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우근 칼럼] ‘부활’은 인간 실존의 문제

‘그리스도의 변용變容’, 라파엘로

“선한 일을 행한 자는 생명의 부활로, 악한 일을 행한 자는 심판의 부활로 나오리라.”(요한복음 5장 29절)

부활의 첫 열매 예수님의 말씀이다. 부활은 예수님에게만 특유(特有)한 사건이 아니다. 모든 인간에게 공통된 보편적 사건이다.

선한 사람도 악한 사람도 모두 부활한다. “부활은 ‘종교적 교리나 신조(信條)의 문제’가 아니라 ‘인간 실존의 문제'”라는 것이 예수님의 가르침이다.

​실존은 ‘현실의 존재’만을 가리키지 않는다. 실존(existence)은 ‘밖에(ex) 있다(ist)’는 뜻이다. 현존재의 밖, 삶과 죽음의 바깥, 곧 부활과 내세를 품은 의미로 새길 수 있겠다.

십자가의 고난이 하나님을 향한 예수님의 고백이었다면, 부활의 은총은 십자가를 향한 하나님의 응답이었다. 하나님은 오늘도 십자가를 지고 고난의 길을 걷는 당신의 자녀들에게 예수님에게처럼 부활의 은총으로 응답하실 것이다.

​2천년 전 십자가에서 죽은 예수를 다시 살리신 하나님은 과거의 하나님이 아니라 오늘 우리의 하나님이기 때문이다.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은 죽은 사람의 하나님이 아니라 살아 있는 사람의 하나님이시다.”(마가복음 12장 26, 27절) 예수님의 이 말씀은 현재시제(現在時制)로 되어있다.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었고, 이삭의 하나님이었고, 야곱의 하나님이었던 분이 아니라, 현재의 하나님 곧 지금 여기(hic et nunc) 우리의 하나님이라는 뜻이다.

​부활은 죽음 건너편에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지금 여기 우리의 현존재(現存在)와 더불어 있다. 사도 요한은 부활한 예수님이 호숫가에 앉아 제자들과 함께 생선을 구워 먹었다고 증언한다(요한복음 21장 10~13절).

죽었다가 부활한 신의 아들이 아직 죽지도 않은 인간들과 함께 생선을 구워먹고 앉아있다니… 매우 난해한 구절이다.

​초월자 하나님은 육체가 아니라 영(靈)이십니다(요한복음 4장 24절). 그리고 부활한 예수님의 몸 또한 시·공간의 제약을 받지 않는 초월적 존재였다.

닫힌 문을 열지 않고 방 안으로 쑥 들어갈 수 있었고(요한복음 20장 19절), 예루살렘에서 갈릴리까지 그 먼 거리를 마치 축지법 쓰듯 순식간에 왕래할 수 있었다(마태복음 28장 7∼10절). 영적 존재, 초월적 존재이기 때문이다.

​영혼은 생선 따위를 먹지 않는다. 굳이 불에 구워서 먹는 문화적 취사방법을 동원할 필요도 없다. 살과 뼈를 가진 영혼도 없거니와 못 자국과 상처의 흔적을 고스란히 지닌 영혼도 없다.

그런데 부활한 예수님의 몸에는 못과 창 자국이 뚜렷이 남아있었고 생선을 불에 구워 먹는 살과 뼈의 육체를 지녔다. 생명의 부활로 거듭난 사람은 순수한 영혼도 아니고 순수한 육체도 아닌 영적 육체(spiritual body), 영과 육이 둘이 아니라 하나인 영육불이(靈肉不二)의 전인격(全人格), 곧 하나님의 형상으로 새롭게 창조된 새 사람일 것이라 믿는다.

​인간 실존이 품은 부활의 소망을 성서는 이렇게 선포한다. “우리 주 하나님께서 그의 많으신 긍휼대로 예수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게 하심으로, 우리를 거듭나게 하사 산 소망이 있게 하셨느니라.”(베드로전서 1장 3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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