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우근 칼럼] ‘침묵’은 언어의 고향

“입에서 나오는 말은 소통의 도구가 되고, 가슴에서 나오는 말은 공감(共感)의 언어가 되며, 머리에서 나오는 말은 이성과 지식의 전달통로가 된다. 그러나 마음에서 솟아나는 말은 영성과 지혜의 징검다리를 놓는다.”(본문 중에서)

입에서 나오는 말이 있고, 가슴에서 나오는 말이 있다. 머리에서 나오는 말도 있고, 마음에서 솟아나는 말도 있다. 입에서 나오는 말은 소통의 도구가 되고, 가슴에서 나오는 말은 공감(共感)의 언어가 되며, 머리에서 나오는 말은 이성과 지식의 전달통로가 된다.

그러나 마음에서 솟아나는 말은 영성과 지혜의 징검다리를 놓는다. 입과 가슴과 머리에서 나오는 말은 모두 입술을 통해 나오지만, 마음에서 솟아나는 말은 입술이 아니라 오히려 ‘침묵의 터널’을 통해 다가온다.

​침묵은 소리가 비어있는 허공처럼 보이지만, 실은 충만하게 차 있는 언어다. 비어있는 공간은 무언가로 채워야 하는 빈자리가 아니다. 그 속에서 새로운 것을 끄집어내야 하는 신비로운 공간이다.

보이지 않고 만져지지도 않는 공기 속에서 우리는 숨을 쉬고 살아간다. 아무것도 없는 듯한 공기 속에 산소가 들어있기 때문이다.

침묵이 그렇다. 침묵은 무슨 소리로 채워 넣어야 하는 빈자리가 아니다. 입을 닫고 귀를 열어, 신(神)의 여리고 부드러운 음성(열왕기상 19장 12절)을 듣는 은혜로운 자리다.

​ <침묵의 세계>(The World of Silence)라는 책을 쓴 의사 막스 피카르트(Max Picard)는 “침묵으로 숙성되지 않은 언어는 시끄러운 소음일 뿐”이라고 했다. 언어 이전에 침묵이 있다. 침묵은 언어의 고향이다.

빈 공간을 만나면 우리는 무언가를 자꾸 채워 넣으려고 하지만, 그것은 ‘채우는 것’이 아니라 이미 거기 있는 것을 ‘없애는 일’이다. 채워넣기 전에 꺼내야 한다. 눈에 보이지 않는 것, 손으로 만질 수 없는 것을 발견해야 한다. 그것이 침묵이다.

​시끄럽고 혼잡한 세상에서 돌아와 고요한 방 안에 홀로 앉아 있으면 들리지 않던 소리, 듣지 못한 음성, 들어야 할 말들이 마음속을 울린다. 침묵의 명상이다. 그 침묵이 어찌 빈 공간이겠는가? 충만한 은총의 공간일 것이다.

보이지 않고 소리도 없고 말도 없는 침묵의 세계, 거기는 언어의 제한이 없고 은총의 제한도 없는 영원의 세계다. 그 영원의 세계에서 신을 만난다. 신 앞에 서면 어떤 말도 필요 없다. 입을 닫고 귀를 열어 영혼을 울리는 신의 음성을 들어야 한다.

​갈멜산에서 바알 선지자들은 큰 소리로 부르짖고 칼과 창으로 자기 몸을 찔러 상처까지 냈지만, 엘리야는 홀로 신 야훼의 응답을 간구하며 기다렸다.

야훼 신은 바알 선지자 무리의 떠들썩한 목소리가 아니라 엘리야의 고독한 기다림에 응답했다. 그 후 엘리야는 꿇어 엎드려 얼굴을 무릎 사이에 넣고 침묵했다(열왕기상 18장 28~42절).

신은 영적(靈的) 존재다(요한복음 4장 24절). 그 앞에서 온 땅은 육(肉)의 입술을 닫고 잠잠해야 한다(하박국 2장 20절). 입술을 열기 전에 귀를 열어야 한다. 그것이 침묵의 세계다. 그 침묵 속에서 신의 음성이 들려온다.

“들을 귀 있는 자여, 들어라.”(마가복음 4장 9절) 예수의 말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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