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종필 칼럼] 국군의날 ‘한미동맹’을 다시 생각한다

“이승만을 아무리 부정적으로 보는 사람이라도 한미동맹만은 그의 혜안과 뚝심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70주년 한미동맹은 이승만 대통령의 지략과 배짱 덕분

10월 1일은 한미동맹 체결 70주년이다. 한미동맹 70주년은 정전협정 70주년(7월 27일)과 한 묶음이나 마찬가지다. 한국전쟁 장기화에 부담을 느낀 미국이 빨리 전쟁을 끝내고 싶었던 데 반해 이승만 대통령은 △북진통일 기회 무산 △향후 안전보장 장치 부재를 명분 삼아 정전협정을 결사반대하면서 정전협정의 전제조건으로 한미상호방위협정, 즉 한미군사동맹을 강력하게 요구했다.

이승만의 통찰력이 빛나는 대목이다. 국제공산 세력은 정전협정을 맺어 일단 미군을 철수시킨 뒤 차후 적절한 기회를 틈타 한반도 공산화를 이룬다는 속셈이었는데, 이승만은 이를 간파한 것. 이승만은 이 과정에서 반공포로 석방이라는 창의적 초강수를 두면서 미국에 죽기 살기로 매달려 군사동맹을 쟁취해냈다. 거저 얻어진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당시만 해도 한국은 미국에게 하찮은 천덕꾸러기에 불과했다. 미국은 소련과 중공이라는 거대 공산세력의 태평양 진출 방어는 불침항모 일본을 방파제 삼으면 된다는 판단이었다.

국제사회에서 ‘존재감 제로’에 가까웠던 약소국 한국이 세계최강 미국을 상대로 ‘갑’의 입장에서 되레 큰소리친 초현실적 상황은 하루빨리 전쟁에서 손 떼고 싶은 미국의 심리를 꿰뚫어 본 이승만의 지략과 배짱 덕분이었다.

결국 미국 대통령 아이젠하워는 정전을 위해 이승만에게 특사를 보내 한미상호방위조약 체결을 약속했다. 이렇게 하여 1953년 7월 27일 정전협정이 이뤄졌고, 10월 1일 한미상호방위협정이 체결되었다.

이 조약이 한국 국회에서 정식 비준, 발효된 것은 그로부터 1년여 후의 일이다. 한국 국회가 ‘어느 일방의 통보 후 1년 뒤 자동 종료’ 조항을 빼달라고 미국에 졸랐기 때문이다. 이런 한국의 요구는 성취되지 않았지만, 우리에게는 이 협정이 영구히 필요한 것이라는 초당파적 인식이 존재했다는 반증이다. 우리 역사상 최초이자 유일한 군사동맹은 이런 과정을 거쳐 이뤄졌다.

조약 체결 후 이승만은 “우리 후손들이 앞으로 여러 세대에 걸쳐 이 조약으로 인해 많은 혜택을 받게 될 것이며, 이 조약은 앞으로 우리를 번영케 할 것이다”라고 말했는데, 이는 그대로 현실이 되었다.

만일 한미동맹이 없었다면 지정학적으로 대륙의 새끼손가락과 같은 한반도는 공산주의권에 편입되었을 개연성이 높다. 한미동맹은 우리에게 안보와 경제라는 최소한의 생존의 문제를 보장해주는 우산이 되었다. 동맹을 한사코 회피하다 마지못해 체결한 미국에게 한미동맹은 자유민주주의 자본주의 체제의 성공 사례를 보여주는 훌륭한 홍보물 역할을 하고 있다.

오늘날 한반도만큼 극명한 체제 비교의 전시장 역할을 하는 사례는 존재하지 않는다. 더 나아가 한미동맹은 인류역사상 가장 성공한 동맹의 하나로 인정받고 있다. 비유컨대 안 낳으려다 낳은 자식이 효자 노릇 톡톡히 하는 격이다.

지난 4월 윤석열 대통령과 바이든 미국 대통령은 한미동맹 70주년 공동성명(일명 워싱턴선언)을 통해 한미동맹을 ‘가치동맹의 기반 위에 안보, 경제, 기술, 문화, 정보동맹’으로 한 차원 높였다. 윤 대통령은 귀국 후 “한미동맹이 없는 대한민국은 상상할 수 없다”며 “한미동맹은 미래에 온전히 넘겨야 할 값진 유산이다”라고 말했다.

오늘날 대한민국이 누리는 자유와 평화와 번영은 한미동맹을 빼고 설명할 수 없다. 윤 대통령의 말은 이승만 대통령이 초석을 놓은 자유민주주의 대한민국의 정통성과 정체성을 내외 도전에 맞서 확고하게 지키고 발전시키겠다는 국가지도자로서의 단호한 의지의 표현이라고 해석된다.

이승만을 아무리 부정적으로 보는 사람이라도 한미동맹만은 그의 혜안과 뚝심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2 comments

  1. 이승만 대통령을 폄하하는 사랑은 자기 애비를 부정하는 사람보다 더 한심한 망나니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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