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우근 칼럼] 부활의 믿음과 열린 역사관

“경험과 이성으로 납득할 수 있는 사실만을 역사로 인정한다면, 역사는 과거의 무덤 속에 갇히게 되고 만다. 닫힌 역사는 과거에 일어난 사건들의 축적으로 이뤄지지만, 부활 사건은 미래를 향해 열린 역사 곧 ‘종말론적 섭리를 역사 안에서 미리 실현한 예언적 사건’이라고 할 수 있다.”(본문 가운데) 사진은 남수단에 파송돼 헌신적인 사랑과 인술을 편 이태석 신부를 그린 영화 <부활>의 포스터

성서의 비신화화(非神話化)를 주장한 루돌프 불트만은 예수님의 부활이 시간과 공간 안에서 일어난 역사적 사건이라는 것을 인정하지 않았다. 예수님의 부활은 ‘구원의 의미를 믿는 실존적 깨달음’일 뿐, 부활이라는 역사적 사건을 믿는 것이 아니라는 견해다.

<로마서 강해>를 쓴 칼 바르트는 불트만의 주장을 강력히 비판한다. 부활은 시간과 공간 안에서 일어난 역사적 사건이며, 다만 그것을 역사나 과학의 비평적 방법과 전제들로는 증명할 수 없을 뿐이라는 것이다, 부활은 ‘인간의 행위’가 아니라, 무덤 속의 예수를 다시 살리신 ‘하나님의 행위’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천지창조는 역사적·과학적으로 증명될 수 없지만, 천지는 지금 우리 눈앞에 분명히 펼쳐져 있다. 우주가 어떤 한 특이점(singularity) 또는 초원자(超原子)에서 폭발하여 팽창을 계속하고 있다는 빅뱅이론(Big Bang Theory)도 우주의 기원을 명쾌하게 설명하지 못한다. 빅뱅의 출발점이 된 어떤 특이점, 그 초원자가 왜, 어떻게, 무엇으로부터 생겨났는지를 증명하지 못한다.

그렇다고 분명히 존재하는 우주를 부정할 수는 없는 일이다. 증명하지 못한다는 이유로 우주의 기원을 부정할 수 없듯이, 증명하지 못한다는 이유로 부활의 역사성을 부정하지 못한다.

“하나님 나라는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으로 빛을 비추었고, 십자가의 고난으로 가능해졌으며, 부활로 현실이 되었다.” 칼 바르트의 신앙고백이다.

제자들의 부활 증언은 무슨 환각 상태에서 어떤 실존적 깨달음을 얻은 것이 아니다. 그들의 삶 속에서 부활이 현실적으로 구현되고 있음을 선포하는 것이다. 부활이 단지 실존적 깨달음에 불과하다면, 성서의 부활 선포는 종교적 환상이나 기만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그것은 역사를 인간이 과거에 경험한 사건들 안에만 가둬버리는 ‘닫힌 역사관’이다.

하나님의 역사는 우리의 경험을 넘어 ‘종말의 미래를 향하여 열린 역사, 초월의 역사’다. 그 초월의 역사를 오늘의 역사로 받아들이는 것이 부활신앙이다.

​경험과 이성으로 납득할 수 있는 사실만을 역사로 인정한다면, 역사는 과거의 무덤 속에 갇히게 되고 만다. 닫힌 역사는 과거에 일어난 사건들의 축적으로 이뤄지지만, 부활 사건은 미래를 향해 열린 역사 곧 ‘종말론적 섭리를 역사 안에서 미리 실현한 예언적 사건’이라고 할 수 있다.

이것이 열린 역사관의 믿음이다. 9일은 부활절이다. 사도바울의 증언으로 부활의 아침을 기다린다. “그리스도께서 장사 지낸 바 되셨다가,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사 게바에게 보이시고, 열두 제자와 오백여 형제에게 일시에 보이셨으니, 그 중에 대다수는 지금까지 살아있고 그 후에 야고보와 모든 사도에게 보이셨으며, 맨 나중에 팔삭동이 같이 태어난 나에게도 보이셨느니라.”(고린도전서 15장 4~8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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