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동순의 추억과 사유] 정호승의 ‘샘터’ 원고청탁서
아래 사진과 같은 원고청탁서를 보셨는가? 친구의 찢어진 양복수선비에 도움을 주려고 일부러 특집원고 집필을 요청한다는 내용이다. 그 양복에 대해서 나는 전혀 기억이 없다. 그런데 친구들은 양복과 어떤 사연이 있었나보다.
문단에서 가장 다정한 내 친구 시인 정호승의 발자취를 돌아다 본다. 지금은 전업작가로 활동하지만 지난 1980년대만 하더라도 그는 여러 직장을 이동해서 옮겨다녔다. 맨 처음엔 숭실고등학교 국어 교사, 그곳을 그만 두고 여성잡지사 편집부로 들어갔다. 주부생활이던가 엘레강스였던가. 거기서 잠시 일하다가 다시 월간 샘터사로 옮겼다. 정치인 김재순이 운영하던 잡지사였다.
동숭동의 붉은 벽돌건물이 떠오른다. 김남조 시인의 부군 김세중의 작품 중 하나다. 작지만 알차고 읽을꺼리가 많이 담겨서 그 잡지는 정기구독자가 꽤 많았다.
이 샘터사엔 과거 여러 쟁쟁한 문인들이 편집부 기자로 일했다. 염무웅 선생도 잠시 관계하셨고, 시인 김형영, 작가 김승옥, 이태호, 정찬주, 아득한 후배인 한강 등도 일했었다.
거기서 일할 때 아동문학가 정채봉이 주간이었고, 시인 정호승과 친구인 소설가 이태호도 책상을 나란히 붙이고 함께 일했다. 나에게도 한때 권유가 있었는데
여러 날 고심하다가 뜻을 접은 기억이 있다. 누가 어떤 곳에서 무슨 일을 하느냐에 따라서 잡지의 성격은 상당히 달라진다.
정호승이 샘터 편집부에 근무하던 시절, 그의 기획과 설정이 많이 반영되었다.
그 시절에 정호승은 정채봉과 의형제처럼 친했다. 살던 집도 수원 부근이었고 성당도 함께 다녔다. 정호승은 이후 동아일보 여성동아에서 잠시 일했고, 또 조선일보사 월간조선 편집부로 옮겼다. 정호승 시인의 직장생활은 그곳이 마지막이다.
보통 원고청탁서는 꼭 필요한 내용만 전하는데 이 청탁서는 인간적 정감이 끓어넘친다. 요즘은 이런 청탁서조차 아주 사라졌다. 시대의 변화에 따라 도구의 사용도 달라진다. 대개 전자메일로 혹은 문자로 온다. 우편으로 청탁서를 받던 그 시절이 그립다.
거기 여백에다 안부와 농담, 근황까지 소상히 담은 깜찍한 청탁서다. 이런 원고청탁서 한 장도 한 시대를 증언하는 유물이 될 수 있다. 그런 점에서 모든 오래된 것들은 거룩하고 소중하다.
동순 형!
동순 형의 그 양복이 못 입을 정도로 찢어져버렸다는
얘기를 듣고 마음이 아팠습니다.
그 양복은 동순 형이 결혼식 때 입은 양복일 뿐더러
동순 형에게는 아주 소중한 예복일 텐데…..
아무튼 내일 태호 형이 돌아오면 동순 형 양복을
토해내라고 큰 소리 큰 소리 쳐야겠습니다.
동순 형!
그런 의미에서(?) ‘또 하나의 발견’을 집필하여주시면
고맙겠습니다. 양복 수선비라도 될까 해서(?…….?)
평소의 일상생활에서 꼭 남에게 전하고 싶은 감동 어린
이야기를 적어주시면 됩니다.
바쁘시더라도 꼭! 꼭! 꼭!
1981년 4월 10일
정 호 승
* 마감일 꼭 지켜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