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영준 칼럼] 홍범도 장군 흉상 이전과 육사의 정치적 중립

2018년 3월 1일 육군사관학교에서 열린 독립전쟁 영웅 5인 흉상 제막식에서 사관생도와 참석자들이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육사는 독립전쟁에 일생을 바친 홍범도, 김좌진, 지청천, 이범석 장군, 신흥무관학교를 설립한 이회영 선생의 흉상을 탄피 300kg을 녹여 제작했다. 맨 왼쪽이 홍범도 장군 흏상 <연합뉴스>

 육군사관학교(이하 육사)를 대한민국 현대건축의 미니 박물관이라고 한다.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3대 건축가들의 작품이 유일하게 모여있는 곳이다. 지금도 많은 이들이 교훈탑(김수근 作), 박물관(김중업 作), 도서관(김종성 作)을 찾아온다. 이들 외에도 학교본부(이광노 作) 등을 포함하여 내로라 하는 상(賞)을 받은 건축물들이 즐비하다.

건축물 외에도 육사에는 역대 대통령 휘호석, 영웅 동상, 기념비들이 100여점 이상 전시되어 있다. 대한민국 국군의 첫 부대가 창설된 곳이며, 호국의 간성을 기르는 도장으로서 기념과 교육의 목적 때문일 것이다.

이 조형물들의 설치 여부를 판단하는 명확한 기준이 있다. 바로 육사를 졸업했거나, 혹은 육사와 관계되어야 하는 것이다. 

살신성인의 표상인 강재구 소령(육사 16기)은 육사를 빛낸 선배시다. 밴 플리트 장군과 안중근 장군은 육사와 관계가 있다. 밴 플리트 장군은 전쟁 와중에도 우리나라의 미래를 위해 육사 설립을 주도했다. 

안중근 장군은 안춘생 장군의 당숙부이다. 안춘생 장군은 광복군출신으로 육사 교장이며, 안중근 장군의 영향을 받아 육사 교훈을 제정했다.

한편, 세간에 육사에 설치된 홍범도 장군의 흉상 이전이 논란거리가 되고 있다. 논란의 핵심은 홍범도 장군의 공산당 이력이다.    

홍범도 장군은 청산리 전투 등과 함께 항일무장 투쟁의 눈부신 전과로 기록되는 봉오동 전투를 이끌었다. 연이은 전투에서 참패한 일본군은 독립군 근거지를 없애고자 중국에 있던 우리 동포들을 무자비하게 살해한다. 이에 독립군은 중국을 벗어나 연해주로 기반을 옮긴다. 

하지만, 연해주에서도 일본군 탄압이 날이 갈수록 거세지면서 흩어져 있던 독립군 단체들이 힘을 모으기 위해 자유시로 집결하게 된다. 이때 홍범도 장군의 ‘대한독립군’도 자유시에 주둔하게 된다.

당시 독립군 내에는 계파 간 갈등이 심했다. 즉, ‘고려군정회의’와 ‘사할린의용군’ 사이의 대립이었다. 두 계파는 충돌을 피할 수 없었고, 종래에는 러시아 적(赤)군의 지원을 받는 고려군정회의가 승리하고 사할린의용군은 무장해제가 됐다. 이른바 ‘자유시 참변’이다. 이후 남아있던 독립군은 소비에트 적군 제5군단 직속 한인 여단으로 흡수?개편되며, 홍범도 장군은 제1대대장으로 임명된다.

자유시 참변에 앞서 러시아는 큰 내전을 겪는다. 러시아 황제 중심의 백(白)군과 레닌 주도의 혁명 세력인 적군 간에 충돌이다. 독립군은 당시 적군이 지향하던 공산주의에는 그다지 관심이 없었던 듯하다. 

일제와 손을 잡은 백군에 맞서기 위해 적군과 손을 잡은 것이다. 이는 홍범도 장군이 모스크바에서 열린 ‘극동민족대회 대표대회’에 참석하기 위한 조사표에서도 뚜렷이 나타나 있다. 즉, 홍범도 장군은 모든 정당이나 단체, 노동조합 등에 가입하지 않았다. 오직 ‘고려독립’이 유일한 목적이자 희망이라고 밝힌 것이다.

