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동순-안도현 시인이 사돈 맺은 사연

이동순 시인과 안도현 시인

세상살이를 하다보면 그 사람이 좋아서 자꾸 가까이 하고싶고 또 그 반대의 경우인 사람도 있다. 시인 안도현은 늘 가까이 하고싶던 후배이다.

돌이켜보면 내가 지난 1978년, 안동간호전문대학 교수로 일하던 시절, 경주 신라문화제에서 공식적인 초청이 왔고 거기 전국고교백일장 심사위원으로 참석하게 되었다. 그때 발제자가 미당인지 목월인지 뚜렷하지 않다.

하루가 저물어 심사결과도 발표하고 가방을 챙겨 떠나려 할 때 안경을 낀 한 고등학교 재학생이 찾아왔다. “저는 대구 대건고등 2학년 안도현입니다. 선생님 작품을 창비에서 잘 읽었습니다. 인사드리려고 왔습니다. 선생님께 제 작품 평을 듣고 싶은데 허락해주신다면 곧 우편으로 보내겠습니다.”

안도현은 그날 심사에서 아마도 입선이 되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나는 그 요청을 기꺼이 수락하고 안동으로 서둘러 돌아왔다. 그로부터 한 주일 뒤 과연 누런 봉투가 왔고 거기엔 손으로 쓴 20여 편의 작품이 들어있었다. 그런데 원고를 읽으면서 꽤 실망했다.

도현 학생이 보낸 작품은 1970년대 양성우, 김준태 류의 민중시 일색이었다. 그래서 곧장 답을 써보내기를 “시창작의 방법은 참으로 다양한데 너무 두드러진 시류에 구속되지 말고 여러 방법을 두루 경험한 뒤 그때 선택하는 것”이라고 다소 엄중한 충고를 주었다.

그 도현은 고등 졸업 후 전주 원광대로 진학했다. 대학 재학 중 동아일보신춘문예로 당선해서 당당하고 어엿한 시인이 되었다. 당선작품은 ‘서울로 가는 전봉준’이다. 깊고 강렬한 인상을 받았었다.

될 성 부른 나무는 어딜 가도 저절로 자란다는 그런 분명한 느낌을 받았다. 이후 도현은 전북의 중학교 국어교사, 전교조 해직교사 등을 거치며 환난과 시련의 힘든 세월 속에서 <연어>라는 밀리언셀러를 발표한다. ‘어른을 위한 동화’라는 새로운 장르의 개발이었다. 명성이 높은 큰 작가의 반열에 오른 것이다.

내가 청주 충북대 재직 시절, 간간히 서울 문단행사에 가면 거기서 늘 만났다. 도현은 멀리서도 일부러 달려와 인사를 각별히 하곤 했다. 부드럽고도 강렬한 시인의 풍모를 갖춰가고 있었다. 거기다가 내가 발간한 “백석시전집”을 읽고 백석 시인의 작품세계에 흠뻑 심취해서 거의 정신적 양자를 자처하고 있었다. 그런 모습이 참 미덥고 흐뭇했다.

오늘 이 편지는 안도현이 전북 완주의 우석대학교 교수가 되던 무렵, 내가 외부 심사위원으로 참가했는데 공채 확정이 난 뒤 보내온 감사편지다. 돌이켜 보면 도현과의 인연은 꽤 오래 되었다.

2018년 그가 <백석평전>을 탈고한 직후, 우리는 만나서 원고를 읽고 잠도 같이 잤다. 나는 그 틈에 전격적 제의를 했다. “우리가 사돈을 맺게 되면 어떨까 하네.” 말이 씨가 되어 결국 우리는 사돈이 되었다. 나이 11년 차이의 사돈지간이 되었다.

도현의 고교시절 백일장 심사위원으로 만난 그 첫 인연이 드디어 사돈으로까지 맺어졌으니 이것도 필연의 과정이었던가? 내가 좋아하는 사람을 더욱 가까이 두고싶은 내 꾸준한 갈망이 이룬 결실이라 하겠다.

도현의 딸이 내 며늘아기가 되었고 아주 귀여운 손녀딸까지 나서 이제 두 돌이 지나 여기저기 뛰어다닌다. 살면서 이룬 여러 기적들 중의 하나다. 사람의 인연이란 참 묘하고 불가해(不可解)하다.

도현은 여러 해 머물던 우석대를 떠나 지금은 천안의 단국대학교 문창과로 옮겼다. 수십 년 살아오던 전주를 떠나 자신의 출생지인 예천 고향으로 돌아와 포근한 보금자리를 마련했다.

안도현 시인이 이동순 시인에게

李 東 洵 선생님,

더운 날씨에
먼 길 마다하지 않고 와 주셔서
몸둘 바 모르겠습니다.
선생님께서 관심을 가져주신 덕분에
일전에 우석대에서 통보를 받았습니다.
가까이 계시면 찾아뵙고 인사를 드릴 텐데
그러지 못해 아쉽고 죄송합니다.
혹시라도 전주 근방에 들르시거든
꼭 저에게 연락주십시오.
더운 바람 쫓으시라고 부채 하나 보냅니다.
건강하셔야 합니다.

2004년 8월 7일

전주에서

안 도 현 올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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