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사의 재발견] 인재선발과 ‘모수자천’

1997년에 나온 산울림 13집에 ‘기타로 오토바이를 타자’란 노래가 실렸다. “수박으로 달팽이를 타자. 메추리로 전깃불을 타자”라는 생뚱맞은 가사지만, 상상력이 한껏 발휘된 명곡 평가를 받는 노래다. 김창완은 상상력으로 논리를 파괴하고 싶었다고 소회한다. 인문학은 상상력의 엔진이다. 역사는 인문학의 기초다. “현재를 알려면 마땅히 옛 일을 거울 삼을 것이니, 옛 것이 없으면 오늘이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觀今宜鑑古 無古不成今)”라는 말이 있다. 중국 명(明)대 작가 미상의 처세서 에 나온다. “옛날과 지금이 길은 다르지만 이르는 곳은 같다(一古一今, 殊途同歸)”란 말도 있다. 역사에 세상사의 솔루션이 다 들어있다는 말이다. 경제 역시 고금(古今)이 상통한다.

‘화식열전(貨殖列傳)’에 실린 사마천의 경제관은 좋은 예다. “사람들의 눈과 귀는 아름다운 색과 소리를 즐기고, 입은 맛있는 고기를 먹고 싶어하며, 육체는 편하고 안락한 생활을 원하고, 마음은 권세와 영화를 자랑한다…. 최선의 방법은 그들의 심성을 그대로 존중하는 것이고, 차선책은 이익으로 그들을 인도하는 것이며, 그 다음이 백성을 가르쳐 깨우치는 것이다.

강제로 백성을 규제하는 것은 이보다 못하다. 백성과 다투는 것은 최하책이다.(故善者因之, 其次利道之, 其次敎誨之, 其次整齊之, 最下者與之爭)” 요즘으로 치면 사마천은 케인지언이 아닌 하이에크 편이었다. 일종의 신자유주의자였던 셈이다. 요즘 중국은 ‘역사로 노는’ 글쟁이들의 전성시대다. 유력 신문들이 이들을 모시기 바쁘다. 자유주의 논조로 유명한 광둥 의 편집자가 최근 란 책을 냈다. 기업섹션에 연재됐던 인기 칼럼을 모은 책이다. 책은 기업경영과 조정의 정치가 수도동귀(殊途同歸)라고 주장한다. 폭발적인 인기에 힘입어 최근 2권까지 나왔다. 그 중 모수(毛遂)의 이야기를 소개한다.

모수가 ‘인재가 기회를 잡다’의 전형이라고?

“배 젓는 노와 돛은 제아무리 클지라도 사공의 손 따라 움직이고, 저울추는 비록 작지만 천근의 무게를 달 수 있다. 날카로운 송곳은 주머니 속에 있어도 드러내지 않으니, 문(文)이니 무(武)니 떠들어대는 19명 따위가 뽑혔다(櫓檣空大隨人轉, 稱錘雖小壓千斤. 利錐不與囊中處, 文武紛紛十九人).” 이 작자 미상의 7언 절구 시는 전국시대 말엽 ‘이삭을 뚫고 나오다(脫穎而出·탈영이출)’라는 고사를 노래한다. 담력과 말재주로 초(楚)나라 왕으로 하여금 구원병을 파견해 조나라의 평원군을 구하도록 만든 문객 모수의 이야기다. 2000여년 동안 대대로 모수는 칭송의 대상이었다. 만일 신릉군이 석 달 늦게 왔더라도 초나라 군대 역시 그에 맞춰 늦었을 것이다.

이 원리를 이해하면, 모수의 역할이 사실 별 것 아니었음을 알 수 있다. 그가 튀어나오지 않았더라면 평원군은 홀로 초왕과 끈질기게 담판을 하고, 초나라 원군 역시 결국은 출발했을 것이다. 단 시간이 더 걸렸을 것이다. 하지만 모수가 튀어나왔다. 이 지원군은 여전히 시간에 맞춰 도착하지 않았다. 초나라는 진나라와 일전 을 불사할 생각이 없었기 때문이다. 외교무대를 빌어 자신을 빛낼 기회를 만드는 것은 본디 잘못은 아니다. 단지 많은 사람들 앞에서 조그만 성공에 본분을 잊고, 동료들을 조롱함은 자신의 옹졸함을 드러낼 뿐이다.

