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동순의 추억과 사유] 이세룡 형, 우크라이나 평화를 빌어주오
한 시인이 이승에 머물 때는 그의 이름을 기억하는 이가 더러 있으나 세상을 떠난 뒤에는 곧 잊혀져 그 누구도 기억하는 이가 없게 된다. 김소월, 한용운, 윤동주 같은 시인들은 이미 시간성과 공간성을 초월해서 고전의 세계로 올라가 있지만 이름의 크기나 용적이 작거나 미미한 경우 쉽게 망각 속으로 굴러떨어진다.
이후에 태어나고 자란 세대들에게는 전혀 존재감마저 낯설고 생소하다. 이세룡(李世龍, 1947~2020)이란 시인의 이름을 오랜만에 그리움으로 소환해본다. 그는 서울공고 인쇄공업과를 졸업하고 27세에 <월간문학> 신인상을 받으며 시인이 되었다. 당선작품은 ‘겨울 비망록’이었다.
워낙 다재다능하여 감각과 예지에 찬 반짝이는 시작품을 잇따라 발표하며 주목을 받았다. 개인적 사유와 경험세계를 담아내면서도 결코 불행과 좌절로 기울지 않으며 낙관적 여유를 보여준다는 평을 받았다.
여러 출판사의 편집장을 거친 다음 1990년대 초반 도서출판 ‘서적포’를 잠시 운영했고 영화잡지 <로드쇼>를 창간해서 발간하기도 했다. 영화 쪽에 특히 관심이 많아서 시나리오를 쓰고 감독으로도 활동하며 직접 영화도 만들었다.
서울극장 기획실장으로 부임하면서 그곳 도안사, 선전부장으로도 일했다. 이세룡 시인이 영화감독으로 직접 메카폰을 들고 “내 이름은 제제” 를 만들었다. <이세룡의 영화산책>, <세계 명화 100선> 등과 에세이집 <시와 영화가 있는 풍경>도 발간했다. 합동영화사 기획실장으로도 일했다.
시와 영화 두 곳을 넘나들면서 작품활동에 주력했다. 시집으로는 <빵>, <작은 평화>, <채플린의 마을>, <종이로 만든 세상> 등이 있다. 뇌일혈로 오래 투병하던 중 전신마비까지 와서 지난 2020년에 73세로 세상을 떠났다.
그가 남긴 대표작 한 편을 읽어본다. 마치 러시아의 참혹한 우크라이나 침공과 비극적 양민학살을 예견한 듯하다. 시인의 평화주의적 상상력이 돋보인다.
세계의 각종 포탄이 모두 별이 된다면
그러면 몰래 감추어 둔 대포와
대포 곁에서 잠드는 병사들의 숫자만 믿고
함부로 날뛰던 나라들이 우습겠지요
또한 몰래 감춘 대포를 위해
눈 부릅뜨고 오래 견딘 병사에게 달아 주던
훈장과
훈장을 만들어 팔던 가게가 똑같이 우습겠지요
?세계의 각종 포탄이 모두 별이 된다면
그러면 전 세계의 시민들이
각자의 생일날 밤에
멋대로 축포를 쏜다 한들
나서서 말릴 사람이 없겠지요
총구가 꽃의 중심을 겨누거나
술잔의 손잡이를 향하거나
나서서 말릴 사람이 없겠지요
?별을 포탄삼아 쏘아댄다면
세계는 밤에도 빛날 테고
사람들은 모두 포탄이 되기 위해
줄을 서서 차례를 기다릴지도 모릅니다
세계의 각종 포탄이
모두 별이 된다면
-시 ‘세계의 포탄이 모두 별이 된다면’
내 편지 스크랩에는 오랫동안 잊고 살았던 이세룡의 필적이 담긴 엽서 한 장이 눈에 띤다. 반갑고 미안한 마음으로 손바닥에 얹고 그와 악수하는 심정이 되어서 다시 읽어본다.
나에게 건강 유의하라는 당부를 해놓고 정작 시인 자신은 진작 유명을 달리 하셨으니 어찌 이리도 무심하신가.
李兄,
보내주신 시집 <百子圖> 감사합니다. 내용보다는 내용을 담은 책이 좀 소홀한 느낌이 듭니다. <월간문학>(6월호)은 받으셨는지 원고료는 아직 나오지 않았습니다. 나오는대로 우송해 드리겠습니다.
슬슬 더워집니다. 건강에 유의하시길.
1975년 5월 14일
이 세 룡 드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