가는 모래성과 같은 것에 불과했을 것이다.

몽골초원 흉노 400년 존속비결 역사적 규명 필요??

실제 몽골 초원에 존재했던 유목국가들은 최초의 유목제국이었던 흉노의 경우에 약 400년 정도 유지되기도 했는데, 이렇게 하나의 국가가 건설된 다음 중간에 일시 부침이 있어도 오랜 기간 존재할 수 있다는 점은 단순하게만 이해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따라서 이것이 가능할 수 있었던 초원 나름의 원천이 어디에 있었는가 하는 점에 대한 고려가 필요한데, 이제까지 이것을 제대로 평가하지 못한 것도 현실이다. 또한 나름의 틀을 유지하면서 오래 동안 계승, 유지되었던 국가체제 역시 중국과 비교되면서 취약한 것으로 이해되었다. 왜냐하면 중국처럼 집약적인 생산체계를 비롯한 다양한 산업적 기반과 황제를 중심으로 유가 사상과 같은 이념적 토대, 그리고 문서 행정에 기초한 관료제와 법률 체계, 아울러 역사기술을 통한 정통성의 계승과 같은 고도로 체계화된 질서를 갖추지 못했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게다가 유목민 자신들이 남긴 기록이 아주 적기 때문에 그와 갈등에 있었던 정주세계의 기록에 의존해야만 하는 한계 역시 그에 대한 체계적 이해를 어렵게 했다. 이것은 그로부터 피해를 입은 정주사회의 편견과 무관하지 않았다는 점에서 이런 한계들을 극복하면서 유목국가 나름의 특성에 대한 이해가 더욱 절실함을 보여준다.

이를 위해서는 먼저 국가체제의 핵심인 유목군주의 성격에 대한 이해가 필수적이다. 왜냐하면 유목군주는 국가체제 유지의 중심으로 조명 유지에 가장 중요한 존재라고 할 정도로 그 자체가 국가의 성격을 규정할 만큼 비중이 컸기 때문이다. 실제 흉노시대의 선우(單于) 또는 유연(柔然)과 돌궐 등에서 카간(可汗, khaghan) 또는 몽골에서 하안(ha‘an)이라 불렸던 유목군주는 중국과 같은 정주 국가에 비해 덜 체계화된 국가를 자신의 ‘개인적 능력’으로 유지하는 최고의 통치자였다.

유목군주, ‘기동력’과 ‘벼랑끝 전술’로 중국 수시로 침략·압박

그는 먼저 ‘족장’에게 필요한 개인적인 능력인 ‘현명함(bilge)’과 ‘용감함(alp)’에 기초해 복속된 유목세력들과 내부의 정주적 요소들의 원심적 경향을 제한 하는 강력한 존재였다. 그리고 권력을 강화하고 내적인 위협을 제거하기 위해 군주는 자신에게 절대적으로 충성하는 친위 집단과 함께 연합세력을 확보하려고 노력했고, 이것은 뒷받침하는 물적인 토대를 확보하려고 했다.

이를 위해 유목 군주는 예하의 다양한 유목 족속들을 결합시켜낼 수 있었으며 자신의 권위를 뒷받침해내는데 필요한 재화를 손쉽게 얻어내기 위해 자신의 장점인 기마전술을 기반으로 주변 정주농경지역에 대한 약탈을 감행했다. 유목 군주의 정주지역에 대한 도발은 내적인 부락민들의 물적인 욕구를 채워주는 것 즉, 군사적인 위협을 통한 재화의 획득을 목적으로 한 것이었지 그의 영역을 지배하려는 성격이 강하지 않았다. 특히, 소위 땅은 넓고 물자가 넘쳐나는 땅(地大物博)인 중국으로부터 재화를 얻어내는데, 자신의 장기인 군사력의 활용은 유목 군주에게 자신의 권위를 확대하는 가장 기본적인 수단이었다. 왜냐하면 유목이라는 생산양식은 자급조차도 어려운 생산력을 제공해주었을 뿐 그것만으로는 국가를 건설하고 유지할 수 있는 토대를 마련하는 데에는 한계를 갖고 있었고, 새로운 이익 즉, 유통의 장악을 통해 부가가치를 극대화하는 것이 보다 효과적이었기 때문이다.