초나라 군대가 “결국 출발하고, 결국 지각할 것”이라는 얄팍한 이해타산을 알아채지 못했다. 그 19인의 동료 가운데 이를 알아챈 사람이 한 명도 없지는 않았을 것이다. 더구나, 19인의 동료가 입술을 붉게 바른 것이 “남의 힘을 빌어 일을 처리한 것(因人成事)”이라면 모수 자신은 “남의 힘을 빌어 일을 이룬 것”이 아니었단 말인가. 그들이 초나라에 간 것은 일반적인 의미의 외교 방문이 아니었다. 수십 만 진나라 군대에게 포위 당한 상태에서 원군을 요청한 행위였다. 리스크가 무척 컸다. 포위망을 뚫어야 했다.

19인의 문무를 겸비한 동료들의 계책과 노력이 없었다면 모수 일행이 어떻게 수 겹의 포위망을 돌파해 삼엄한 경계와 추격병을 떨치고, 안전하게 허베이(河北)의 한단(邯鄲)에서 초나라 수도인 안후이(安徽) 수춘(壽春)까지 갈 수 있었겠는가? 당시 조나라는 방금 전쟁에서 패한 상태였다. 평원군이 부탁한다고 조나라를 구하고 진나라를 적으로 삼는 것은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니었다. (초나라는 얼마 전 진나라의 공격을 받아 도성에 있던 선조들의 능묘마저 모두 잃은 상태였다.) 평원군이 짧은 시간 안에 초나라 왕과 마주해 담판할 수 있었던 것은 19인의 문무 겸비한 문객들의 고난과 노력이 있었기 때문이다.

19인이 없었다면 모수가 맹약의 단상까지 갈 수도 없었음은 누구나 아는 사실이다. “남의 힘을 빌어 일을 처리했다”는 말은 이를 보여준다. 부주의하게 주머니에 던져진 (20명에 뽑힌) 바늘을 드러내 준 것이다. 또 그의 좁은 흉금과 천박하고 비루한 식견까지 남김없이 드러내 보여줬다. ◇진짜 낭중지추는 누구? 야사·소설·연극에서 모두 모수만을 치켜세운 것은 편견이요 과장이다. 하지만 평원군을 일방적으로 깔보는 것은 편파적이지도 않고 과장도 아니다. 실제로 일리가 있는 말이다.

조나라 혜문왕(惠文王) 조하(趙何)는 국왕이다. 평원군은 그의 친동생으로 중요한 집정자였다. 평원군이 조나라의 CEO라고 불러도 절대 과장이 아니다. 그의 유명한 3000 문객은 평원군이 주는 월급과 복지혜택을 받았다. 대가로 그의 명령을 따랐다. 인사권과 관리권은 모두 그의 손아귀에 있었다. ‘전국시대 4대 공자’ 가운데 ‘선비 키우기(養士)’로 유명한 평원군에게 몸을 의탁한 이들은 요즘으로 치면 유명한 기업에 일자리를 찾는 구직자와 비슷했다. 자신에 대해 어느 정도 자신감을 갖고 있었다. 실력 없이 끼어든 사람도 없지 않았다.

한가지 재주가 뛰어난 전문가는 많았지만 다재다능한 수퍼급 인재는 적었다. 있다 해도 손에 꼽을 정도였다. 초나라로 가서 구원군을 요청한 일을 가만히 살펴보면, 평원군은 수하에 있던 인적자원을 파악하는 데 확실히 신통치 못했다. 그는 출발 직전에야 인재를 뽑았다. 보통 사람들은 모수의 불평만 본다. 후세에 이름을 떨칠 인물이지만 자신이 쓰일 주머니가 없었다는 불만이다. 하지만 다소 불만을 품고 꼼꼼히 찾아야만 발견할 수 있는, 그 동안 주머니에 들어갈 기회가 없었던 인재가 어찌 모수 한 사람 뿐이었겠는가 만일 CEO 평원군이 휘하의 인재들을 일찍부터 모두 숙지했다면 어땠을까? 누가 글에 능하고, 누가 무술에 능하고, 누가 글과 싸움에 모두 능한지 알았더라면 어땠을까? 그가 마음 속에 준비된 리스트를 갖고 있었더라면 어땠을까? ‘포위를 뚫고 초나라로 원군을 청하러가는’ 긴급한 임무에 맞닥뜨려서야 벼락치기로 무작정 사람을 뽑지는 않았을 것이다. 평원군은 많은 ‘예비 간부’를 확보했지만 쓸모가 없었다. 기본적인 자원 파악도 하지 못했다.

