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용길의 영화산책] ‘말없는 소녀’의 짧고도 찬란한 여름…클레이 키건 원작 ‘맡겨진 소녀’

1981년 아일랜드 시골 농촌. 주인공 9살 소녀는 위아래 다섯 자매가 있다. 초등학교를 다니지만 글 읽기도 서툴고 친구 관계도 소원하다. 왕따를 당하다 못해 학교 밖으로 일탈해 홀로 헤매다 귀가하곤 한다. 소녀는 말이 없다. 먼저 말하지 않고 질문에 최소한의 반응만 할 뿐이다. 여차하면 침대 바닥 밑으로 들어가는 게 더 편안했다.

<말없는 소녀> 포스터

아빠는 술주정뱅이에 틈틈이 도박에 돈을 잃는다. 줄담배에 무례한 언사로 삶을 낭비하고 있다. 키우던 젖소를 걸고 베팅하다 가정 살림을 더욱 거덜낸다. 무능력에 무책임한 남편에 질린 엄마는 여섯자매 양육과 교육을 포기하다시피 살아간다. 게다가 또 임신 중이다. 아빠가 귀가하면 소녀들은 수다를 멈추고 얼어 붙었다. 먹을 게 없어 등교길 점심 도시락도 챙길 게 없다.

자매들 속에서 홀로 겉돌던 소녀는 여름방학 동안 엄마의 사촌언니댁으로 보내진다. 출산을 앞둔 엄마의 상황은 딱하기만 했다. 입 하나라도 덜어야 할만큼 집안은 쪼들렸고 아빠는 궁색했다. 소녀에게 더욱더 먼 친척이었다. 그들도 젖소 키우고 시골 농장을 가꾸는 전형적인 농촌부부였다. 

어린 롱다리 소녀를 이웃들은 환대하기 시작했다. 소녀도 서서히 말문을 열었다. 고마웠다.(본문 가운데)

초로의 아줌마(오촌 이모) 아저씨(오촌 이모부)는 차갑지 않았다. 소녀를 씻기고 편안한 잠자리를 마련해줬다. 정성 깃든 음식에 가뿐한 식사였다. 닭이 울고 젖소가 목청을 돋웠고 개가 짖었다. 멀리 소쩍새가 울었다. 엄마 소는 송아지를 낳았고 축사 물청소는 바빴고 샘터에서 물을 길으러 와야 했다. 농장의 하루는 늘 바빴고 해야할 일은 켜켜이 대기했다. 수풀을 베어 건초더미를 준비해야 젖소를 키울 수 있었고 이웃들과 상부상조해야 시골 공동체는 유지됐다.

어린 롱다리 소녀를 이웃들은 환대하기 시작했다. 소녀도 서서히 말문을 열었다. 고마웠다. 할머니같은 이모는 많은 것을 가르쳐 주신다. 빨래를 빨랫줄에 널고 옷을 개는 요령을, 다림질하는 법을 알려준다. 식빵을 맛있게 먹는 방법을 익힌다. 음식을 냉장고에 잘 보관하는 지혜를 배운다. 청소기를 돌리고 감자를 잘 깎는 요령을 습득한다. 100까지 세면서 머리를 빗질해주는 이모의 손길 속에 소녀의 야뇨증세도 치유된다. 표정은 밝아졌고 소녀는 궁금한 것을 질문할 줄 아는 아이로 변한다. 무뚝뚝했던 이모부가 비스켓 하나를 두고 간다. 소녀는 비스켓을 호주머니 깊은 곳에 넣는다.

어느 순간 소녀는 연로한 이모부와 축사 바닥 청소 경쟁까지 한다.(본문 중에서)

썰렁하고 차가웠던 이모부는 농장 일 하나하나 가르쳐 준다. 송아지에게 젖병을 물리는 요령과 축사 바닥 청소하는 법을 선보인다. 어느 순간 소녀는 연로한 이모부와 축사 바닥 청소 경쟁까지 한다. 이모부는 제안한다. 농장 정문 우체통까지 뛰어 갔다 올래? 편지가 와 있을거야. 넌 보기드문 롱다리야. 잘 뛸 것 같아. 시간을 재줄게. 소녀가 뛴다. 소녀의 화색이 환해진다. 온 세상이 소녀에게 다가 온다. 숲과 구름과 길이 출렁인다.

이 세 사람의 특별하고 세심한 우정이 싹을 틔우고 쑥쑥 자라기 시작한다. 아이는 절로 자라지 않는다. 배려와 보살핌이 아이를 키운다. 그런 아이가 배려할 줄 알고 보살펴 줄 줄 아는 성인이 돼 또 다른 아이를 키워낸다.(본문 가운데) 

방목, 방치된 소녀가 먼 친척에게 보내져 여름을 지낸다. 생면부지였지만 소녀는 이모 이모부와 여름을 나면서 가장 멋진 유년의 추억을 차곡차곡 채워나간다. 말을 할 줄 알게 되고 고마움과 사랑을 배웠다. 침대에 지도를 그려 부끄럽기만 했던 소녀는 자신감을 찾고 적응감을 익혔다.

이 세 사람의 특별하고 세심한 우정이 싹을 틔우고 쑥쑥 자라기 시작한다. 아이는 절로 자라지 않는다. 배려와 보살핌이 아이를 키운다. 그런 아이가 배려할 줄 알고 보살펴 줄 줄 아는 성인이 돼 또 다른 아이를 키워낸다.

저 어린 나이에 꼭 해야할 말만 구사하는 소녀를 이모부는 이미 귀한 존재로 대접한다. 몸과 마음을 달음박질하게 하고 여린 가슴을 여며준다.

소녀에게 말한다. “아무 말 안해도 된단다. 언제나 기억하렴. 많은 사람이 침묵할 기회를 놓쳐서 많은 걸 잃었단다.”

<말없는 소녀> 한 장면

이모 이모부에게도 엄청난 슬픔의 비밀이 있었다. 소녀의 가슴 속엔 비밀의 숲속 우물물이 늘 차오른다. 영화는 엔딩씬으로 달려간다. 마침내 객석 사이로 순정한 봇물이 터져 휘몰아친다.

옛 브라운관TV 레트로 감성이 꽉찬 화면은 눅눅한 유화가 아닌 선명하고 명징한 수채화 톤이다. 문장을 지극히 아껴서 간결체의 백미를 보여준 원작 단편소설은 이미 문장의 전범이 됐다. 영화로 만든 영상콘텐츠가 원작 소설를 더 아름답게 끌어올리는 최고의 케이스.

<맡겨진 소녀> 표지

100페이지 분량 단편은 2010년에 첫 출간됐고 2022년 아일랜드 영화로 제작됐다. 소녀의 성장기는 문학상과 영화제를 휩쓴다. 2023년 한국 개봉(2022년 부산국제영화제 초청작) 됐다.

* 영국영화 아니고 영어도 아니다. 아일랜드영화이며 아일랜드어 가 생생하다.

* 돌봄(Care)은 이제 선택이 아니다. 21세기 삶의 기본 패턴이다. 우리는 누군가를 돌보다, 누군가의 보살핌을 받다가 가는 존재다. 돌봄을 실천하거나 체험하지 못하면 여차하면 괴물이 될 수 있다. 시민 배움 기본과정 교과서에 ‘돌봄’이 국영수처럼 우뚝하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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