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동순의 추억과 사유] “인연이 아니면 끝내 연결과 지속을 거부한다”

오세영 시인이 이동순 시인에게 보낸 4문장 안부 편지. 

인연(因緣)이라는 말이 사람 살아가는 세상에서는 참으로 적절한 실감으로 다가올 때가 있다. 그것은 전혀 예상치 않았는 데도 마치 누가 시킨 듯이 찾아오기도 하고 이런저런 여건이 갖춰졌음에도 함께 할 인연이 아니면 끝내 연결과 지속을 거부한다.

하기야 수십 년을 함께 한 부부나 친구의 경우에도 인연이 다하게 되면 필연적으로 작별은 찾아오게 마련이다. 인연인 줄 알았다가 결국 불행한 파탄으로 끝난 인간관계가 우리 인생에는 적지 않으리라.

사람의 일에는 미래를 알 수 없다는 매우 불투명하고 불분명한 판단과 규정이 진작부터 하나의 관습처럼 있어왔지만 숱한 만남 속에서 그것을 인연이라 믿고 자신의 모든 열과 정성을 바친 뒤 돌연한 종말로 파탄을 맞게 되는 그런 낭패를 겪는 일이 결코 적지 않다.

친밀하게 지내오던 한 사람과 근년에 예상치 못한 작별을 하게 되었다. 느닷없는 이별통보를 받고서야 그 헤어짐의 충격을 체감할 수 있었다. 이별이란 마치 씨앗처럼 평소의 생활이나 관계 속에서 은밀하게 싹이 트고 몰래 몰래 자라서 어느 날 느닷없이 흉한 실체를 드러내고야 만다.

오래 친했던 사람과의 작별은 그것을 전혀 준비해오지 못한 경우 엄청난 후폭풍을 불러오고 시간과 공간의 황폐로 이어지는 일이 적지 않다. 인간관계의 발전과 유지를 위해서 우리가 평소 관리하고 노력해야 할 부분이 많다. 자신의 부실한 관리가 대개 단절을 초래한다. 그 때문에 삶이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지난 2002년 여름은 여러 가지 일들로 심신이 시달리고 곤비했다. 인간관계에서 겪게 된 시달림 때문에 잠시 이완을 경험해보려고 여행을 떠났다. 그게 돈황 실크로드, 하서회랑 코스였다.

일행은 주로 대구의 문인들이었는데 서울에서는 임영조(任永祚, 1943~2003) 시인과 오세영(吳世榮, 1942~ ) 시인이 동행하였다. 두 분 모두 과묵하고 느긋한 성품이라 늘 혼자 다니며 옛 유적지를 감상하고 다녔다.

거의 대화도 없는 편이었고 함께 다녀도 종일 몇 마디 대화가 없었다. 두 분 모두 가장 연배가 높아서 그런지 몰랐다. 평소 각별한 인연이 아니었던 지라 그냥 데면데면하게 한 주일을 다닌 게 전부였다.

여행을 마친 뒤 각자 찍은 사진을 어느 사이트에다 올려서 함께 공유하게 되었는데 그때 오세영 시인이 보내온 편지다. 시인의 편지로서는 다소 싱겁고 밋밋하다.
그 실크로드 여행 때 한 번 만나고 헤어진 게 전부다.

전화도 편지도 더 이어지지 못했다. 임영조 시인은 여행 직후 병을 얻어 투병하다가 바로 이듬해에 세상을 떠났다. 돈황역에서 투루판 가는 밤 열차를 타고가며
몇 마디 새벽 대화를 나눈게 전부였다. 살아가면서 이런 건조한 만남의 경우는
그야말로 부지기수이다.

짧은 만남을 더 발전시키는 일은 각자에게 맡겨진 몫이리라.

오세영 시인

李東洵 교수께

여행 후 필름을 현상해 보니
이 교수님 사진이 두 장 밖에 없군요.
평소 사진에 관심이 없어
다른 분들의 사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지난 한여름의 실크로드 기행은
멋있고 아름다웠습니다.
덧없는 인생이라지만
추억은 역시 남는군요.
내내 건강하시기 바랍니다.

2002년 8월 13일

오 세 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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