만일 그렇지 않았다면, 본래 임기응변에 능한 편재(偏才·잔재주꾼)에 불과해 티 나지 않고 평범한 ‘하객(下客)’이던 모수를 어떻게 평원군의 인재 주머니에 넣을 수 있었겠는가? 피를 나눠 마신 단상 아래의 문객 19인은 외교에 필 요한 박력과 순발력이 부족했다. 하지만 일상적인 일처리는 보통 사람보다 뛰어났다. 평원군과 모수는 이들 19인의 능력에 의지해 초나라에 무사히 도착했다. 19인의 재능으로 다시 한단에 돌아올 수 있었다. 이들 문객들은 이후에도 ‘임기응변’만 뛰어난 모수보다 많은 실력 발휘를 했다. 모수는 이를 분명히 인식하지 못했다.

하지만 평원군은 잘 파악하고 있었다. 인재 개개인에게는 모두 자기에게 가장 적합한 쓰임새가 있다. 모두 ‘두각을 나타낼’ 조건과 가능성을 갖고 있다. 단 부하들의 몸에 맞춰 옷을 재단하고, 적당한 주머니를 찾아주고, 적절한 일거리를 찾아 주는 것은 오로지 관리자의 임무다. 에 따르면, 당시 삽혈에 성공해 조나라로 돌아온 평원군은 모수를 후대해 상빈(上賓)으로 존중했다. 이는 정상적인 논공행상이었다. 모수는 이런 대접을 받을 만했다. 상빈은 존경할 수 있다. 이후 중대한 사명이 떨어지면 여러 가지를 고려해서 처리해야 한다. 하지만 평원군은 경솔하게 모수를 부적절한 주머니에 던져 넣었다. 평원군과 함께 유명세를 다퉜던 맹상군(孟嘗君)은 도둑질 잘하고 닭 울음소리를 잘 흉내내는 사람이 큰 공을 세웠음에도 상빈으로 삼지 않았다. 도리어 이들을 이용해 세금을 걷게 시켰다. 외교사절로 보내고, 전쟁을 지휘시키지 않았다.

모수의 처참한 결말

CEO 평원군이 조나라의 중요 관리자를 맡을 수 있었던 것은 그가 능력이 뛰어나 선발됐기 때문이 아니다. 그가 전 국왕의 아들이자 현 국왕의 형제였기 때문이다. 평원군은 인재를 선발하고 관리하는 데 요령도 없고, 경험도 적었다. 본인 자신이 ‘재능만으로 임용된’ 경우가 아니었던 것과 깊은 관계가 있다. 당연히 이런 인재선발방식은 전국시대에는 일상사였다. 오늘날에도 기업에서 흔한 일이다. 태어나서부터 관리자인 사람은 없다. 실패에서 배우기 마련이다. 교훈 속에서 인재를 찾아내고 사람 쓰는 법을 배운다. 불가능하지도 않고, 할 수 없는 일도 아니다.

그러나 역사의 기록을 보면, CEO 평원군은 학습 능력이 떨어졌다. 후에 조나라가 궁지에서 벗어났어도 평원군은 문객을 소홀히 대접했다. 이 때문에 부하들이 집단적으로 그의 손아래 처남인 위나라 공자 신릉군(信陵君)에게 몸을 의탁하는 사건을 초래했다. 그는 부하들의 심리 상태를 이해하지 못했다. 번거로우면 그뿐이었다. 월급명세와 식량명부를 보고 나서야 돈과 쌀을 받는 사람이 얼마나 줄었고, 직원들이 얼마나 잘렸는지 알 수 있었다. 평원군이 돌아온 지 1년 무렵의 일이다. 연(燕)나라가 대장군 율복(栗腹)을 보내 큰 전쟁을 치러 국력이 크게 상한 조나라를 공격하도록 했다. 조나라는 누구를 내세워 대적했을까?

