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사의 재발견] 남송(南宋)의 효종, 난국 속 이룬 작은 평화②

南宋, 연이은 권신으로 왕권 흔들···효종시대만 예외

남송의 정치사를 볼 때 가장 주목되는 점은 권신의 연이은 등장이다. 고종 시기에는 진회(秦檜)가 1138년(소흥 8)부터 1155년(소흥 25)까지 18년간 재상으로 있으며 전횡하였다. 녕종 초기에는 한탁주(韓??)가 녕종 추대의 공훈을 바탕으로 권세를 부렸다. 녕종 후반기로부터 이종 초기까지는 사미원(史彌遠)이 무려 26년간이나 절대 권력자로 군림하였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남송 말기에는 가사도(賈似道)가 17년 동안 재상으로 있으며 전횡하였다. 이들 진회?한탁주?사미원?가사도의 행적을 쭉 이으면, 그것이 바로 남송 역사의 큰 줄거리를 이룬다고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닐 정도이다.

이러한 남송 시대를 통해 유일하게 권신이 보이지 않는 시기가 바로 효종의 통치기이다. 효종은 권신을 용인하기는커녕 오히려 대신들의 권한을 분산시키고 모든 권력을 자신에게 집중시켰다.

28년 동안 계속되었던 효종의 시대에 재상으로 임용된 인물은 모두 17명이다. 평균 재임 기간은 2년에 미치지 못한다. 3년 남짓한 기간에는 아예 재상이 없었다. 부재상인 참지정사의 재임 기간은 더욱 짧았다. 효종 시기 참지정사로 임용된 인물은 무려 34명에 달한다.

효종은 측근 인사들을 이용하여 관료를 통제하였다. 여기서 측근 인사란, 효종이 황제가 되기 전 가까이하던 사람들을 가리킨다. 그는 6살의 나이로 궁중에 들어간 이래 무려 30년 간이나 황제의 후보자 생활을 하였다. 그 만큼 효종에게는 측근이라 할만한 사람들이 많았다. 효종은 이러한 사람들을 수족처럼 부렸다.

<송사>의 ‘녕행전(?幸傳)’에는 북송과 남송의 대표적 녕행 12명이 실려 있다. 녕행이란 아첨으로써 제왕의 총애를 얻은 인물을 가리킨다. 그 12명 가운데 효종 시대의 인물이 4명이다. 이들뿐만 아니라 그밖에도 효종 시대에는 녕행이라 일컬을 만한 인물이 적지 않았다.

관료 기강 잡은 효종, 학자들의 존경과 연구대상

효종의 통치기를 통해 관료의 기강은 잘 바로잡혀 있었다. 효종이 뇌물 수수에 대해 엄정한 자세를 취하고, 지방관의 임용에도 신중을 기하였기 때문이다. 효종 시기 이러한 관료 사회의 기강은 남송 말기의 학자들에게 동경의 대상이었다. 남송의 대 유학자 진덕수(眞德秀)는, “효종의 통치기에 조정의 고위 관료들은 뇌물이 자기의 대문에 도달하는 것을 수치로 여겼고, 지방관들은 손에 선물 꾸러미를 들고 수도로 들어가는 것을 부끄러워했다” 고 말하고 있다.

효종은 농민 부담의 경감과 농업 생산력 보호에도 주의를 기울였다. 그는 수시로 지방에 관원을 파견하여 조세 감면 조치의 시행 정황을 점검하였다. 그리하여 효종 시대는 남송 전시기 가운데 농민의 부담이 가장 가벼웠던 시기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 수리시설의 건설과 보수라는 측면에서도 효종 시대에는 커다란 진전이 있었다. 오늘날 남아 있는 지방지들을 살펴보면 효종 시대에 만들어지거나 혹은 보수된 수리 시설이 대단히 많다. 정치 사회적 안정과 중앙 정부의 독려를 바탕으로, 효종의 통치기에는 각 지방에서 활발하게 수리 시설이 만들어졌던 것이다.