더욱이 군사적 도발은 중국의 약점을 철저히 파고들어 협상을 벌이기 위한 전술의 일환이었다. 실제 유목민들은 중국이 유목민들을 군사적으로 제압하고 안정 상태를 유지하기 위해 엄청난 비용을 쓸 수밖에 없고, 그 다음에는 이를 견디지 못하고 끝내 협상을 통해 변경의 안정을 유지하려고 들 수밖에 없을 것이라는 점을 잘 알고 있었다. 왜냐하면 유목민들은 자신의 군사적 강점을 최대한 이용한 벼랑 끝 전술로 중국을 협상으로 끌어내 이익을 최대한 관철시킨 것이 바로 상대적으로 인구가 중국 하나의 현 숫자에 불과하다고 할 정도로 소수인 유목민이 거대 중국을 다루는 영리한 방법이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자신의 부족함을 해결하기 위해 자신만의 특장점을 극대화한 유목 군주는 재화를 원활하게 획득하고 그것을 유통시킴으로써 이익을 극대화시킬 수 있었다. 그런데 유목군주는 그것을 보완하기 위해 자신을 도와줄 수 있는 오아시스 출신의 상인들과 적극적으로 유착할 수밖에 없었다.

아라비아 상인과 깊은 협력···경제 외교술 행정기술 배우며?문화교류

또한 경제적, 외교적, 행정적 능력만이 아니라 고도의 문화 수준을 갖고 있었던 오아시스 출신의 상인들 역시 유목 군주의 목적에 부합하고자 했다. 왜냐하면 이를 통해 그들은 이제까지 쉽지 않았던 중국과의 교섭에서 우위를 점해 그로부터 효과적으로 원하는 만큼의 물자 즉, 가장 대표적인 ‘비단’과 같은 부가가치가 높은 재화를 얻어낼 수 있었기 때문이다. 나아가 상인들은 제국의 등장과 함께 위험이 사라진 초원이라는 새로운 교통로를 통해 유목민의 적극적인 보호를 받아 획득한 중국의 재화를 서방으로 유통시킴으로써 막대한 이익을 챙길 수 있었다. 이렇게 상인들은 유목 권력에 영합함으로써 자신의 이익을 극대화시킬 수 있었는데, 이것은 바로 유목제국의 영역만큼 통합된 영역을 무대로 동서의 교역을 활성화시키는 가장 중요한 기폭제가 될 수 있었다.

유목 군주에게도 물자의 유통을 통해 창출된 엄청난 부가 가치는 자신의 권위를 뒷받침하는 중요한 경제적 기초가 될 수 있었다. 왜냐하면 유목 군주의 권위는 자신의 재화를 지배를 받는 여러 족속들에게 그 이익을 분배하는 과정에서 창출되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특히, 약탈을 통해 형성된 재화와 달리 유통을 통해 창출된 새로운 가치만이 아니라 경영 기술로 무장한 상인들의 행정적인 협조 역시 유목 군주의 권위를 강화시키는 결정적인 배경이 되었다. 따라서 서로에게 도움이 될 뿐만 아니라 체계를 유지하는데 가장 중요한 유목 군주와 상인의 경합 즉, 소위 오아시스와 초원의 ‘공생(共生)’을 통해 유목국가가 건설되었고 나아가 그의 항상성이 유지될 수 있었다. 이렇게 유목 권력의 형성은 단순한 초원만이 아니라 오아시스의 장점을 결합시킨 결과물이었다.

