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유년 설날, 신아연 ‘사임당의 비밀편지’와 이영애 ‘사임당, 빛의 일기’ 만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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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시아엔=양승국 변호사] 신아연 작가가 최근 ‘책과 나무’에서 낸 <사임당의 비밀편지>에 나오는 사임당의 말이다.

이런 말, 나도 500년 만에 처음이야. 내가 이렇게 솔직해도 되는 건지 솔직히 겁도 나. 이미지라는 건 말이야, 남이 만든 것이기 때문에 남이 나를 또 다른 이미지로 덧칠하기 전에는 벗을 수도 없는 거거든. 나하고는 무관하게 만들어진 그 이미지 속에 막상 갇혀야 하는 건 나인 거지. 그러니 인선 씨, 이 편지는 절대 공개되어선 안 돼. 인선 씨하고 나 사이에서 끝나야 하는 비밀이 되어야 하는 거야. 왠지 알아? 나에 대한 환상이 벗겨졌을 때 고통 받는 사람은 내가 아니라 그 환상이 필요한 사람들이기 때문이지.

%eb%8b%a4%ec%9a%b4%eb%a1%9c%eb%93%9c이 말을 읽고 나면 “어? 사임당이 쓴 비밀편지가 500년 만에 발견되었나?” 하는 분들도 있을 거다. <사임당의 비밀편지>는 신아연 작가의 장편소설이다. 수필가로만 활약하던 신 작가가 이번에 처음으로 소설에 도전하여 내놓은 작품이 바로 <사임당의 비밀편지>다. 위의 글은 그 소설에 나오는 한 구절이다.

‘신사임당’ 하면 먼저 떠오르는 단어는 ‘현모양처’일 것이다. 율곡이라는 대유학자를 길러낸 어머니, 그렇기에 5만원 짜리 지폐에도 그 인자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는 신사임당. 사임당이라는 당호도 태교에 온 정성을 다 했다는 주나라 문왕의 어머니 태임을 본받겠다고 하여 사임당(申師任堂) 아닌가? 그런데 위 글은 무엇인가? 우리가 알고 있는 신사임당은 가공된 이미지의 신사임당이란 말인가?

그렇다. 신 작가는 우리가 현모양처라는 틀 속에 가둬둔 신사임당 본연의 여성을 살려주고 싶었다. 사실 신사임당은 ‘현모’는 몰라도 ‘양처’와는 거리가 있을 수 있다. 그녀 자신이 뛰어난 예술가임에 반하여 남편 이원수는 늘그막까지 과거 급제도 못하고 가족을 제대로 부양도 하지 못한 못난 가장이다. 신사임당은 결혼 후에도 셋째 율곡이 6살 될 때까지는 계속 강릉 친정에 머물렀고, 이원수는 어쩌다 한 번 강릉으로 가족들을 만나러 왔을 뿐이다.

물론 남귀여가혼(男歸女家婚)이라고 그 당시 결혼 풍속도 있었겠지만, 남편과의 사이가 안 좋았던 점도 있었을 것이다. 아니 사이가 안 좋았다기보다는 좀 더 정확히 말하면 능력이 뛰어난 아내에 대한 열등감이 작용했다고 할 거다. 그러니 이원수는 서울에서 자기보다 못한 여자 권씨에게 끌려 권씨와 새살림도 차렸고, 신사임당이 세상을 떴을 때에는, 신사임당의 부탁에도 불구하고 곧바로 권씨를 안방마님으로 들어앉혔다.

그렇다면 어떻게 신사임당이 현모양처의 대명사가 되었을까? 조선 후기의 성리학자들은 율곡같은 대유학자를 낳은 어머니이면 당연히 훌륭한 어머니였을 거라고 봤을 것이다. 이런 생각을 반영하여 우암 송시열이 신사임당을 현모양처라는 이미지로 덧칠을 한 것이다. 송시열로서는 노론의 태두(泰頭)격인 이율곡을 우상화하기 위해서는 신사임당에게도 가면을 씌울 필요가 있었을 것이다.

