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영준 칼럼] 우크라이나 전황과 재건사업 준비
“우크라이나의 러시아에 대한 반격은 고전을 면치 못할 것이다… 우크라이나 재건사업, 떡 줄 사람은 생각도 하지 않는데 김칫국부터 마시는 우를 범하지 말아야 할 것이다.”
유럽 전체를 장악해 가던 프랑스의 나폴레옹은 트라팔가르 해전에서 영국 해군에게 참패를 당한다. 한창 전성기를 구가하던 나폴레옹의 입장에서는 상당한 체면을 구긴 사건이었다. 격분한 나폴레옹은 유럽 전체에 눈엣가시인 영국과의 경제활동을 금지시킨다. 하지만, 러시아는 이에 아랑곳하지 않고 영국과의 무역을 이어간다. 이를 못마땅하게 여기던 나폴레옹은 60만 대군을 이끌고 러시아를 향해 진격한다. 이때가 1812년 6월 22일이다.
한편, 수도인 모스크바까지도 버리는 러시아의 청야전술(淸野戰術, Scorched Earth Tactics, 주변에 적이 사용할 만한 모든 군수물자와 식량 등을 없애 적군을 지치게 만드는 전술)에 나폴레옹은 무릎을 꿇고 만다. 여기에 러시아의 추위와 전염병이 더해지자, 약 3만∼4만명 정도의 군사만이 살아서 프랑스로 귀환할 수 있었다. 역사학자들 사이에서는 러시아 원정의 실패가 나폴레옹 몰락의 단초가 되었다는 것에 큰 이견이 없다.
훗날 독일의 히틀러가 3개 집단군을 앞세워 러시아 서부에 대한 공격을 개시한다. 3개 집단군은 병력 3백만명, 전차 3천대, 중포 7천문, 항공기 2천대로 구성된 어마어마한 규모였다. 이때가 1941년 6월 22일이다.
한편, 스탈린이 이끄는 붉은 군대는 쉽사리 무너지지 않았다. 가을철 폭우가 전장 일대를 진흙탕으로 만들면서 독일군의 기동성이 현저히 떨어진 탓이다. 설상가상으로 겨울에 접어들면서 영하 40도 혹한이 독일군의 병참선마저 끊어버렸다. 이듬해 전장의 주도권은 소련에 넘어갔고, 이는 독일이 2차 세계대전에서 패하는 결정적 계기가 된다.
최근 우크라이나 전쟁에서도 유사한 상황이 벌어졌다. 우크라이나의 대규모 반격 작전이 지난 6월 27일부로 개시된 것이다. 나폴레옹과 히틀러도 실패한 러시아 침공을 공교롭게도 그들처럼 6월 말에 개시한 것이다.
아니나 다를까, 그로부터 한 달이 지난 시점에서 이번 반격이 실패할 수 있다는 우려의 목소리가 여기저기서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우크라이나의 진격 속도가 예상보다 더디었기 때문이다.
이제는 전쟁의 속단을 장담할 수 없게 되었다. 우크라이나는 총사령관이 49세이고, 일선 부대 지휘부가 대부분 20대로 구성되었다고 한다. 젊은 피 수혈을 통해 우크라이나 군을 과학기술 중심으로 환골탈태시키는 긍정적 측면을 기대한 듯하다. 하지만, 술(術)을 무시할 수 없는 전장에서 경험 부족은 심각한 위험 요인이 아닐 수 없다. 이 지역에 관한 전쟁사를 고려할 때, 이번 6월 대반격이 아쉬운 이유이다.
다행히 반격 초반의 우려와 달리 남부지방을 중심으로 가시적인 승전보가 하나둘 전해지고 있다. 하지만, 가을철 폭우와 겨울철 혹한이 코앞에 다가오고 있다. 더 이상의 시간적 여유가 없다. 과연 이번에는 진흙장군인 ‘Rasputitsa’와 동장군 ‘General Frost’가 빗장을 풀어줄 지 의문이다.
우크라이나 전쟁은 어정쩡한 장기전이 될 것이다
현대전 시점을 명확히 구분하기가 쉽지 않다. 다만 현대전 특징이 녹아있는 전쟁만을 추려본다면, 아마도 1970년 이후 발발한 분쟁들은 현대전으로 봐도 큰 무리가 없을 것이다.
1971년 방글라데시 독립전쟁 이후부터 2022년 발발한 우크라이나 전쟁까지 현대전이라 볼 수 있는 무력 분쟁(내전, 충돌, 전쟁 등을 포함)은 총 113건으로 정리할 수 있다. 이 가운데 약 40%에 해당하는 43건이 1년 이내에 종결되었다. 반면, 약 60%의 전쟁은 1년 이상 지속되었다.
주목할 점은 1년 이상 지속된 분쟁 가운데 15건을 제외한 나머지 55건의 전쟁은 5년 이상 지속되었거나 현재도 종결이 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1년이 넘은 우크라이나 전쟁도 여러 사정을 고려할 때 장기화 될 가능성이 높다.
