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우근 칼럼] “용서는 강자의 특성…은혜는 정의를 넘어서”

“약자(弱者)는 용서할 수 없다. 용서는 강자(强者)의 특성이다.” 마하트마 간디의 통찰이다. 그렇지만 관용은 강약(强弱)의 차이를 뛰어넘는 고결한 품성이다. 잘못을 뉘우친 뒤에 용서가 있고 정의가 있다면, 잘못을 뉘우치도록 미리 품어 안는 것이 관용이요 은혜다.(본문 중에서)

[아시아엔=이우근 변호사, 숙명여대 석좌교수] 독일의 패전으로 나치 점령에서 해방된 프랑스는 극심한 국론분열에 휩싸였다. 나치 부역자들을 처단해야 한다는 청산론과 저들을 용서하자는 관용론의 대립이었다. 노벨문학상 수상자 두 사람이 그 선두에 있었다.

<이방인>의 작가 알베르 카뮈는 “인간의 정의가 비록 불완전하다 해도, 정의를 필사적으로 붙들어 그 불완전을 바로잡아야 한다… 공화국 프랑스는 관용으로 건설되지 않는다”고 외쳤고, <사랑의 사막>을 쓴 프랑수아 모리악은 “우리는 학살자와 희생자라는 쳇바퀴보다 더 나은 것을 바란다. 프랑스가 게슈타포의 장화를 신어서는 안 된다”고 주장했다.

프랑스 정부는 나치 부역자 약 1만명을 사형에 처했는데, 인민재판과 즉결처분까지 합하면 수만명이 처형된 것으로 알려졌다.
“나약한 인간이 한계상황 속에서 저지르는 과오는 어느 정도 관용해야 한다”는 것이 모리악의 신념이었지만, 게슈타포의 장화를 물려 신은 듯한 프랑스의 현실은 그 신념과 정반대로 흘러갔다. 거짓 고발과 허위 증언이 끼어들면서 억울한 희생자들이 숱하게 생겨나 가혹한 처벌을 받아야 했다.

카타르시스의 포퓰리즘으로 치달리던 청산작업이 천재작가로 불리던 로베르 브라지약을 처형대에 세우는 데까지 이르자, 경악한 카뮈는 브라지약의 처형을 반대하는 탄원에 나섰지만 그 탄원은 끝내 묵살됐다.

‘부조리(不條理)의 작가’ 알베르 카뮈는 부역자에게서 ‘불의의 부조리’를 보았지만, 또 다른 부조리 곧 감성에 휘둘리는 ‘집단광기의 부조리’는 미처 보지 못했다. 카뮈는 마침내 이렇게 고백한다. “모리악이 옳았다!”

나치 만행에 대한 사죄의 뜻을 수없이 밝혀오고 있는 독일의 반성은 이미 하나의 아름다운 역사가 되었다. 전범(戰犯)이 묻힌 야스쿠니 신사에 정부 각료들이 수시로 참배하는 일본과 너무도 다른 점이다.

식민지배의 불법성과 폭력성을 반성하는 고노 담화, 무라야마 담화, 김대중‧오부치 선언, 간 나오토 담화 같은 사죄의 고백은 혐한(嫌韓) 감정에 불을 지르는 아베 신조 등 극우파의 선동으로 그늘에 묻혔다.

당연히 한국인의 반일감정도 펄펄 끓어오른다. 진보의 이름으로 ‘죽창가, 토착왜구, 친일청산’을 외치며 민족감정을 한껏 고조시킨 지난 정부는 이미 죽어서 사라진 친일파를 역사의 제단에 다시 불러내 창칼을 휘둘러댔다.

그렇지만 일본이나 친일파는 사실상 저들의 원수가 아니다. 저들의 정치적 입지를 굳히는 데 매우 쓸모 있는 적대적 공생(敵對的 共生)의 도구나 다름없었다. 민중과 흙수저는 정치 선동을 위한 동원체제로나 여겼을지 모르겠다.

​일본의 사죄가 없는 한국의 일방적 용서는 정의도 아니고 도덕도 아니다. 굴종일 뿐이다.

그러나 지금은 정의와 도덕에 대한 기대를 한시적(限時的)으로 잠시 누르고, 냉철한 현실의 눈으로 한일관계를 바라볼 필요가 있다. 북‧중‧러의 군사적 위협을 막아내려면 한‧미‧일의 방어협력체제를 굳히고 미래를 위해 가치를 공유하는 것이 최적의 방안이기 때문이다.

과거사에 붙들린 복수의 집념, 그 퇴행의 뒷걸음질을 진보라 속이지 못한다. 다시는 굴욕을 당하지 않기 위해 오늘의 안보를 빈틈없이 다지면서 미래를 향해 앞으로 나아가는 것이 올바른 진보다.

사죄가 있어야 용서도 있다. 그것이 정의다. 그러나 관용은 사죄를 이끌어낸다. 미리엘 신부는 절도범 장발장에게 사죄를 요구하지 않았다. 사죄가 있기 전에 장발장을 미리 품어 안는 관용으로 그의 참회를 이끌어냈다. 이것이 은혜다.

은혜는 정의를 넘어선다.

요구하고 재촉해서 억지로 받아내는 사과는 가치가 없다. 그런 사과가 나오면 ‘진정성이 없다’고 또 꾸짖을 것이다. 깊은 죄의식에서 스스로 우러나온 사죄만이 값진 참회다. 그 참회를 이끌어내는 것이 은혜요 관용이다.

“나는 진정으로 일본이 망하기를 원치 않고, 좋은 나라가 되기를 원한다.” 일본의 참회를 이끌어내려는 항일독립투사 도산(島山) 안창호 선생의 관용정신이다.

“약자(弱者)는 용서할 수 없다. 용서는 강자(强者)의 특성이다.”

마하트마 간디의 통찰이다. 그렇지만 관용은 강약(强弱)의 차이를 뛰어넘는 고결한 품성이다. 잘못을 뉘우친 뒤에 용서가 있고 정의가 있다면, 잘못을 뉘우치도록 미리 품어 안는 것이 관용이요 은혜다.

“원한과 일시적 감정으로 일본을 시기‧배척하려는 것이 아니고, 오직 일본이 그릇된 길을 벗어나… 세계평화와 인류복지의 발판이 되게 하려는 것이다.”

기미독립선언(己未獨立宣言)에 나타난 저 위대한 관용, 그 참다운 진보의 품위를 꿈꾼다. 

Leave a Repl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