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우근 칼럼] ‘적의 적’은 친구인가?···인도 ‘타고르’와 ‘찬드라 보스’의 경우

인도국민군을 사열하고 있는 찬드라 보스

영국이 식민지 인도의 수도를 뉴델리로 옮길 때까지 콜카타(옛 캘커타)는 오랫동안 인도의 수도였고, 역사 문화 정치경제의 중심지였다. 콜카타 공항의 공식명칭이 네타지 수바스 찬드라 보스 국제공항(Netaji Subhash Chandra Bose International Airport)이다. 인도 독립운동가의 이름을 붙인 이 공항 안에는 찬드라 보스의 대형 초상화가 걸려있다.

찬드라 보스는 인도의 국부(國父)인 마하트마 간디, 초대총리 자와할랄 네루, 인도 헌법 제정에 중추적 역할을 한 빔라오 람지 암베드카르와 함께 인도인들의 존경을 받는 인물이다.

간디(왼쪽) 얘기를 듣고 있는 찬드라 보스(오른쪽)

​간디의 비폭력투쟁을 반대한 보스는 영국의 적대국이자 나치독일의 동맹국인 일본의 힘을 빌려 무력으로 독립을 쟁취하고자 했다. 그는 전쟁 중에 히틀러의 도움으로 일본에 건너간다. 도조 히데키가 도쿄에서 개최한 대동아회의에 참석한 그는 “신자유 아시아 창건에 대한 일본의 사명이 완수되기를 바란다”고 연설했다.

싱가포르에서 ‘자유 인도 임시정부’를 세우고 45000명의 인도국민군을 조직한 보스는 일본군과 함께 반영(反英) 무장투쟁을 이끌다가 임팔전투에서 참패하고 결국 독일․일본의 패전으로 인도 해방을 맞았다.

​ 독일 일본과 손잡은 보스의 독립투쟁노선은 많은 비판을 받는다. 영국의 제국주의를 반대한다는 것이 독일의 나치즘이나 일본의 군국주의를 옹호하는 이유가 될 수는 없어서다.

물론 현실의 적(敵)인 영국을 물리치기 위해 그 적대국인 독일 일본과 손을 잡을 수도 있었겠지만, 대동아공영권의 맹주가 되려는 일본의 또 다른 제국주의적 야욕을 용인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미래의 독립 인도공화국이 나치즘이나 군국주의와 운명을 같이 해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보스는 일본이 패전한 뒤에도 일본에 대한 지지를 철회하지 않았다.​

타고르와 동아일보에 실린 ‘동방의 등촉’ 시

일본을 사랑한 또 한 사람의 인도인이 있다. 아시아인 최초로 노벨문학상을 받은 라빈드라나트 타고르 시인이다. 그는 일본이 러일전쟁에서 승리하자 “아시아 민족주의가 러시아의 서양 제국주의를 물리쳤다”고 찬사를 보냈다.

조선을 ‘동방의 등불’이라고 찬양한 타고르는 일본 하이쿠(俳句)의 단순성과 명징성에도 깊이 매료되었고, 일본문화를 ‘동양의 이상(理想)’으로 높이 평가했다. 그는 일본 전통미술의 부흥을 이끈 오카쿠라 덴신(岡倉天心)을 콜카타의 자택으로 초대해 함께 지내면서 일본의 미술과 다도(茶道)를 배우기도 했다.

​ 그렇지만 일본 정권이 점차 군국주의 색채를 드러내자, 이를 불길하게 지켜본 타고르는 일본의 야심을 경고하기 시작한다. “일본은 물질적으로는 진보했지만 정신적으로는 퇴보하고 있다… 굶주린 그들은 조선을 잠식하고 중국을 물어뜯으면서, 인도에도 야심을 품고 있는 듯하다.”

1916년 일본을 방문한 타고르는 일본인들에게 깊은 우려의 예언을 던졌다. “일본이 다른 민족에 입힌 상처로 일본 스스로 고통을 당하게 될지 모르며, 일본이 주변에 뿌린 적의(敵意)의 씨앗은 일본에 대한 경계의 장벽으로 자라날 것이다.”

타고르의 예언은 일본의 조선독립운동 탄압과 난징대학살 그리고 태평양전쟁으로 무서운 현실이 되어갔다. 그러나 식민제국주의 일본의 끔찍한 만행에도 불구하고 찬드라 보스는 친일 행보를 멈추지 않았다.

​ ‘적의 적’은 친구인가? 찬드라 보스에게 적(영국)의 적(일본)은 친구였다. 그렇지만 적의 적이라고 해서 자동적으로 친구가 되는 것은 아니다. 친구는 그 스스로 친구의 자질을 지녀야한다.
미국과 일본이 밉다는 이유로 북한 중국 러시아를 사랑할 수 없고, 북중러가 밉다고 해서 미일을 무턱대고 사랑해서도 안 될 일이다.

자유 민주 공화라는 가치를 우리와 공유하고 있기 때문에 미일과 방어협력체제를 유지하는 것이다. 미일의 자유 민주 공화체제가 불완전하거나 왜곡됐을 개연성이 있다. 그러나 그것은 우리도 마찬가지다.

자유 민주 공화는 현재의 가치이자 또한 미래의 가치다. 그 미래를 향해 함께 나아가기에 친구인 것이고, 그 미래를 위협하기에 적인 것이다.

“원수를 사랑할 뿐 아니라, 친구를 증오할 수 있어야 한다.” 니체가 제시한 지성의 조건이다. “원수를 사랑하라”는 예수의 가르침을 비틀어 쓴 니체의 의도는 ‘원수 사랑’에 있지 않고 ‘친구 증오’에 있다.

찬드라 보스는 적의 적인 친구 일본을 미워할 수 없었지만, 타고르는 친구인 일본을 미워할 수 있었다. 아니, 군국주의로 타락한 그 친구를 증오했다. 이것이 지성의 올바른 자세다.

​ 누구든, 어떤 이유로든 미국 일본을 미워할 수 있다. 그렇지만 그것이 미일에 적대적인 북중러를 친구로 삼아야 할 이유가 되지는 않는다. 적의 적이 곧 친구인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그래서일까, 반미를 외치면서 북중러를 두둔하는 사람들이 중국이나 러시아가 아니라 미국에 자녀를 유학 보내고 미국에 집을 마련하는 아리송한 행태의 이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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