효종 시기의 정치 가운데 또하나 주목해야 하는 것이 회자 가치의 안정이다. 회자는 고종의 말년인 1161년에 정식으로 발행되기 시작한 지폐이다. 효종은 북송 시대의 지폐였던 사천 지방의 교자가 가치 하락으로 인해 민간에 심각한 폐해를 입혔던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회자의 신용 유지에 남다른 관심을 쏟았다. “짐은 회자 때문에 걱정이 되어 거의 10년 동안이나 제대로 잠을 자지 못했다”고 말하고 있을 정도이다. 그는 회자가 발행액이 과도하지 않도록 엄격히 관리하였다. 또 이와 별도로 회자의 신용을 유지하기 위해 이따금 특별 재원을 투여하여 회자의 발행 준비금을 확충시켜 갔다.

태상왕 고종의 요구 들어준 까닭은?

이러한 효종의 노력으로 회자는 정부에서 정한 가치를 잘 유지하였다. 남송 정부는 회자 1관이 동전 770문으로 통용되도록 규정하였다. 하지만 효종의 시대가 지나면서 회자는 가치는 갈수록 저하되어 갔다. 재정의 부족을 회자의 남발로 메우려 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효종 시대(1162∼1189) 1관당 770문에서 750문 사이로 거래되던 것이, 1200년경에는 600문 정도로, 1210년경에는 400문 정도로, 그리고 1230년경에는 330문 정도로 저하되었다. 1260년경에는 심지어 50문 정도로까지 폭락하였다.

이러한 회자의 가치 하락은 남송 사회에 심각한 사회 문제가 되었다. 예컨대 1233년 권신 사미원이 죽고 그 뒤를 이어 민간의 신망을 한 몸에 받던 진덕수가 발탁되자, 그를 항해 임안의 시민들은 한 목소리로 물가의 안정을 부탁하였다. 물가의 안정이란 다름 아니라 회자의 가치 상승을 일컫는 것이다. 당시 민간에서는 이러한 여망을 담아, “물가를 안정시키려면, 진덕수 나리가 중용되어야만 한다네” 라는 노래까지 불렀다고 한다.

그런데 효종의 시대 태상황 고종은 어떻게 생활하고 있었을까?

그는 덕수궁에서 극히 호사스러운 방종의 나날을 보냈다. 고종은 후사로 들인 효종에게는 엄격한 도덕과 금욕을 요구하였지만 그는 내키는 대로 향락에 탐닉한 인물이었다. 근래 중국의 어느 원로 송대사가는 그의 전기를 쓰면서 <황음무도 송고종(荒淫無道 宋高宗)>이란 제목을 붙이고 있을 정도이다. 뿐만 아니라 고종은 효종의 정치에도 사사건건 간섭하였다. 한 번은 고종이 효종에게 부패 혐의로 파면된 지방관의 복직을 요구하였다. 효종은 그 인물의 죄상을 낱낱이 알고 난 다음, 한 동안 고종에게 아무런 통지도 하지 않고 잠자코 있었다. 그러자 고종이 크게 화를 내는 바람에 어쩔 수 없이 원상복귀시킬 수밖에 없었다. 이때 효종은 재상에게, “어제 태상황께서 어찌나 크게 화를 내시는지 짐은 몸둘 바를 몰랐소. 이쯤 되면 설령 대역 죄인이라도 풀어줄 수밖에 없겠소이다”라고 말했다고 한다.?효종은 고종의 정치 간여와 요구를 거의 그대로 들어주었다.

고종의 사치에 대기 위해 필요한 막대한 재원도 아무 말 없이 요구하는 대로 덕수궁에 전달하였다. 효종은 고종에게 효순을 다하였다. 고종은 퇴위 이후 효종의 치세 거의 막바지까지 살다가 1187년(순희 14) 81세로 세상을 떠났다.

