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동순의 추억과 사유] “유홍준, 전설을 지켜보며 만감이 교차할 때가 많았다”
유홍준(兪弘濬, 1949 ~ )은 한때 영남대 대학원 미학미술사학과 교수였다. 창비 사장이면서 영남대 교수로 계셨던 미술평론가 김윤수 교수가 데려왔다. 유홍준은 민청학련 사건에 연좌되어 그 어디에도 대학에 발을 붙이지 못했는데 은사 김 교수가 구제를 했던 것이다.
유홍준은 교수가 되기 전 삼성 계열의 <계간미술> 기자를 여러 해 했다. 그 시절에 경험한 고미술에 대한 식견으로 초청강연과 글쓰기를 했다. 그 특유의 감칠맛나는 달변의 말솜씨, 청중의 기대와 심리를 환히 꿰뚫는 통찰력으로 듣는 사람의 영혼을 휘어잡았다.
오죽하면 한국의 3대 구라 중 하나였을까. 첫째는 백기완 선생이 워낙 청산유수 달변이라 사람들이 명명하기를 백 구라, 둘째는 없는 말도 짐짓 꾸며서 지어내면
마치 사실처럼 다가오게 하는 작가 황석영의 황 구라, 세번 째가 달변의 혓바닥으로 능수능란한 말솜씨를 지닌 유홍준의 유 구라, 사실 ‘구라’란 말은 거짓말을 뜻하는 속된 말이다.
그럴 듯하게 엮어서 실감나게 풀어내면 마치 직접 겪은 경험담처럼 생기롭게 들리는 멋지고 매끄러운 말재간을 일컫는 말이다. 그러니까 ‘구라’란 말은 썰(說)을 풀어낸다는 뜻으로 해석된다. 한국의 전설적인 3대 구라를 만나 그들의 이야기를 듣다보면 자기도 모르게 슬그머니 빠져들기가 일쑤다.
<문화유산답사기>는 영남대 시절부터 시작되었다. 첫 권이 발간되자마자 선풍적 화제가 되며 중판을 거듭하고 속편의 발간으로 이어졌다. 아마 최근까지 10권 가까이 발간되었으리라. 답사기 1권을 들고 책에 등장하는 전국의 유적지를 다니는 독자들이 줄을 이었다. 책에는 현지의 맛집 이야기도 있어서 답사기 덕분에 식당들도 엄청난 특수를 누렸다.
한번은 경주 감은사지를 갔는데 두 여대생이 답사기를 손에 들고 오더니 드디어 “여기가 <아, 감은사>다”라며 호들갑스럽게 큰 소리로 외쳤다. 절터와 탑만 남은 그곳의 명칭은 감은사인데 답사기에 기록된 부분이 ‘아, 감은사’였기 때문에 유적지 이름도 답사기 기준으로 바뀐 것이다.
그 책의 효과는 참으로 컸다. ‘아는 만큼 보인다’는 말의 위력을 느끼게 했고 전국의 어딜 가나 답사기를 들고 여행을 다니는 사람으로 넘쳐났다. 그야말로 <문화유산답사기> 신드롬이었다. 무관심과 방치 속에 놓인 문화유산을 뜨거운 관심권의 중심으로 호출한 유홍준의 공로는 자못 크다.
그러나 담양 소쇄원 후손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잠시만 방심하면 기왓장도 벗겨가고 유물 도난이 심심찮게 발생한다는 것이다. 아무튼 답사기 덕분에 유홍준은
창비의 일등 귀빈이 되어 칙사대접을 받았다. 해마다 제작하는 창비달력의 그림 제공자였고 전국 문화유적답사 팀을 주도했다.
이렇게 스타덤에 오르게 되니 그가 몸 담고 있던 대학으로서는 엄청난 홍보효과로 이어졌다. 수업은 전혀 신경 쓰지 않아도 되니 그냥 머물러 있어주기만 해달라고 총장이 간청했다. 하지만 그가 몸담고 있던 학과의 교수는 유홍준의 몫까지 늘 혼자서 대신해야 하니 이만저만 힘든 경우가 아니었다.
유홍준은 영남대에서 박물관장까지 지내고 명지대학으로 환대를 받으며 옮겼다.
이후 승승장구하면서 문화재청장까지 지냈다. 답사기 판매 인세와 강연료 수입으로 돈도 엄청나게 많이 벌었으리라. 워낙 스타교수이다 보니 신문과 TV에서나 만나고 대학에서 대면할 기회는 거의 없었다.
그가 영남대에 머무는 동안 딱 두 차례 정도 공적인 자리에서 만났을 뿐이다. 그러니 서울 창비에서 우연히 마주쳤을 때 “대구 사람을 서울에서 보니 기분이 이상하다”는 어색하고 뜬금없는 농담을 했다.
1993년 어느 봄날, 영남대 교수 우편함에 유홍준이 보낸 메모가 있었다. 그가 서울 다녀온 뒤 창비 주간 이시영의 전갈을 종이에 적어서 보낸 짤막한 메모다. 어떤 정감도 없고 용건만 전하는 그야말로 드라이한 단순전달일 뿐이다.
한 사람이 전설로 만들어지는 과정을 지켜보며 자주 만감이 교차할 때가 많았다.
이 동 순 님,
창비(創批)에 갔다가
이시영(李時英)의 심부름으로
찻잔을 가져 왔습니다.
이시영이가 원고청탁도 있고 해서
꼭 연락을 바란다고 합니다.
1993년 4월 15일
유 홍 준 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