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동순의 추억과 사유] ‘우뚝선 회화나무’ 독립운동가 조부 이명균

경북 경산 서부리에 우뚝 서있는 회화나무, 이동순 시인의 조부 이명균 선생의 호는 일괴, 우뚝선 회화나무였다.

나의 조부 이명균(1863~1923) 선생의 묘소는 서울 동작동 국립현충원에 있다. 조부님 호는 일괴(一槐), 마당에 심었던 우뚝한 회화나무를 가리킨다.

조부께서는 그야말로 한 그루 거대한 회화나무처럼 한국근대사의 파란만장한 시간을 살아가셨다. 파리장서에 유림대표로 서명하신 일, 비밀결사 ‘의용단’을 조직해서 군자금 모으던 일, 상해 임정이 임명한 재무총장으로 놀라운 성과를 이룩하신 일, 테라우치 총독암살에 연루되신 일, 청년 투사 편강렬을 밀실에 은신시켰다가 만주로 안전하게 도피시킨 일 등등 크고 빛나는 구국사업에 헌신하시었다.

이명균 선생 초상, 묘비, 친필서한(사진 위 왼쪽부터 시계방향으로)

결국 ‘의용단’ 활동의 기밀이 일본경찰에 포착되어 온몸을 결박당한 채 끌려가 대구형무소에 수감되었다. 죄명은 제령 위반(帝令違反). 미결수 감방은 피비린내로 가득했다. 날마다 계속되던 온갖 악독한 고문 속에 50대 후반의 육신은 아주 만신창이가 되었다.

할머니 성산 여씨가 매달 면회 가도 얼굴조차 상면 못한 채 피로 흠뻑 젖은 수의를 받아와서 눈물로 빨래하실 때 그 심정이 어떠하셨을까. 조부께서는 결국 그 모진 고문을 이겨내지 못하고 혼수상태가 되어 죽음이 가까울 때 왜적은 책임을 면하려고 병 보석으로 석방했지만 고향 집에 오시자마자 곧 바로 숨을 거두시었다.

이동순 시인의 조모 성산 여씨

조부님 계시던 큰댁 안방 천장은 왜경들이 일본도로 여기저기 찔러서 수색하던 어지러운 흔적이 그대로 남아 있었다. 세월이 지나는 동안 늘 궁금했던 건 김천 일대에서 천석꾼 부자로 알려진 조부께서 어찌 독립운동에 헌신하셨는지 그 기막힌 의문이다.

무릇 지주, 자본가는 자신의 기득권을 지키려 대부분 일본과 야합하고 타협했다. 그런데 조부께서는 그걸 거부하고 자신의 돈과 재산을 만주의 서로군정서와 상해임시정부로 자주 송금을 했다. 결국 그 일 때문에 체포되어 고통을 겪다가 순국하셨지만 불가해한 일이다.

조부님의 민족의식은 어디에서 기인했을까. 거창의 유학자 곽종석 선생과 뜻을 같이 하셨으니 사상적으로는 남명 조식 선생 계열의 실천적 유학자의 삶과 길을 선택하신 듯하다. 틈만 나면 우국의 비통한 시를 짓고 비밀결사 맹원들과 모의를 하며 은밀한 편지와 연락을 주고 받았다. 조부님 남기신 유품은 별로 없다. 보시던 문집과 경사자집, 사서삼경 등의 고서는 내가 오래도록 늘 지니고 있다가 계명대 고서박물관에 모두 기증했다.

일제가 이명균 선생에게 보낸 회의개최 통지서

상해임정에서 보내왔다는 권총은 사라지고 총탄만 여섯 발 정도 보관하고 있다. 그런데 특이한 유품이 하나 있다. 1914년 9월 4일 김천군청이 발급한 지주조합(地主組合) 총회 개최통지서이다. “다가오는 9월 11일 오전 10시, 김천군청에서 총회를 개최하니 만장(萬障)을 제(除)하고 그 시간에 출두할 것을 통지함.”

문장도 몹시 사무적이고 무뚝뚝하다. 식민지 관료주의의 고압적 입김이 그대로 느껴진다. 조부께서 이 회의에 참석하셨는지 그걸 지금 확인할 길은 없다. 아버지가 이 종이 한 장을 보관해오시다 나에게 어느 날 전해주셨다. 올해로 108년 되는 귀한 문서자료다.

식민지시대 지주 자본가였던 조부께서 어떤 경로로 독립운동에 헌신하게 되셨는지 그게 지금도 몹시 궁금하고 놀라울 뿐만 아니라 더 큰 존경심으로 이어지는 것이다. 부자가 독립운동에 가담하기란 낙타가 바늘구멍에 들어가는 일과 같다.

독립운동가 이명균 선생 순국기념비, 김천 자산동 소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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