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동순 시인의 추억과 사유] ‘백석시전집’과 이시영

이동순 시인의  <백석시전집>

20대 시절엔 내가 과연 저서란 것을 발간할 수 있겠는가, 어떻게 하면 저자가 될 수 있을까를 막연히 고민했다. 그런데 평생을 대학에서 보내고 등단 50년이 되는 해에 이르러 그간 발간했던 이런 저런 저서의 목록을 살펴보니 거의 70 여권이나 된다. 알찬 실속도 없이 가짓수만 잔뜩 늘인 것 같다.

한 권 한 권의 책마다 그 나름대로의 얽힌 사연과 내력이 서려 있으니 그걸 생각하는 시간도 혼곤한 추억에 젖어들게 한다. 그 많은 편저서 목록 중 가장 자랑스럽고 가슴 뿌듯한 책이 있으니 그것이 바로 “백석시전집”이다.

이시영 시인

1987년 10월 하순에 발간된 이 책은 오로지 창비에서 일하던 외우(畏友) 이시영 시인의 전적인 배려와 노력 덕분에 가능했다. 대학원 석사과정 시절에 읽은 백철의 “조선신문학사조사”(백양당, 1948), 그 두 권을 통독하던 중 1930년대 시 해설 부분에서 나는 ‘백석’이란 시인의 이름을 처음 대했다.

우리 문학사에는 어찌 이다지도 낯설고 생소한 이름들이 이렇게도 많은지. 가만히 생각해보면 이런 초유의 대혼란을 빚어낸 원흉은 바로 분단이란 괴물이었다.
분단이 모든 질서와 규범을 헐고 깎고 변조하고 와르르 붕괴시켜버린 것이다. 세월이 지날수록 원형회복의 길은 아득하기만 하다.

그날로부터 나는 도서관, 고서점, 옛 신문과 잡지, 간행물, 장서가의 목록을 뒤지며 백석의 시작품을 찾아헤맸다. ‘흰 백’짜만 눈에 띠면 우선 가슴이 두근거렸다.
확인해보면 백철, 백신애 등이라 실망했고 이런 가운데서 100편 가까운 작품을 발굴 수집했다. 그것은 흩어진 가랑잎 더미에서 사라진 보물을 찾는 일과도 같이 막막했다.

그 작품의 원문으로 가본(假本)을 만들어 창비에 보냈고 흔쾌히 전집 발간으로 이어졌다. 그 모든 일을 혼자 도맡아 수고를 하신 분이 이시영 시인인데 당시 그 노고를 어찌 갚으리. 수시로 발간작업의 진척상황을 편지로 주고받으며 소상히 알리고 의논했다.

이 편지가 9월 하순에 쓴 것이니 <백석시전집> 발간 불과 한 달 전에 그 구체적인 경과를 낱낱이 알려온 것이다. 오랜 만에 친구의 당시 편지를 읽는 심정이 흐뭇하다. 서사시의 집필과 구성이 지닌 어려움을 이토록 전문가적 식견으로 피력하고 있음을 본다. 이 편지를 받은 지 35년 세월이 흘러가고 있다.

시간은 잠시도 쉬지 않고 강물처럼 흘러가는데 인간은 어찌 이다지도 유한한 삶을 살아가는지. 그 짧은 시간 속에서도 영생을 누릴 듯 무리와 과욕을 부리는 세상의 흉한 꼴을 본다. <백석시전집>의 담백한 표지가 떠오른다. 인생도 그처럼 담백하게 살고 싶다.

이시영 시인이 이동순 시인에게

李兄께

김이구(金二求) 편에 보내주신 편지 잘 받았구요. 그리고 뜻밖의 조의금도 잘 받았습니다. 장인이라 일부러 연락 안 드렸는데도 결국은 폐를 끼치고 말아 죄송합니다.

학과장을 맡으셨다니 더욱 분주하시겠습니다. 누구나 돌아가며 한 번씩 하는 것이니 슬기롭게 넘기십시오. “白石詩全集”은 착착 진행 중입니다. 지금 재교 나오기를 (출판사에서) 기다리고 있습니다. 재교가 나오면 연락드리겠습니다.

이시영 시인이 이동순 시인에게

교정지를 우송해드릴 터이니 일독해 주셨으면 합니다. 다만 걱정되는 것은 정지용, 김기림의 복권도 아직 단행될 기미가 전혀 안 보이는 상황의 불변입니다. 노력해보도록 합시다.

상황을 잘 판단해보겠습니다. 캠페인도 아울러. 참 <개밥풀> 시집 인세가 조금 나왔습니다. 180.000원 온라인 번호를 알려주시면 우송해드리겠습니다. “홍범도(洪範圖)” 작업은 여전히 잘 진행되겠지요? 역작 되기를 기원합니다.

고 선생의 “白頭山” 진행은 교정에서 콱 걸려 잘 넘어가질 못하고 있습니다. 저자가 귀국하면 대폭 수정이 필요한 셈이지요. 특히 서사시에서 유의할 점이 역사란 사실과의 부합인 것 같으며 (완전한 일치는 아닐지라도) 주인공의 작품 내적 성격통일인 것 같습니다.

너무 그런 곳에 치중하다 보면 예술적 성취도와 발랄한 생동감이 결여되기 쉽고,
그렇다고 작품 속의 사건의 전개가 허구가 아닌 이상 일반적인 역사 견해와 별개일 수는 또한 없지요. 교정 경험을 얘기드린 것이니 크게 신경 쓰실 일은 못 됩니다만 참고하십시오.

이형의 수고가 손길 닿는 대로 뻗친 의의 있는 작업 -<백석시전집>의 햇빛 보는 날을 함께 기원합시다. 거듭 감사 드리며 분주한 펜을 놓습니다.

1987년 9월 22일

이 시 영 드림

이시영 시인이 이동순 시인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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