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릉 가볼만한 곳②] 이영애 ‘신사임당 빛의 일기’ 오죽헌서 찾아보니
[아시아엔=박명윤 <아시아엔> ‘보건영양’ 논설위원] 강릉시 죽헌동에 있는 목조건물 오죽헌(烏竹軒)은 우리나라 주택건축 중에서 가장 오래된 건물에 속한다. 건립 연대는 명확하지 않지만 단종(端宗) 때 병조참판과 대사헌을 지낸 최응현(崔應賢, 1428-1507)의 고택이라고 하니 15세기 후반에 지어졌을 것으로 추정된다.
1963년 1월 21일 보물 제165호로 지정된 오죽헌은 정면 3칸, 측면 2칸으로 4칸 크기의 대청과 1칸 반 크기의 온돌방, 그리고 반 칸 너비의 툇마루로 된 단순한 평면 건물이다. 1975년 오죽헌정화사업으로 문성사(文成祠)와 기념관이 건립되면서 안채와 곳간 및 사주문이 해체되었다. 1995년 오죽헌 뒤의 고택이 다시 복원되어 현재와 같은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오죽헌은 조선 사대부(士大夫) 주택의 별당(別堂) 모습을 살필 수 있는 곳이다.
오죽헌은 신사임당(申師任堂, 1504-1551)의 자녀 4남3녀 중 3남인 율곡(栗谷) 이이(李珥, 1536-1584)가 태어난 집이다. 조선 중기 강릉 출신의 여류 예술가로 시서화(詩書畵)에 모두 뛰어난 신사임당의 이름은 신인선(申仁宣)이며, 사임당은 당호(堂號)다.
외가인 강릉 북평촌에서 태어나 자랐으며, 19세에 이원수(李元秀)와 결혼해 마흔여덟에 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신사임당이 교양과 학문을 갖춘 예술인으로 성장한 배경에는 천부적인 재능과 더불어 좋은 환경이 있었다. 현철賢哲한 어머니의 훈조를 받을 수 있는 환경과 그녀의 예술성을 북돋아 준 남편이 있었다. 1868년 강릉부사로 부임한 윤종의(尹宗儀)는 신사임당의 글씨를 후세에 남기고자 판각하여 오죽헌에 보관하면서 발문을 적었다.
강릉시는 학문과 효성, 덕행을 겸비하여 한국 여성의 표상(表象)이 되는 신사임당의 얼을 높이 기리고, 후손들에게 널리 선양하고자 ‘신사임당상’(申師任堂賞)을 1975년 제정하여 강원도 출신 여성에게 수여하고 있다. 신사임당상 심사위원장은 강원도 정무 부지사가 맡으며, 위원 15명은 도지사가 위촉한다.
신사임당의 자녀들 중 셋째 아들 이이(李珥)가 그의 훈도와 감화를 제일 많이 받았다. 신사임당은 검은 용이 바다에서 집으로 날아 들어오는 태몽(胎夢)을 꾼 연유로 율곡의 어릴 적 이름을 현룡(玄龍)이라 하였다. 산실은 몽룡실(夢龍室)이라 하여 지금도 보존되고 있다.
대학자 이이는 신사임당의 행장기를 저술하면서 예술적 재능, 우아한 천품, 순효한 성품 등을 밝히고 있다.
신사임당이 죽은 뒤 삶과 죽음의 문제에 직면하여 고뇌하던 율곡은 19세 되던 해 봄 금강산에 들어가 불교를 공부하였다. 성리학(性理學)을 지배 이념으로 삼았던 조선의 역사에서 입산 경력을 가진 사대부는 김시습과 이이 두 사람뿐이다. 율곡은 <성학집요>, <격몽요결>, <김시습전>, <학교모범> 등을 저술했다.
조선의 성리학이 눈부시게 꽃을 피우며 전성기를 이룬 중심에는 退溪(퇴계) 이황(李滉, 1501-1570)과 율곡(栗谷) 이이(李珥, 1536-1584)가 있다. 퇴계가 새로운 시대사상인 성리학을 완벽하게 이해했다면, 율곡은 퇴계가 이룩한 학문적 토대 위에서 성리학을 토착화했다. 성리학은 조선사회의 정치, 경제, 문화 등에서 틀을 잡아 주었으며, 중국과 일본에도 영향을 끼쳤다.
율곡은 시무육조(時務六條), 즉 서둘러 해야 할 여섯 가지 일을 글로 써서 선조(宣祖)에게 바쳤다. 그는 “백성은 먹는 것을 하늘로 삼으니 먹는 것이 우선되고 나서야 교육도 가능하다”고 하여 먼저 민생의 평안을 주장하였다.
또한 왜구(倭寇)의 침입에 대비하여 10만 양병(養兵)을 주장하였으나 그를 시기하던 대신들이 반대하여 이루어지지 못했고, 결국 선조 25년 일어난 임진왜란(壬辰倭亂, 1592-1598)에 대비하지 못했다.
율곡은 동인(東人)과 서인(西人)으로 나뉘어 있는 조정에서 어느 편에도 서지 않았으나 동인이나 서인이나 율곡을 몰아세우기는 마찬가지였다. 율곡은 48세 되던 해에 어수선한 정계를 떠났으며, 이듬해 1584년(선조 17년) 정월 별세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