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우근 칼럼] 순교의 빛깔···적색순교·백색순교·녹색순교 그리고

최초의 순교자 스데반 

[아시아엔=이우근 변호사, 숙명여대 석좌교수] 6세기의 교황 그레고리우스 1세는 크리스천의 순교를 적색순교, 백색순교, 녹색순교로 구분했다. 주후 313년 기독교 공인 이전의 박해시대에 붉은 피를 흘리며 죽어간 순교자들을 적색순교자라고 한다.

순교라는 단어의 어원은 헬라어로 마르티리온(μάρτυριον) 라틴어로 마르티리움(martyrium)인데, 증언·증거·증인이라는 뜻이다. 이 말이 그리스도의 복음을 증언하다가 피 흘리며 죽는 적색순교자를 의미하게 되었다. 스데반이 그 최초의 적색순교자였다.

​2세기의 교부 테르툴리아누스(Tertulianus)는 <호교론>(Apologeticus)이라는 글에서 ‘순교자의 피는 그리스도교의 씨앗’이라고 정의했다.

2000년 5월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로마 콜로세움에서 12,692명의 크리스천을 ‘신앙의 증인’으로 선포했다. 나치에 희생된 본회퍼 목사, 막시밀리안 콜베 신부, 에디트 슈타인 수녀, 그리고 엘살바도르 군사 독재정권에 의해 살해된 오스카 로메로 대주교 등이 포함된 이 순교의 증인들은 가톨릭은 물론 개신교.정교회.성공회 등 모든 교파를 초월한 적색순교자들이다.

​콘스탄티누스 황제의 밀라노 칙령으로 신앙의 자유를 얻은 크리스천들은 더 이상 적색순교의 붉은 피를 흘리지 않아도 되었다.

그렇지만 사막의 은둔자들과 수도원의 수도사들은 세상으로부터 물러나 ‘청빈·정결·순명’의 철저한 금욕생활로 세상의 조롱과 박해를 받는 고통의 삶을 살았다. 이것을 백색순교라고 부른다. 세상을 등진 고독한 삶을 순교로 본 것이다.

​살아남아 순교의 영성으로 고통과 박해를 견디지만, 백색순교처럼 세상을 등지지 않고 적극적으로 세상에 나아가는 삶이 바로 녹색순교다. 교회로부터 사례금을 받지 않고 스스로 천막을 짜며 생활비를 벌어 쓰면서 평생을 선교에 바친 사도바울은 ‘매일 죽는 사람’ 곧 녹색순교자였다. “형제들이여, 내가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서 가진 바 나의 자랑을 두고 단언하노니, 나는 날마다 죽노라.”(고린도전서 15:31)

이처럼 사막이나 수도원에 은둔하지 않고 적극적으로 세상 속에 들어가 그리스도의 복음을 온몸으로 실천하며 감옥에 갇히고 죽을 고비를 넘나드는 삶을 녹색순교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여기 또 다른 빛깔의 순교, 아니 아무 빛깔도 없는 ‘무색(無色)의 순교’가 있다. 고난을 무릅쓰고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따라 이름 없이 빛도 없이 세상을 살아가는 무명(無名)의 순교자들이다. 다른 사람들이 기억하지 못하고 역사책에 기록되지도 않지만, 오직 하나님이 기억하시고 생명책에 기록되는 참된 순교의 삶이다.

그리스도를 온 몸으로 증거하면서도 남이 기억해주거나 기록되기를 바라지 않는 삶, 아무 빛깔도 없지만 지극히 아름다운 순교의 삶이다. 그 무색, 무명의 순교자로 살아갈 수 있기를 소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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