샤먼의 주술과 ‘천자의례’로 왕권강화 꾀해

이런 물리력을 기초로 성립된 권력은 군주 개인에게 과도한 집중이 이루어져 그의 개인적 능력에 따라 국가의 항상성이 결정되는 한계와 함께 덜 제도화된 계승 방식으로 권력의 승계 내지는 영속성을 상대적으로 약화시킬 수 있는 여지도 있었다. 따라서 이런 문제를 극복하면서 권력 자체의 항상성을 강화하고 나아가 국가의 조명(祚命)도 유지하기 위해 군주는 이념적으로 자신의 정당성을 설명하는 노력 역시 게을리 하지 않았다. 이념적으로 자신의 권력을 정당화하기 위해서 하늘(신)로부터 위임받은 대리인으로서 샤먼(巫覡, shaman)의 주술 능력을 갖춘 존재 즉, 군주는 자신을 하늘로부터 신령을 받고 하늘과 교감할 수 있으며 주술적 변신을 통해 ‘하늘의 아들(天子)’로 재생한 ‘유목적 천자(遊牧 天子)’로서 자리매김을 하기 위해 의례를 벌이고 나아가 그것을 지배 이념의 기초로 삼으려고 하기도 했다.

이와 관련해 권력을 정당화해낼 수 있는 이념적인 전제 역시 필요할 수밖에 없었는데, 이것은 중국에서 보이는 것처럼 역사 기술을 통한 정통성의 확보 내지는 체제 통합 논리의 구축이었다. 물론 흉노의 경우에 문자가 없어 그런 노력이 가능했는가 하는 점을 알기 어렵지만 상대적으로 무문자 사회에서 발달한 구두(口頭) 문화에 기반을 한 전승 등을 통해 가능할 수 있었을 것이다. 이런 추정이 가능한 것은 그 이후 그와 관련된 다양한 전승이 이어지고 있는 것이 확인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런 노력의 실체는 6세기 이후 돌궐 이래로 자신의 문자를 만들어 역사를 기록하려는 모습에서 확인된다. 현재 몽골 초원에 남아 있는 돌궐시대에 자신들이 만든 고대 투르크 룬 문자로 된 비문에는 유목민의 입장에서 자신의 역사를 서술하면서 강한 역사 계승 의식과 정통성의 확인 과정을 보여주었는데, 이것이 바로 유목 군주가 자신의 권위를 확인하는 방식이었다. 또한 중국 등지에서 기록한 신화 기록에도 군주들의 강렬한 노력이 확인되는데, 이것은 과거의 전통과 자신을 연결시켜 국가의 정통성을 설명하고 나아가 백성들에게 그를 선전해 받아들이게 함으로써 자신의 정당성을 인정받으려는 것과 관련되었다.

이상과 같이 북아시아의 군주들은 초원이라고 하는 열악한 환경 속에서 자신의 장점인 ‘속도’를 극대화시키면서 자신의 한계를 극복해줄 수 있는 오아시스의 고도로 발달된 문화를 결합해 유라시아 대륙 내부에 거대한 제국을 건설했다. 이런 유목제국의 건설은 단순한 군사적인 능력에 기인한 것이 아니라 그 이후 체제의 유지와 존속을 위해 내적인 물리력의 확대를 통해 지속적으로 이루어졌다. 나아가 유목군주들은 자신의 확립한 권위를 더욱 강화하기 위해 이념적으로 정당화하려는 노력 역시 게을리 하지 않았다.

기마 대체할 기술혁신 못 찾아 결국 와해

이를 통해 초원의 유목제국은 유지되었을 뿐만 아니라 그를 이은 또 다른 유목국가의 탄생을 가능하게 했다. 그리고 이런 북아시아 초원의 역사 전개는 그 자체의 하나의 완결적인 구조를 갖는 것에서 그치지 않고 그와 맞닥뜨리고 있는 주변의 거대한 정주 문명사회에도 큰 영향을 미치면서 세계사를 이끌어가는 중요한 두 수레바퀴의 하나로서 역할을 할 수 있었다.

하지만 이들이 갖고 있었던 나름의 장점이 더 이상 효과적이지 못하고 오히려 그에게 당하던 이웃들이 그의 노하우를 배운 것에서 그치지 않고 그들을 압도하는 기술적 혁신을 통해 말이라고 하는 수단이 더 이상 효용성이 갖지 못하게 되면서 유목 권력은 와해될 수밖에 없었고 초원 역시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져 버릴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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