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단시대 ‘매몰시인’ 조벽암을 아십니까?

이동순 등 지은 <조벽암 시선집>  표지

나는 일찍부터 분단시대 매몰시인에 큰 관심을 가졌다. 분단이란 태풍 끝의 산사태와 같은 것이어서 와르르 무너질 때 거기 압사하고 즉각 매몰된 어이없는 인물들이 많았다. 그리보면 ‘매몰차게’란 단어의 어감이 심상치 않다.

이데올로기가 있든 없든 그 매몰은 가리지 않고 한꺼번에 묻어버렸다. 분단시대 한국현대문학사는 그 때문에 불구적이고 반쪽이다. 넣을 사람 넣지 말아야 할 사람을 구분해서 철저히 분리시켜버렸다.

1920년대 카프문학에 대해서는 기록이 인색하거나 아예 제거한 문학사도 있다. 분단시기에 북으로 간 문학인, 심지어는 공산군에 끌려간 납북 문학인까지 문학사 서술에서 제외시킨 경우도 있었다.

시인 임화의 경우는 북에서도 남에서도 사라졌다. 남쪽 문학사에선 ‘월북 공산주의자’, 북쪽에선 ‘미제의 앞잡이로 숨어든 간첩’, 이런 누명을 쓰고 문학사 서술에서 사라졌다. 어느 비평가는 이들을 일컬어 ‘비무장지대 문학인’이라 명명하기도 했다.

우리는 그들 모두를 민족문학사의 통합된 구성체에서 다시 제대로 담아내어야 한다. 분단이 길지만 한시적이고 통일은 멀게 느껴지지만 반드시 온다. 그 준비를 우리는 시작해야 하는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백석, 권환, 조벽암, 이찬, 조명암, 박세영 등의 매몰시인 전집 발간 작업을 꾸준히 해왔다. 전집 발간에 국가가 지원하는 나라는 중국이다. 그런데 우리는 심한 규제와 간섭이 느껴진다. 이런 뜻으로 하는 사업이 몹시 어렵고 불편하다.

조벽암(趙碧岩, 1908~1985)은 본명이 조중흡(趙重洽), 충북 진천 출생이다. 1920년대의 대표작가 포석(抱石) 조명희(趙明熙, 1894~1938)의 조카다. 벽암이 경성고보 다닐 때 학교 가는 길목에 삼촌의 집이 있어서 수시로 들러 문학도서를 빌려다 읽었다고 한다. 벽암이 문학인으로 성장한 것은 순전히 삼촌 포석의 격려와 성원 덕분이다.

포석은 일제 식민통치에 반발하다가 러시아 연해주로 서둘러 망명길을 떠났지만 스탈린의 고려인 강제이주에 반대하다가 체포되어 총살로 비운의 삶을 마감했다. 벽암은 분단시기에 북으로 가서 시와 소설을 계속 쓰며 살다가 죽었다.

두 분 모두 남쪽에서 오래도록 잊어진 문학인이었다. 90년대로 접어들며 조금씩 해빙의 기운이 돌며 전집 발간에도 힘이 고이기 시작했다. 여기에 의욕과 용기를 내어 나는 <조벽암시전집> 발간에 착수했다. 소명출판의 박성모 대표가 이 뜻을 도왔다.

하지만 막상 전집이 발간된 직후 보도를 보고 인천의 한 노인이 내용증명을 보내왔다. 벽암의 아드님 조재호씨였다. 월북자의 아들로 온갖 소외를 겪다가 부친의 전집 발간소식을 보도로 접한 것이다. 나는 진작 유족의 소재파악을 위해 이리저리 백방으로 수소문하고 노력했다. 하지만 끝내 연결되지 못한 채 일정에 따른 전집 발간으로 이어졌던 것이다.

조재호씨는 편자와 출판사에 부친의 전집을 무단으로 발간했다고 책망하며 거액의 보상금을 요구해왔다. 올바른 분별이라면 소외된 부친의 전집을 발간해준 편자와 출판사에 크게 감사해야 옳았다. 우리는 그분을 설득하느라 힘들었다. 이를 중간에서 조정하고 설득시킨 분이 청주에 거주하는 조성호 선생이다.

조재호씨와는 종형제지만 오래 연락이 끊어졌다. 그는 약국을 경영하는 약사로 수필을 쓰며 저서도 발간한 분이다. 양주 조씨 집안에서 배출된 자랑스런 어른 종조부 포석과 벽암의 자료도 모으고 있었으며 전집 발간의 가치를 크게 인정해주었다.

이 편지는 전집 발간 무렵에 조성호 선생이 보내온 격려서신이다. 그간 오래도록 서로 소식을 나누지 못했다. 그분을 생각하니 당시 격려와 성원이 새삼 고맙고 살뜰한 마음이 든다.

조성호씨가 이동순 시인에게

李 東 洵 선생님,

우선 조벽암(趙碧岩) 시집을 내신다니 매우 반갑습니다. 전집에는 이미 전력도 있으시니 잘 되리라 믿습니다. 변변한 자료는 없고, 벌써 보셨겠지만 “벽암시선”을 복사했습니다.

종조부 포석(抱石) 할아버지의 발자취 따라갔다가 모스크바에 있는 황동민(85년 작고, 포석의 처남) 교수댁에서 구한 것입니다.

“조명희선집” 만들 때 벽암과 서로 교류가 있었던가 봅니다. 벽암의 교정과 자문을 받았고 앞으로 소설과 수필을 복원하여 전집이 나와야겠지만 옛날 신문 잡지 복사본이 제대로 알아보기 힘들겠더군요. 아무튼 완벽한 시집으로 많은 연구논문들이 쏟아져 나왔으면 하고 기대합니다.

동봉한 “포석 조명희전집”과 ‘문학기행’은 참조가 되었으면 하고 보냅니다. 진작 보내려던 것입니다만 동인지 “뒷목문학”에서 ‘벽암 특집’을 시도했으나 제대로 못 되었습니다.

저의 책 “재생 인생”은 보잘 것 없으나 포석에 관한 것(하바롭스크의 민들레, 동백꽃…) 벽암에 관한 것(북에서 죽은 어느…)이 있어서 선생님의 청주 사랑, 농민 사랑(농기구를 노래하여)을 시집 도처에서 발견하여 기뻐합니다.

낙동강 칠백 리하면 조포석(趙抱石)이를 떠올리며 구포벌, 을숙도를 다녀오기도 합니다. 가까이에 계시어 또 하나의 도종환을 더 만드셨으면 좋을 걸 하는 욕심도 없지 않았습니다. 뜻 두신 모든 일이 잘 이루어지길 빕니다. 그러자면 건강이 제일이지요.

2001년 8월 24일

조 성 호

조성호씨가 이동순 시인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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