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종필 칼럼] 윤석열-기시다 한일 셔틀외교 복원에 즈음하여

윤석열 대통령과 기시다 일본 총리가 2022년 11월 13일(현지시간) 캄보디아 프놈펜에서 열린 한일 정상회담에서 악수하고 있다. <연합>


철천지원수 프랑스-독일 관계 정상화, 어떻게 가능했나?

한일 정상의 셔틀 외교 복원을 보면서 14년 전 베를린에서 마주쳤던 조형물이 생각났다. 철천지원수나 다름없었던 프랑스와 독일(서독)의 지도자 드골 대통령과 아데나워 총리가 두 손을 맞잡은 조형물인데, 나도 자연스레 두 손을 포개보았다.

19세기 중후반 이후만 해도 보불전쟁과 1, 2차 세계대전으로 수많은 인명, 재산피해를 주고받고, 땅따먹기와 문화재 약탈을 반복했던 두 나라이기에 보복이 또 보복을 낳는 악순환을 반복하기에 딱 좋은 조건에 놓여 있었다. 그러나 양국 모두 위대한 지도자가 있었기에 국민을 설득하여 실기하지 않고 관계 정상화를 이뤄낼 수 있었다.

드골 전 프랑스대통령 <사진=위키피디아>

드골은 1940년 프랑스의 치욕적 대독 항복 후 영국 땅에서 ‘자유 프랑스’ 망명정부의 지도자가 된 인물이다. 흔히 민족해방 운동 출신 지도자들이 그렇듯 드골의 독일에 대한 적대감은 누구 못지않았다. 어지간하면 자신의 브랜드인 ‘반독(反獨)’만 내세워도 권력 유지에는 지장이 없었을 것으로 짐작이 된다.

에펠탑의 승강기 케이블을 절단함으로써 “히틀러에게 파리는 내줬지만, 에펠탑은 내주지 않았다”며 겨우 정신승리나마 챙긴 프랑스로선 독일과의 화해가 내키지 않았을 것이다. 오늘날도 ‘콧대’ 하면 프랑스요, 그중에서도 드골 아닌가.

드골과 아데나워는 15차례나 만나 1963년 화해협력조약(엘리제조약)을 맺었다. 두 지도자는 교차방문 때 상호의전 원칙을 깨고 공항에 직접 영접을 나갈 정도로 통 큰 면모를 보였다. 이런 파격에 양국의 국민이 놀라고, 세계가 놀랐음은 물론이다. “친구에게 잘해줘라. 적에겐 더 잘해줘라”는 격언을 실천한 것이다. 아무리 드골과 아데나워라 하더라도 이런 파격은 정치생명을 건 모험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큰 인물은 역시 큰 인물이었고, 그들은 그것을 해냈다.

콘라드 아데나워 독일 총리

지도자들의 통 큰 결단에 의한 관계 정상화는 드골에게 ‘프랑스의 영광’, 아데나워에게 ‘라인강의 기적’을 선사했으며, 그 업적의 수혜자는 결국 양국 국민들이었다. 만일 두 나라가 과거에 얽매여 적대관계를 끊어내지 못했다면 오늘날 유럽연합(EU)으로 귀결된 유럽 통합 작업은 시작도 하지 못했을 것이라는 분석이 지배적이다.

성격과 스타일이 판이한 두 지도자가 달라도 너무 다른 국민성과 적대의 역사를 뛰어넘어 난제를 해결할 수 있었던 것은 오로지 미래를 위해 과거를 접었기 때문이다. 사람이든 국가든 아픈 과거를 잊지 못하는 법. 그러나 과거를 잊지 않는 것과 과거에 붙잡히는 것은 천양지차이다.

여기까지 말하면 사람들은 한일관계와 프랑스-독일관계의 차이, 역사인식에 있어서 독일과 일본의 현격한 차이, 프랑스의 대미 견제심리와 영국에 대한 불신(미국의 유럽 에이전트라는 의심) 등 수많은 반대의 근거를 들이밀 것이다.

그렇다 하더라도 1965년 박정희의 정권을 건 한일 국교정상화 결단이 한강의 기적을 만들었다는 사실은 부정하지 못할 것이다. 또한 현 거대 야당의 중시조격인 김대중의 정치생명을 건 한일수교 조건부 찬성을 비난하지 못할 것이다. 당시 ‘친일 매국노’라 비난받던 박정희와 ‘사쿠라’ 오명을 뒤집어쓴 김대중에게 지금 돌멩이를 던지는 사람은 없지 않은가.

미국 닉슨 전 대통령은 명저 <세계를 움직인 거인들(Leaders)>에서 “사람들을 설득하는 데는 이성을 사용하고, 움직이는 데는 감성을 사용하게 되므로 지도자는 사람들을 설득하고 움직일 수 있는 이성과 감성을 겸비해야 한다”고 설파했다. 닉슨이 저서에서 높게 평가한 드골과 아데나워는 냉철한 이성과 뜨거운 감성의 지도자였다. 이 두 지도자는 국민감정에 편승하지 않고, 미래에 대한 혜안과 통찰력으로 국민을 설득하고 움직였기에 큰 업적을 남길 수 있었다.

1963년 당시 샤를 드골(왼쪽) 프랑스 대통령과 콘라트 아데나워 독일 수상이 손을 맞잡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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