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동순 시인의 추억과 사유] “오늘의 ‘창비’는 이시영 같은이의 ‘분투’ 덕택”

이시영 시인이 이동순 시인에게

사실 <창작과비평>이 오늘과 같은 규모의 성세로 자리를 잡고 번성하게 된 것은
창비가 어렵고 힘들었던 고난의 시절을 안간힘으로 감당했던 모든 분들의 전심전력과 전력투구에 힘입은 것이리라.

우선 창비를 이끌고 갔던 운영진들, 편집과 영업팀들, 그리고 여러 도우미들, 창비에 좋은 글을 꾸준히 기고했던 필진들, 그리고 꾸준히 창비의 책을 찾은 독자들, 이런 분들의 노고와 피땀이 이룩한 결실이리라.

참으로 많은 분들의 면면이 떠오르지만 나는 그 가운데 누구보다도 먼저 이시영 시인의 노고와 열정을 생각지 않을 수 없다. 늘 지쳐있던 피로한 모습의 친구를 생각하면 지금도 가슴이 아프고 애달파진다.

한번씩 서울에 가서 시영 형과 또 다른 벗들과 저녁 술자리에서 함께 어울리면 밤이 깊어갈수록 시영 형의 피로한 기색이 점점 수면상태로 빠져들게 했다. 앉은 채로 고개를 옆으로 약간 꺾거나 앞으로 푹 수그린 채 깊은 수면상태에 빠진다.

편지에서처럼 일더미, 술더미 속에서 나날이 지치고 시달리고 찌들린 일과의 모습을 그대로 눈 앞에서 보는 것이다. 그러한 수면상태는 친구의 신체적 리듬이
스스로를 조절하고 견뎌내기 위해 어쩔 수 없이 생겨난 자발적 자생적 현상이리라. 그렇게 두어 시간 앉은 채로 잠에 빠졌다가 드디어 부시시 일어나 집으로 돌아갈 채비를 한다.

이시영 시인

시영 형이 수면상태에 빠지는 모습에 대다수의 사람들은 이미 익숙해져 있어서 굳이 깨우거나 부르거나 하지 않는다. 그렇게라도 술자리를 끝까지 지키던 시영 형의 당시 모습이 떠올라 가슴이 아린다. 얼마나 밀려드는 일에 바쁘고 시달리고
혼자 난제를 해결하고 고군분투했을 것인가.

창비가 누리는 현재의 번성은 모두 시영 형과 같은 책임일꾼의 노고 덕분이다. 그 후 기어이 건강이 악화되어 병고를 치르고 이제는 많이 회복이 되었으리라. 그토록 바쁜 리듬으로 시달리다가 지금의 고요한 삶을 어찌 살아가시는지 궁금하다.

그 분주한 일과를 보내면서도 일일이 답장을 보내주고 격려도 잊지 않던 친구의 돈독한 우정을 떠올린다.

이시영 시인이 이동순 시인에게

李 東 洵 兄께

주신 편지 잘 받았습니다. 사실은 <21인 신작시집>이 너무 늦게 나오게 된 점을
깊이 사과드리려고 했는데, 막상 李兄의 편지를 먼저 받고 보니 죄송스럽기 짝이 없습니다.

원고마감을 2월 말인가에 했는데 여러 가지 회사 사정이 겹쳐서 그렇게 늦고 말았습니다. 양해해 주시기 바랍니다.

<타는 목마름으로> 시집 건은 그럭저럭 여러분들의 격려와 도움으로 해결되어 가고 있는 중입니다. 다만 우리 시대의 문학이 그 어떤 이유에 의하던 간에 금기시된다는 것이 못내 안타까울 뿐입니다.

우리 모두의 노력과 지혜에 의해 다시는 그런 사고가 터지지 않도록 해야 할 것 같습니다. 하여간 여러분께 걱정을 끼쳐드려 무어라 말해야 좋을지 모르겠습니다.
창비신서 42, 43은 아직 발송치 않았습니다. 그러니 안 받은 것도 당연한 일이지요. 곧 보내드리겠습니다.

그리고 <개밥풀> 30부는 영업부에 의뢰, 발송토록 했습니다. 처형 되시는 분께는
저희가 따로 편지를 내도록 하겠습니다.

李兄의 오랜만의 글월을 통해 李兄의 근간의 생활 모습을 대략 읽어볼 수 있습니다만 저 역시 마찬가지로 일더미 술더미 속에서 허우적거리느라 가을도, 그 가을의 정감도 느끼지 못하고 있습니다.

늘 정신을 차려야겠다는 자각증상은 조금 있습니다만… 간혹 가다가 윤구병 형을 통해 李兄의 여러 얘기를 듣기도 합니다만 바쁨 속에서도 생활의 피로와 분노와
더러움 속에서도 역겨움 속에서도 李兄다운, 가장 시다운 시 보여주시기 바라며
이만 펜을 놓습니다.

건강하십시오.

1982년 9월 15일

이 시 영 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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