영국의 국제안보 싱크탱크인 RUSI(Royal United Services Institute, 왕립합동군사연구소)는 이번 전쟁에서 러시아 군 가운데서는 공병이 가장 우수하다고 평가했다. 지형과 기상을 십분 활용하여 방어작전을 효과적으로 수행하기 위해 공병 전력을 강화한 것으로 풀이된다. 실제로 우크라이나 군은 러시아 공병이 구축한 지뢰지대, 용치·함정·참호 등의 대기동 장애물을 쉽게 극복하지 못하고 있다.
사실 돈바스 전쟁을 끝내기 위해 맺어진 민스크에서의 두 차례 협정에도 불구하고 우크라이나와 러시아는 각각의 속내가 달랐다. 이때부터 우크라이나 전쟁은 이미 시작된 셈이다. 우크라이나 전역에 불발탄, 확산탄, 지뢰, 부비트랩 등이 깔리기 시작했다. 이번 전쟁에서 복구 범위가 확장되고, 복구 밀도가 높아졌을 뿐이다.
특히 우크라이나는 11세기부터 원활한 배수를 위해 지하세계를 구축해 왔다. 2차 세계대전 당시 소련 공병이 기존의 배수로에 방공호를 덧대는 바람에 지금은 엄청난 규모의 지하시설이 도시 곳곳에 깔려있다. 눈에 보이는 영토의 회복에도 불구하고 도처에서 국지전투, 테러 등이 발생할 수 있다.
과연 우크라이나는 신속히 러시아로부터 잃어버린 영토를 회복하고, 역내 안정을 도모할 수 있을 것인가? 신이 아닌 이상 결과를 논할 수는 없지만, 역사적 기록과 현재의 전황을 고려할 때 쉽지 않을 것으로 예상된다. 정확히 표현하자면 명확한 영토분쟁에 관한 해결이 없이 어정쩡한 상태에서 전쟁이 소강상태에 이를 가능성이 크다.
안정화작전 下에서의 재건사업 준비가 필요하다
이러한 상황에서 너나없이 우크라이나 재건사업이 가져다줄 장밋빛을 기대하고 있다. 두 차례 있었던 URC(Ukraine Recovery Conference, 우크라이나 재건 회의)에서는 이번 전쟁의 피해규모가 워낙 커서 10년간 복구비용을 약 1,200조원으로 추산했다. 하지만, 앞서 살핀 바와 같이 전쟁이 완전히 종결되기 어렵다면, ‘전후’ 재건사업을 쉽게 기대하기 어려울 수도 있다. 재건사업에 따른 안전, 영업이익 보장 등을 담보할 수 없기 때문이다. ‘안정화작전’ 하에서의 ‘전시’ 재건사업을 치밀히 준비해야 하는 이유이다.
안정화작전은 전시에 수복된 지역에서 통치 질서가 확립될 때까지 수행하는 군사작전이다. 흔히들 군사작전을 적 전투력의 격멸에 중점을 둔 공격과 방어를 주로 생각한다. 하지만, 2003년 미군은 이라크 전쟁 중 수많은 시행착오를 겪으면서 공격, 방어 및 안정의 개념이 전장 상황에 따라 유기적으로 통합되는 안정화작전을 군사작전의 한 형태로 독립시켜 발전시켰다.
이라크 전쟁에서 미군은 공격작전을 43일 만에 마무리했다. 하지만, 공격작전의 성공이 전쟁에서의 완전한 승리로 이어지지 않았다. 비록 공격작전은 종결되었지만, 지난한 전쟁이 2011년까지 계속된 것이다. 이 시기 수행된 군사작전이 바로 안정화작전이다. 안정화작전의 핵심은 치안 활동 등 민간의 안전 확립, 필수 공공 서비스 복구, 사회 및 경제발전을 위한 기반시설 피해복구 등으로 일반적인 군사적 활동과는 차이가 있다.
우크라이나 재건사업에 참여를 준비하는 우리나라가 안정화작전을 고려하고 있는지 궁금하다. 치안 유지 등을 위한 한국군 파병의 국회 비준은 쉽지 않은 과제가 될 것이다. 친러 세력이 활동하는 지역에서 재건 사업은 소규모 분쟁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할 수도 있다. 이라크 재건사업에서처럼 ‘밑지는 장사’가 되지 않기 위해서는 우크라이나 전역에 대한 사업성 분석을 통한 사업 선별이 필요하다.
우크라이나 재건사업을 우리나라가 경기침체기에 방산수출 등과 엮어 경제성장을 위한 포뮬리즘의 수단으로 활용해서는 안 될 것이다. 준비가 없는 지나친 낙관이나 홍보는 자칫 장밋빛을 잿빛으로 만들 수도 있다. 이제부터라도 지역, 군사 및 건설 등 여러 분야 전문가들이 한 팀을 구성하여 치밀한 준비가 필요한 이유이다.
우크라이나 재건사업, 떡 줄 사람은 생각도 하지 않는데 김칫국부터 마시는 우를 범하지 말아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