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동순의 추억과 사유] 호방한 강태공 전영태의 ‘유혹과 몰입의 기술’
무언가를 치밀하게 궁리하거나 조직적 체계적 준비를 하지 않고도 다소 산만한 느낌으로 살면서 큰 성과를 이루는 그런 친구가 있었다. 비평가 전영태(田英泰, 1949~ )가 그 주인공이다.
그는 1973년 중앙일보신춘문예 평론 당선자로 그해 ’73그룹’ 조직에 참가하지 않았다. 그런 조직이나 모임에 가담하는 걸 싫어했다. 서울 종로의 밤거리를 걷다가
우연히 여러 술꾼들과 골목에서 인사 나누었다. 커다란 체구에 무표정하고 우락부락한 인상이었다. 살색은 거무스레 눈빛은 굵은 안경테 뒤에 번쩍였다. 악수하며 맞잡은 손아귀의 힘이 억셌다.
그로부터 세월이 한참 흘러서 1980년대 초반 청주의 충북대 국문과가 설립되고
신임교수 10명이 뽑혀 부임하게 되었을 때 나는 시 분야, 소설과 비평 분야 전공으로 부임한 신임 동료교수가 전영태였다. 그러니까 우리는 70년대 초반의 짧은 만남 이후 두 번째로 만난 구면이었다.
그로부터 7년 정도를 같이 지냈다. 내 연구실 바로 옆방이 그의 연구실이라 수시로 왕래했고 저녁이면 어깨를 나란히 겯고 청주 시내 술집들을 전전하는 밤거리의 부랑자였다. 한창 원기왕성하던 30대 시절, 우리가 놀러다닌 여러 술집들, 그 우쭐대던 철부지, 혹은 고삐 풀린 망아지의 기억들이 많다. 충북대 국문과 시절, 교수의 절반은 서울에서 잠시 내려와 한 이틀 수업을 몰아치고 다시 서울 본가로 올라가기가 바빴다.
청주에 머물 땐 숙박비를 아끼느라 싸구려 단골여인숙을 정해서 머무는데 그런 날 밤은 자정을 넘기면서 술집순례에 바빴다. 청주에 집이 있는 나는 덩달아 그 리듬에 휘말려 공연히 자정을 넘기는 날이 많았다. 지금 생각하면 참 덧없고 소모적인 시간들이었다. 전영태 교수는 밤거리 취객들 중 맹장이었다. 잘 놀고 호쾌하며 언제나 분위기를 주도했다. 풍류랑으로서의 자질을 두루 갖추었다.
낚시에 워낙 골몰하느라 대학원 박사학위논문 발표일도 잊어버릴 정도였다. 결국 그 일 끝에 박사학위를 받지 못했다. 그의 인도로 어느 해 여름방학 때 제자 송경상 군을 데리고 나랑 셋이서 물도 맑고 풍치가 좋은 동강 유역으로 낚시를 떠났다.
강가에 텐트를 치고 야영을 하며 온종일 루어낚시로 릴을 던지고 감는 쏘가리 낚시였는데 나는 그에게 낚시의 모든 방법과 지혜를 배웠다.
그런데 그 첫날, 전문가인 그는 불과 두 마리, 초보자인 나는 일곱 마리나 잡았다.
낚시 제자에게 스승은 얼마나 소주폭탄을 퍼붓던지, 강원도 동강 어라연 일대의
그 지극히 맑고 청정하던 분위기가 아직도 새롭다. 나는 결국 ‘쏘가리’란 제목의 시를 써서 낚시계의 스승 전영태에게 헌시로 바치었다.
80년대 후반 다정하던 동료 전영태는 중앙대 문창과로 홀연히 떠났고, 그 여파에 힘 입어 나도 남도의 직장으로 옮겼다. 내가 보내준 신간시집을 받고 그가 보내온 답신인데 역시 너펄너펄한 문장에서 그의 성격과 습벽, 말씨까지 느껴진다.
중간에 지운 부분은 타인에 대한 코멘트라 일부러 가리고 보이지 않게 하였다.
東洵 居士께
보내준 시집 반갑게 받았소. 시집이 나왔다는 소식을 듣고 이 친구가 나를 잊지 않았으면 한 권 부칠 텐데 하고 은근히 부아를 돋구려는 찰나에 날아온 시집이라서 더 반갑구료.
생각해보면 30대 황금기를 같이 보낸 친구로서 서로 직장을 바꾸면서 너무 소식이 없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드는 순간에 당신 시집은 나에게 여러 의미를 던져주는 것 같소.
나는 여전히 씩씩거리면서 잘 놀면서 심통도 가끔 부려가면서 잘 놀고 있는데, 그대의 건강은 어떻소? 알콜계와 인연을 끊고 지내는지 그것이 무엇보다 궁금하구료. (중략)
애들과 애들 엄마는 잘 지내는지? 특히 부인께 안부 전하면서 田某도 부인을 잊지 않고 있다는 사실을 강조했으면 하오. 혹시 이 편지에 답장을 낼 의향이 있다면 당신의 집 주소와 전화번호를 명기해주구려.
최근에 집을 옮겨 옮긴 김에 옛날에 좋아하던 음악감상 취미를 살려 고가의 오디오 세트를 마련하고 돈이 생기는대로 CD와 레코드판을 구입, 아침 저녁으로 음악을 즐길 정도로 내면생활에 치중하는 삶을 살아가고 있다는 사실을 알려주고 싶고, 당신도 여전히 고물 축음기에 SP판을 걸어놓고 희희낙락하고 있는지 알고 싶소.
그 전에 집에 들렀을 때 샬리아핀의 판을 걸어놓고 득의의 웃음을 짓던 당신을 은근히 조롱하던 나의 변신에 당신도 놀랄 거요. 서울에 오면 꼭 전화하고 만납시다.
나도 하대(下大)하면 당신한테 연락해서 자갈마당이나 어디든 계집의 분냄새나 같이 맡고 싶소. 잊지 말기를. 두서 없는 이야기 지껄인 걸 귀담아 듣지 말고 계속 건강하면서 계속 계속 시집을 내서 서울의 종이값을 올리길 바라오.
전 영 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