홍범도 장군은 제대 후 연해주에서 지내다가 ‘공산당’에 입당한다. 이후 ‘한인 강제 이주 정책’에 의해 카자흐스탄으로 옮겨와 여생을 보내다가 1943년 생을 마감한다.

한편, 1949년 3월을 기점으로 김일성은 스탈린이나 마오쩌둥에게 48회에 걸쳐 남침 허락이나 전쟁 지원을 요청했다. 이전까지 스탈린은 남한이 북침할 경우에 반격만을 승인하였으며, 북한에 의한 남침에 미온적이었다. 즉, 홍범도 장군의 서거 시점을 고려할 때 공산당 이력만으로 대한민국의 존재에 해를 끼쳤다고 볼 수 없다.

정치이념은 용어상의 표현만으로 판단할 수 없다. 용어가 담고 있는 개념을 이해해야 하며, 특히 그에 따른 행위와 결과를 함께 살펴야 한다.

우리나라는 자본주의 사회이다. 정확히는 자유주의라는 대원칙 하에서의 ‘수정’ 자본주의를 지향한다. 표현만 없을 뿐 공산주의 이념이 가미되어 있다.    

오늘날 선진국의 상징이 된 정치이념이 민주주의이다. 하지만, 2,500여 년의 긴 역사에도 불구하고 프랑스의 루소 외에는 민주주의를 긍정적으로 평가한 정치사상가를 찾기가 쉽지 않다. 민주주의 발전의 핵심은 참정권의 확대와 권력의 분산이다. 

공평한 투표, 즉 유권자 확대를 위해 인종, 성별, 나이 등의 한계를 철폐해 나갔다. 권력의 분산을 위해 언론, 감사, 삼권분립 등 수많은 제도와 조직이 만들어졌다. 이 핵심 장치가 멈춘다면 대의(代議) 민주주의는 인민민주주의와 별반 차이가 없을 수 있다. 민주주의의 진정한 가치는 내용에 있지 용어에 있는 것이 아니다.    

육사 교정에는 이회영 선생의 흉상도 있다. 홍범도 장군의 흉상과 나란히 놓여있다. 이회영 선생은 대표적인 아나키스트다. 아나키즘은 국가, 정부, 제도 등 인간을 억압하는 모든 체제를 반대한다. 자유민주주의도 예외가 아니다. 홍범도 장군 흉상 이전의 논리라면 이회영 선생의 흉상도 함께 옮겨져야 할 것이다.    

홍범도 장군의 공산주의는 당시의 시대상이었다. 대한민국을 적화시키려는 세력과는 본질적으로 달랐다. 김일성이 남침 야욕을 드러내기 몇 해 전에 이미 삶을 마감했다. 명분이 없는 색깔론, 즉 공산당 가입 이력만으로 홍범도 장군이 우리 민족을 위해 세운 공을 깎아내려서는 안 될 것이다.

논란의 핵심은 홍범도 장군의 흉상이 육사 교정에 설립될 근거가 희박하다는 점이다. 신흥무관학교를 육사의 뿌리로 삼더라도 홍범도 장군은 이와도 무관하다. 유사한 시기에 홍범도 장군에게 두번째 훈장을 추서한 불법은 정치적 이슈의 일환이라고 본다. 육사에 홍범도 장군의 흉상을 설립한 것도 정치의 일환이었다면, 군의 정치적 중립성을 심각하게 훼손한 것이다.

육사에는 전통위원회가 오랫동안 유지되었다. 육사 교수가 중심이 되었으며, 조형물 설치도 여기에서 심의한 내용을 토대로 학교장이 결정했다. 간혹 사사건건 학교장을 견제하는 전통위원회를 눈엣가시 같은 존재로 바라본 역대 학교장들이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위원회가 사라져 버렸다.    

홍범도 장군의 흉상 이전 문제는 색깔 논쟁이 아니다. 정치적 중립성의 관점에서 바라봐야 할 것이다.    

국군은 국가의 안전보장과 국토방위의 신성한 의무를 수행함을 사명으로 하며, 정치적 중립성은 준수된다(헌법 제5조 2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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