소설은 현대의 신인선과 500년 전의 신인선이-신사임당의 이름이 ‘인선’이라고 한다-모니터상으로 서로 대화를 하면서 이야기를 풀어나가는 구조다. 단순한 구조이기는 하지만, 가면 속의 참 신사임당의 모습을 보는 재미와 이를 이끌어내는 현대의 신인선의 이야기가 작품에 몰입할 수 있게 한다. 신아연 작가는 처음 이들을 어떻게 만나게 했을까? 현대의 신인선은 글을 쓰다가 컴퓨터 앞에서 깜빡 잠이 든다. 그리고 잠시 후 깨어 계속 글을 쓰려다가 모니터에 자기가 쓰지 않은 글이 이어져 있음을 발견한다. 500년 전의 신인선이 500년 후의 신인선에게 나타나 모니터에 자기 하소연의 글을 쓰면서 서로가 감정을 나누기 시작하는 것이다.

500년 후의 신인선은 사실 신아연 작가 자신이다. 신 작가는 가면 속의 신사임당이 자신과 닮은 점이 많은 것을 발견하고 신사임당에게 끌렸고, 그러다보니 가면 속에 갇혀있는 신사임당의 진실한 모습을 보여주어야겠다는 생각에 이 소설을 쓰게 된 모양이다. 그러면서 자연스럽게 자신의 자신의 가정 이야기며 이혼 이야기도 진솔하게 토해낸다. 그래서 신 작가는 이 소설을 자전적이며 고백적인 소설이라고 얘기한다.

이렇게 남편과 사이가 소원하였던 신사임당은 그럼에도 남편 하나만 바라보고 살았을까? 더구나 예술가적인 감성이 풍부한 여성이? 물론 삼종지도(三從之道)를 외치는 조선 양반사회의 굴레에서 신사임당이 남편 외의 남자를 만나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신 작가는 소설에서 딱 한 번 신사임당의 외도를 그린다.

그가 나를 향해, 내가 그를 향해 그렇게 오랫동안 달려왔던 마음이 정점에 다다르는 순간, 그것은 정염이 되어 불타올랐어. 그가 내 귓바퀴에 뜨거운 숨을 몰아넣으며 당신은 왜 이제야 내 앞에 나타났냐고, 당신은 도대체 어디에 있었냐며 안타까운 속내를 쥐어짜면서 동시에 내 위에서 부르르 몸을 떨었어. 온 세상이 다 손가락질 한다 해도 후회하지 않을, 세상을 다 준대도 바꾸지 않을 내 생에 단 한 번, 단 한 사람을 그렇게 가질 수 있었던 거야.

신사임당을 조선의 정숙한 여인으로 믿고 싶어하는 사람들이 보면 열을 낼 수도 있겠지만, 소설은 어디까지나 소설일 뿐이니, 소설 그대로 받아들여야 한다. 신사임당의 은밀한 가정사는 역사에 드러나지 않을 수 있는 것이고, 그러한 점에 대해 작가는 얼마든지 상상력을 발휘할 수 있는 것 아닐까? 신 작가는 이 점에서 이렇게 말한다.

나는 ‘그 여자’를 숨 쉬고, 밥 먹고, 배설하는 보통 사람으로서는 물론, 자기 인정 욕구에 끄달리고, 과시하고 싶고, 남들처럼 잘 먹고 잘 살고 싶고, 여자로서, 아내로서 사랑받고 싶고, 남편이 출세하고 자식이 성공하길 간절히 바라는 현실적, 속세적 욕망 덩어리이자 성취욕 많은, 무엇보다 다정다감한, 그러나 누구의 인생이나 그렇듯 자신의 바람과는 상관없이 운명에 휩쓸리며 좌절하고, 그 가운데서도 자신이 할 수 있는 작은 선택들로 자신의 인생을 책임지고 재미를 찾고 의미 부여를 하며 궁극에는 자기 인생을 아름답게 마무리해 가는 일생 중에 외도가 삶의 한 무늬로, 혹은 얼룩이라면 얼룩으로 자리잡도록 하려고 했다는 것을 말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현모양처 속에 박제되어 있던 신사임당이 오늘날 예술혼이 살아있는 한 여성으로 살아나서 우리에게 토해내는 이야기에 흥미가 느껴지지 않는가? 그렇다면 당장 <사임당의 비밀편지>를 받아보시라. 그리하여 우리가 몰랐던 신사임당의 여성으로서의 매력을 느껴보시기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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