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8년 전에 보내온 시인 친구 이시영의 편지

이시영 시인이 이동순 시인에게

내 편지 스크랩 북에서 한 개인의 편지로 가장 많은 분량은 단연 이시영(李時英, 1949) 시인의 것이다. 그가 예전 창비 편집장, 주간 시절에 원고청탁, 교정, 기타 문단 행사 관련으로 자주 소식을 전해왔다.

그 특유의 분위기가 느껴지는 필체와 항시 깍듯하게 갖춘 말씨, 따뜻한 온기가 풍겨나는 문장 등등 직접 만나서 대화하는 것과는 또 다른 분위기가 이시영 시인의 편지에서는 듬뿍 풍겨난다.

읽는 재미, 보는 즐거움, 읽고난 뒤의 여운까지 두루 갖춘 전형적인 명편지다. 오늘 올리는 이 편짓글은 1980년대 중반 송기원, 최원식, 이시영, 나 넷이 독서모임 ‘명이(明夷)’를 할 적에 쓴 것이다.

집집마다 돌아가며 열었는데 독서가 위주여야 할 독서회가 토론은 뒷전이고 음주부터 으뜸으로 삼으니 차츰 팽창된 의욕은 느슨해지고 고달픈 니취(泥醉)의 힘든 기억만 남게 되어 한 차례씩 순회만 겨우 마치고 4회로 서둘러 막을 내리고 말았던 것이다.

최원식 형이 인천에서 가장 먼저 했고, 두 번째가 이시영 형이 주관했던 서울 행사였다. 세번 째를 내가 살던 청주에서 했고 마지막이 된 네번 째를 김성동 형이 살던 대전 산내면 구도리에서 했다.

正覺이 사고로 몸을 다쳐 입원 중이었고, 송기원은 허리 통증으로 치료중인 소식을 전해왔다. 이시영은 꼭 참석하고 싶었지만 당시 무슨 사건이었는지는 모르지만 불교계 비판과 관련된 어떤 소란이 있어서 여러 승려들이 수시로 협박전화를 해대거나 삼삼오오 직접 무리를 지어 찾아와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는 험악한 분위기에 시달렸다. 그 때문에 청주행사에 참석이 어렵다는 전갈이다.

지금 기억이 불분명하지만 청주행사에 결국은 전원이 참석했던 것 같다. 염무웅 선생까지도 함께 오셔서 좌중이 더욱 흐뭇했던 기억이 떠오른다. 집의 식구는 마치 잔치 음식처럼 술상을 준비하고 각종 안주와 요리를 장만하였다.

그날 분위기는 정각 김성동 형이 이후에 특별한 글로 소상히 전하고 있다. 내 세 번째 시집 “지금 그리운 사람은”의 발문을 김성동이 멋진 필치로 써내려갔으니
그가 퇴원해서 당일 참석한 것은 틀림없다. 요통 치료를 집중적으로 받는다던 송기원도 왔고 참석이 어렵다던 이시영 형까지 왔으니 결국 전원이 참석했던 것이다.

자정이 넘도록 내 집에서 마시며 즐겼고 그리고도 부족해서 염 선생께서는 거실로 살그머니 나오셔서 안주꺼리를 찾으셨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곶감에 호도 박힌 안주로 더 드셨으니 그때만 해도 술을 즐기시던 때, 청주 교외의 들판을 거닐며
함께 다정히 찍었던 기념사진이 있는데 지금 그 소재를 찾아내지 못한다.

딸 단비의 돌잔치 소식이 편지에서 보이는데 그 아기가 벌써 나이 不惑에 이르렀으니 세월은 어찌 이다지도 주춤거림이 없는 것인가?

이시영 형의 편지는 구구절절 나에 대한 배려와 안부, 우정으로 찐하게 배어있다.
그는 창비에서 거의 평생을 보냈다. 발간도서의 기획과 출판은 가장 기본이요,
수시로 내방하는 문단 손님들 접대, 저녁이면 끊임없이 이어지는 술자리 등등
그의 몸과 마음은 얼마나 휴식도 없이 오랜 기간을 줄곧 시달림으로 지쳤을 것인가?

기어이 건강이 나빠져서 장기간 치료도 받고 그런 와중에서도 여러 대학으로 시창작 강의를 열심히 다니곤 했으니 특별한 열정의 소유자임에 틀림 없다 하겠다.
당신의 건강도 좋지 않은데 집안에 힘든 일이 있어 외부약속도 이젠 제대로 하지 못한다고 하니 어떤 위로도 도움도 전하지 못하는 나의 애타는 심정이 몹시 애달프기만 하다.

무정한 세월은 저혼자 분주히 흘러서 어느덧 당시 ‘明夷’ 모임 친구들의 나이가
고희를 단숨에 뛰어넘어 그 중반을 치달아가니 함께 만나 지난날을 회고하는 일도 불가하고 다만 혼자서 그 시절을 그리워하며 추억만 더듬어 쓸쓸하게 헤적일 뿐이다.

부디 바라옵건대 옛 동무들의 노후가 평안하고 무탈하시기를 빈다.

이시영 시인

李兄께

먼저 이단비 양의 돌을 축하드립니다.
단비처럼 온 大地와 인간에게
기쁜 인물로 자라나도록 힘써주시기 바랍니다.
최 선생과 송기원 형과 상의해봐야 알겠지만
지금 생각으로 28일에 청주 내려가기가
매우 어려울 듯합니다.
正覺(김성동)이 그때까지는 퇴원할 것 같지 않고,
宋도 허리 치료 중이며, 최 선생은 어떤지 모르겠으나,
나는 요즘 대(對) 불제자(佛弟子)들과의 싸움에
진력이 나 있는 상태입니다.
하루에도 7~8번씩 찾아오는 승려들,
걸려오는 공갈협박 전화 등에
시달리고 있는 중입니다.
다만 한 가지 다짐이 있다면
잘못된 체제와의 싸움 못지 않게
구습, 내지는 구악과의 싸움도
해볼 만한 가치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작품을 삭제하고 공개사과하라는
터무니 없는 요구를 하고 있습니다.
멀리서이지만 표현의 자유와 실력대결을 벌이고 있는
상대 측과의 싸움에 관심가져주시기를 빕니다.
강의 중임에도 열 편 이상의 시를 썼다니 반갑습니다.
끝없는 소모만 되풀이 되고
실속이 없는 저의 나날입니다만,
청주의 맑은 햇빛과 공기,
그리고 숲 속에서 마음껏 창작의 열기를 누리시는
李兄의 삶이 부럽습니다.
<학원> 창간호의 시는 잘 읽었습니다.
백두산의 기초를 다지는 시라고 생각되었습니다.
많이 그리워하시고 많이 다듬어가시기를 바랍니다.
위대한 서사시 “홍범도”의 꿈을…..
내려가 축하함이 마땅한 도리이오나
그러하지 못함을 너그러이 용서해주시기 바랍니다.
이만 쓰겠습니다.
다음 달 明夷 모임에서 뵙기로 합니다.

1984년 4월 21일

이 시 영 드림

이시영이 이동순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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