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우근 칼럼] 십계명과 십자가

십계명 

“율법의 행위로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나니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라.”(로마서 3:20). 사도바울은 죄를 깨닫게 하는 것이 율법의 기능이라고 가르친다. 그는 율법을 파이다고고스(παιδαγωγός)에 비유했다.

파이다고고스는 고대 그리스 로마시대의 부유한 가정에서 어린 자녀들을 지도 감독하도록 고용한 개인교사이자 후견인인데, 개역한글판 성서에서는 몽학선생(蒙學先生)이라고 번역되었다.

​아이들은 개인교사의 지도를 의무적으로 따라야 했고, 16세가 되어서야 교사의 감독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바울은 율법의 감독과 지도를 받아야 하는 인간의 상황을 파이다고고스에 비유한 것이다.

유대인들은 율법으로 구원을 얻게 된다고 믿었지만, 바울은 율법의 저주 아래 있던 죄인이 그리스도를 만나 온전한 믿음에 이르러 율법의 속박을 벗어나게 된다고 믿었다.

​바울은 이렇게 증언한다. “믿음이 온 후로는 우리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의 아들이 되었으니 이제는 율법 아래에 있지 아니하도다…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갈라디아서 3:23~26, 로마서 1;17) 마르틴 루터를 일깨운 말씀이다.

율법의 정죄 앞에서 절망하고 하나님의 두려운 심판 앞에 서게 된 죄인이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의로움을 얻어 구원의 은혜에 들어간다는 칭의(稱義, iustificatio)교리다.

​그렇지만 바울은 율법 자체를 부정한 것이 아니다. 믿음으로 의로움을 얻게 된 죄인은 이제 율법 아래에 있지 않고 율법에서 자유를 얻었지만, 율법을 버리거나 율법을 떠난 것이 아니다. 오히려 율법으로 죄를 억제할 수 있게 된 것이다.

마르틴 루터는 율법이 1차적으로는 죄를 깨닫게 하지만, 2차적으로는 죄를 억제할 수 있게 한다고 설명했다. 장 칼뱅은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율법이 신앙인을 성화(聖化)의 삶으로 인도한다’고 믿었다. 거듭난 의인에게도 율법은 삶의 규범(regula vivendi)이 된다는 것이다. 이것이 율법의 제3차적 기능이다.

​”내가 나의 법을 그들의 속에 두며 그들의 마음에 기록하여,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내 백성이 될 것이라.”(예레미야 31:33, 히브리서 10:16) 선지자 예레미야가 선포한 하나님의 새 계명이다.

모세의 돌판에 새겨져 인간의 자유를 억압하고 하나님의 두려운 심판 앞에 세우는 정죄(定罪)의 도구였던 십계명은 이제 인간의 마음에 새겨지고 사람의 생각에 기록된 새 계명이 된 것이다. 하나님께서 인간의 악행을 용서하시고 그 죄를 다시는 기억하지 않으시겠다는 장엄한 자유의 선언이다. ‘율법은 하나님 앞에서 자유와 기쁨을 누리게 하는 은혜의 도구’라는 것이 칼뱅의 율법 해석이다.

십계명과 십자가

구약의 십계명은 신약의 십자가와 함께 신앙의 길을 밝히는 두 개의 밝은 등대로 우뚝 서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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