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혼의 혼밥’ 신아연 작가의 ‘아름다운 고백’

2023년 5월 초순 시드니 시내 풍경. 남반구 호주는 요즘 한창 가을로 접어들고 있다. 차분하고 성숙해지는 바로 그 계절 가을의 길목에 서있는 것이다. <사진 신아연 작가>

그간 평안히 지내셨는지요? 저는 지금 호주에 두달 넘게 있습니다. 5월 30일 밤에 한국으로 돌아가 6월 1일에 귀국 인사를 드릴 겁니다. 지인들과는 간간이 소식을 주고받지만, 제가 잘 지내고 있는지 먼저 안부를 물어오시는 분들께 고맙고 송구해서 이 즈음에 소식을 한번 드리는 것이 도리인 것도 같습니다.

저는 ‘영혼의 혼밥’이란 제목으로 6년 째 아침글을 밥처럼 지어 오전 8시에 ‘배달’하는, 좀 우스꽝스럽고 ‘관종’ 같은 짓을 해 왔습니다. 그 와중에 이딴 거 보내지 말라며 빙충이 취급을 당하는가 하면, 맛이야 둘째치고 매일 새벽에 글밥을 짓는 노력이 가상하다며 배달료나마 지불하겠다는 분들도 있습니다.

양극단을 제외하면 여러분들 대부분은 보내든지 말든지 별 관심이 없는 줄 압니다. 저한테는 그런 분들이 부담 없습니다. 그러면서도 오늘 굳이 이런 말씀을 드리는 이유는 이제 한국으로 돌아가 다시 영혼의 혼밥을 짓기 시작할 때 저는 과거와는 다른 밥을 짓고자 하기 때문입니다.

월, 화, 수요일 주 3회 ‘동서양 고전풀이’와, 목요일 주 1회 ‘예수동행일기’라는 ‘메뉴와 식단’이 달라지진 않지만, 그 맛은 사뭇 진해지고 진정해질 것 같습니다. 물론 지금까지도 설렁설렁, 거짓을 써오지는 않았지만 저는 이제부터 진짜로 ‘찐삶’을 살고 싶어졌습니다.

남은 생이 얼마인지 모르지만 하루를 살아도 진실되이 살며 진실된 글을 쓰고 싶습니다. 그러다 보면 여러분들 입맛에 맞지 않을 수 있고, 조미료 없는 재료 본연의 거친 맛이 될 수도 있겠기에, 이제야말로 “이딴 글 보내지 말라”는 배달 거부 사태가 속출할 수도 있다는 각오입니다. 여튼 저는 진짜가 되고 싶어요! 사람과 글 둘 다.

어제 저는 이곳 호주에서 제 생애 처음으로 창세기에서 요한계시록까지 성경 전체의 일독을 마쳤습니다.

2021년 12월 16일에 회심한 후, 2022년 7월 4일부터 읽기 시작하여 2023년 어제 5월 4일에 끝내기까지 꼬박 10개월이 걸린 거지요. 한국에서 시작하여 호주에서 마쳤으니 북반구와 남반구를 아우르는 ‘성경읽기’였다는 점에서 더욱 의미 깊습니다.

“주 예수의 은혜가 모든 자들에게 있을지어다. 아멘”, 요한계시록 22장 21절 말씀을 끝으로 성경을 덮는데 뜨거운 눈물이 솟았습니다. 지금까지 살면서 가장 기쁜 날로 꼽아왔던 운전면허를 딴 날보다 더 기뻤습니다. 웃자고 하는 소리지, 비교 불능의 차원이 다른 기쁨이지요.

저는 지금까지 많은 책을 읽었습니다. 특히 인문학에 경도된 사람이었습니다. 사람답게 살기 위해, ‘사람의 힘으로’ 오를 수 있는 경지를 딴에는 부단히 추구해왔단 의미입니다. 그런데 되지 않았습니다. 사람이, 제가 바뀌지 않더란 말입니다.

혼자된 후 지난 10년 공부 동안 사람의 힘으로는 사람이 바뀌질 않는다는 것을 확인하고 깨달았을 뿐입니다. 생활면에서 조금 더 금욕적이 되고, 대인관계에서 약간 더 윤리적이 된 것 외엔.

왜냐하면 우리는 만들어진 존재이지 만든 존재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가을이 깊어가는 시드니, 지금 제 옆에 난로가 켜져 있습니다만, 난로가 고장났을 때 난로가 자기 자신을 직접 고칠 수 없듯이 말입니다. 그처럼 우리 마음과 영혼이 고장 났을 때 우리를 만든 자만이 우리를 고칠 수 있습니다. 그러니 어떻게든 만든 자를 만나야 합니다. 어떻게 만냐나고요? 은혜로 만나지요.

“주 예수의 은혜가 모든 자들에게 있을지어다”에서 제 눈물이 쏟아졌던 이유입니다.

은혜로 우리는 바뀝니다. 비로소 사람이 달라지고 변합니다. 모든 사람이 주 예수의 은혜를 받을 수 있습니다. 즉, 모든 사람이 달라질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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