평원군은 최고 대우를 받는 모수가 잘 먹고 잘 마시면서 하는 일 없이 지내는 것을 눈 여겨 보아왔다. 월급을 낭비한다는 생각에 병사들과 함께 전쟁터로 떠밀어 보냈다. 평원군은 외교능력과 군대를 통솔하는 능력이 어떻게 다른지 전혀 생각하지 못했다. 이 점에서는 차라리 모수가 평원군에 비해 개념이 있었다. 이를 안 모수는 초조해져서 평원군에게 자신을 장수로 임명하지 말아 달라고 청했다. “죽음이 두려워서가 아니다. 임무를 감당할 수 없어서다. 선봉에 설 수는 있다. 단, 천군만마를 지휘하는 사령관은 절대 못한다.” 모수가 말했다. 모수의 사양에도 불구하고 평원군은 그를 사령관에 임명했다. 결과는 일패도지였다. (초나라는 얼마 전 진나라의 공격을 받아 도성에 있던 선조들의 능묘마저 모두 잃은 상태였다.)

평원군이 짧은 시간 안에 초나라 왕과 마주해 담판할 수 있었던 것은 19인의 문무 겸비한 문객들의 고난과 노력이 있었기 때문이다. 19인이 없었다면 모수가 맹약의 단상까지 갈 수도 없었음은 누구나 아는 사실이다. “남의 힘을 빌어 일을 처리했다”는 말은 이를 보여준다. 부주의하게 주머니에 던져진 (20명에 뽑힌) 바늘을 드러내 준 것이다. 또 그의 좁은 흉금과 천박하고 비루한 식견까지 남김없이 드러내 보여줬다.

인재선발은?경영의 알파요 오메가

인재를 알아보고 선발해 경영하는 것. 경영자의 제1임무다. 만일 인재의 선발·임용·붙잡기를 잘못한다면 설령 기회가 다시 커지고, 다시 좋아지더라도 피동적일 수밖에 없다. 한 명의 관리자가 설령 인재를 발굴하고 배양하는데 능수능란한 ‘백락(伯樂·춘추시대 최고의 말 감정가)’이 될 수 없을지언정, 적어도 자기 휘하에 있는 직원들의 개성과 장점은 판별하고 이해할 수 있어야 한다.

“때에 맞춰 쓰고, 지위에 맞게 쓰며, 장점에 맞춰 일을 맡기고, 원하는 바에 맞춰 쓰라(用當其時, 用當其位, 用當其長, 用當其願)”는 용인술의 16자 격언이 바로 이 뜻이다. (작자: 타오돤팡(陶短房) 在캐나다 역사학자 겸 칼럼니스트) ‘모수자천(毛遂自薦)’이란 고사로 유명한 전국시대 말 조(趙)나라의 모수는 ‘인재가 기회를 잡다’의 전형적인 사례로 여겨져 왔다. 자기계발서의 단골로 등장한다. 하지만 당시 상황을 전체적으로 고려하면 모수는 도량이 좁은 잔재주꾼이며 임기응변에 능한 인물에 불과했다. 더 중요한 점은 CEO 평원군(平原君)이 사람 보는 눈이 없음을 모수 사건에서 여지없이 드러냈다는 사실이다.

만일 휘하의 모든 인재를 파악하고, 마음속에 굳은 종지를 갖고 있었더라면 어떻게 싸움에 임해서야 칼을 갈듯이 벼락치기로 무작정 사람을 뽑는 지경에 이를 수 있었을까? 모수의 비참한 후반부 이야기는 평원군이 인재 보는 안목 없이 자기 고집만 끝까지 고집했음을 보여준다. 모수가 스스로를 천거하고 나라로 돌아온 뒤 후하게 대접받고 존중 받아 상빈(上賓)이 되고 오래지 않아, 평원군은 모수에게 병사를 지휘해 외적에 맞설 것을 명했다. 그는 일패도지한 뒤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정상에서 밑바닥 추락까지 차마 1년도 걸리지 않았다. <신경진/중앙일보 중국연구소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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