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농지개혁’ 조봉암, ‘민주사회주의자’ 조소앙 그리고 ‘금융실명제’ 김영삼

민주사회주의자로 6.25 당시 납북된 조소앙


농지개혁 진보당사건 조봉암

자유당 정권에서 1959년 조봉암이 진보당 사건으로 사형 당했다. 2011년 재심에서 무죄가 되었다. 법원은 드물게 사실상의 사법살인에 대해 사과했다. 그때 대법원에 김병로가 있었다면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라고도 한다. 김병로는 법원의 수장으로 정부의 이승만, 국회의 신익희와 같이 3부요인으로 같은 대열에 섰던 어른이다.

재판을 받고 있는 조봉암(맨 앞)

조봉암은 원래 공산주의자였는데 전향하였다. 이를 아는 이승만이 조각에서 농림장관으로 임명하자 본인도 놀랐다. 1946년 3월 북한이 토지개혁을 실시했다. ‘무상몰수 무상분배’로 처음으로 내 땅을 갖게 된 소작농이 열광할 때다. 그러나 곧 농민들은 지주가 국가로 바뀐 것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승만은 6.25전쟁이 터지기 직전 농지개혁을 실시했다. 조봉암이 농림장관으로 농지개혁을 지휘했다. 지주가 많은 한민당이 극력 반대했다. 그러나 북한군이 들어와서 농민이 합세하지 않았던 것은 농지개혁 덕분이다. 토지개혁을 했다는 공산당이 벼 낱알을 세는 것에 진저리를 치게 되었던 것이다.

민주사회주의 조소앙

조소앙은 자본주의나 공산주의도 아닌 민주사회주의를 표방했다. 임정에서 그는 이동녕, 이시영, 김구, 안창호 등과 함께 한국독립당을 만들었다. 제2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전국 최고득표로 당선되었으나 6.25전쟁 당시 납북되었다.

조소앙은 당시 정치적 거인의 하나였다. 신익희가 뉴델리에서 귀국하면서 조소앙을 만난 것은 이런 배경이 있었다.

성북동에 조소앙 활동터가 있다. 삼일운동 후 새로 부임하는 사이토 조선총독에 폭탄을 던져 간담을 서늘케 한 강우규나, 신흥무관학교를 설립한 이회영과 함께 조소앙 활동터를 만든 것은 이같은 조소앙을 부각시키려는 것이다.

그는 한국에서 자본주의도 공산주의도 아닌 제3의 지대 민주사회주의를 표방했다. 서구에서 개화한 민주사회주의는 독일에서 공부한 김종인에 의해 5공화국 헌법에 반영되어 있다.

청와대에서 칼국수를 들고 있는 김영삼 대통령. 그는 취임후 금융실명제 실시. 안가 철거, 정치자금 수수 거부 등 권위주의 시대의 산물들을 척결하는데 크게 기여했다.


금융실명제 김영삼

김영삼의 금융실명제는 헌법 76조의 긴급재정경제명령에 의거하고 있는 것만 강조하고 있다. 금융실명제가 헌법에 별도의 장으로 규정한 한국경제의 기본원칙에 부합하는가는 상론의 여지가 있다.

하지만 김영삼의 1993년의 금융실명제는 정치, 경제, 사회의 근간을 바꾼 혁명이었다. 김영삼이 주로 IMF 실패로만 기억되는 것은 유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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