1189년(순희 16) 정월 금의 세종이 사망하고 22세의 장종(章宗)이 뒤를 이었다. 그렇게 되자 63살이 된 효종이 한참이나 나이어린 금의 장종을 숙부라 불러야 되는 상황이 발생하였다. 효종은 이해 2월 퇴위하고 아들 광종(光宗)이 즉위하였다. 효종은 태상황이 되어 옛 고종의 거처였던 덕수궁을 중화궁(重和宮)이라 이름을 바꾸고 그리로 옮겼다.

광종 황후 정치간여 극심···궁녀?손 자르고 왕 총애 귀비 살해 ‘악행’ 일삼아

광종은 즉위 당시 나이가 43살이었다. 효종은 그가 영특하면서도 과단성이 있다 판단하고 전력을 다해 교육시켰다. 그는 광종에게 큰 기대를 걸었다. 광종은 즉위 초 이러한 기대에 부응하여 정치에 온 힘을 다하였다. 하지만 광종의 황후 이씨(李氏)가 정치에 간여하고 또 부자 사이를 이간하면서 문제가 생겼다. 이황후는 성격이 거칠었다. 어느날 광종은 한 궁녀의 하얀 손을 보고 좋아했다. 이에 이황후는 사람을 보내 그 궁녀의 두 손을 잘라 상자에 담아서 광종에게 보냈다고 한다. 또 1191년(소희 2)에는 광종이 궁궐 바깥으로 나가 있는 틈을 이용하여, 광종이 총애하는 황귀비(黃貴妃)를 살해하고 갑작스레 병사했다고 둘러댔다.

광종은 이 황후의 등쌀에 밀려 점차 정무를 돌보지 않게 되었다. 정치의 실권은 이황후의 손에 장악되었다. 이황후는 효종과 광종 사이를 갈라놓기 위해 온갖 술수를 부렸다. “효종이 광종을 폐위하려 한다”느니, 혹은 “광종이 효종을 찾아가 식사를 할 때 밥에 독약을 풀어 독살하려 한다”고 말하기도 했다. 이에 광종은 효종의 거처인 중화궁에 찾아가지 않게 되었다. 조정의 관료들은 광종에게 간언하여 중화궁에 가서 문안드리라고 하였다. 하지만 광종은 모두 뿌리치고 듣지 않았다.

이러한 상태에서 1194년(소희 5) 5월 효종이 와병하여 위중해졌다. 광종과 이황후는 신하들의 청원에도 불구하고 문병하지 않았다. 6월에 효종이 68세의 나이로 병사하자, 광종과 이황후는 광종의 병을 핑계 삼아 장사 의식의 참여를 거절하였다.

결국 조정의 대신들 사이에 광종의 퇴위와 태자의 옹립을 기도하는 모의가 일어났다. 그 중심은 태종의 후손인 조여우(趙汝愚)였다. 7월 초, 조여우는 황실 근위병사를 동원하여 궁궐을 둘러싼 다음 정변을 일으켰다. 그는 고종의 황후였던 태황태후 오씨의 재가를 얻어 광종을 강제로 퇴위시키고 녕종(寧宗)을 즉위시켰다. 이 정변의 과정에서 오태후의 조카 사위인 한탁주(韓?h?)가 큰 역할을 하였다. 망설이는 오태후를 설득하여 정변을 추인하도록 만들었던 것이다.

효종 통치 28년 평화, 후계 광종 잘못 간택해 ‘물거품’

효종의 통치기 28년은 대외 위기와 사회 동요로 점철된 남송시대에 깃든 짧은 평화의 시기였다. 하지만 이러한 안정은 효종 자신이 간택한 후계자 광종으로 말미암아 순식간에 무너져 버렸다. 녕종 시대가 되면 권신 한탁주가 대금 전쟁을 추진하면서 더욱 심각한 동요가 발생하였다. 짧은 평화와 안정, 그리고 그것에 뒤이은 혼란은 효종의 통치를 더욱 인상적인 것으로 만들었다.

남송의 후반기, 그러니까 13세기 중기 이후의 학자들이 효종의 시대를 동경하여 마지않았던 것도 그러한 극적인 굴절로 말미암은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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