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동순의 추억과 사유] 어린이날 떠오르는 선한 미소 ‘정채봉’
아동문학가 정채봉(丁埰琫, 1946~2001)이 55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난지도 어느 덧 스무 해가 넘는다. 전남 승주군의 바닷가에서 태어난 그는 어려서 어머니를 잃고 아버지마저 일본으로 떠나 고아와 같았다. 할머니 손에 성장했으며 광양농고에 진학해서 다녔다.
처음엔 학교 온실관리 당번을 하다가 어느 날 실수로 난로 불을 꺼뜨려 화초들이 모두 얼어죽었다. 이후 도서관 당번으로 쫓겨가서 그의 운명적 길이 환히 열리게 되었다. 동서고금의 고전을 두루 읽고 한국문학사의 대표작품을 단숨에 섭렵했다.
읽은 감흥을 이기지 못해 채봉은 친구들에게 손편지를 써보냈다. 거기엔 책을 읽은 느낌과 에세이, 때로는 창작동화, 소설도 써서 보냈다. 정채봉의 작가수업은 아마 그때부터 형성되었는 지도 모른다.
그렇게 시작된 문학에 대한 열병은 기어이 동국대 국문과 진학으로 이어졌고 구체적 작가를 꿈꾸는 삶의 실천으로 펼쳐졌다. 1973년 정채봉은 동아일보신춘문예
동화 부문에 응모해서 당선되었다. 나는 같은 해 시 당선자로 세종로 동아일보 5층 시상식장에서 그를 처음 만났다.
첫 느낌은 굵고 커다란 눈이 마치 산노루를 닮은 인상이었고 늘 웃는 표정을 하고 있는 선한 기운이 감돌았다. 신춘문예 당선 이후로 5년 동안 별반 뚜렷한 방향성을 찾지 못하다가 <샘터> 잡지사 편집부 일을 맡으면서 그의 화려한 시간이 펼쳐진다. 창조적 기획과 아이디어의 실현으로 <샘터> 잡지는 단숨에 광범한 독자를 확보한 최고의 인기잡지가 되었다.
우선 손바닥에 쏙 들어오는 부담없는 부피, 읽으면 중량감이 느껴지는 내용들은
독자들의 갈채와 환호를 받았다. 특히 정채봉이 이끌어가는 코너였던 ‘생각하는 동화’는 샘터의 대표적 상징이었다. 이걸 읽으려고 서점에서는 독자들이 선 채로 <샘터> 새달호를 들고 있는 그런 진풍경이 펼쳐졌다.
이러한 활동을 기반으로 동화집 “물에서 나온 새”, “오세암” 등을 잇따라 베스트셀러로 진입시키며 커다란 문학상도 계속 받았다. 특히 “오세암”은 영화로도 만들어져 많은 관객들을 깊은 슬픔으로 울게 했다.
정채봉의 작품에 스며있는 기본적 환경은 자신의 가련했던 소년시절 실루엣이다.
그 가슴 아린 연민과 애달픔이 독자들의 깊은 공감으로 이어졌다. 언젠가 정채봉으로부터 동화집 서평을 요청 받고 ‘정채봉은 물활주의자다’란 제목으로 마치 시 같은 동화작품을 깔끔하게 완성시키는 그의 작가세계를 높이 평가했는데 본인도 그 글을 읽고 몹시 만족스러워했다.
이 편지에 등장하는 ‘어려운 부탁’, ‘품값’이란 다름 아닌 자신의 작품집에 대한 서평을 써준 고마움의 표시로 보인다. 나를 ‘늘 웃음 웃는 선한 모습’이라 했는데 이는 정채봉 자신의 이미지이기도 하다. 정채봉과 아주 친밀했던 정호승 시인은 작가의 친필편지를 두 통 갖고 있다고 했다.
나도 스크랩에서 찾아보니 딱 두 통이 있는데 대개 짤막하다. 정채봉의 문학수업은 편지쓰기였던 듯하다. 어느 인터뷰에서 그가 했던 말이 생각난다.
“편지 참 많이 썼습니다. 여학생이 많을 것 같지만 그렇지 않아요. 마음 속에 있는 불만, 욕구, 기쁨, 슬픔. 이런 것들을 쏟아낼 대상이 없잖아요? 남들처럼 아빠, 엄마가 있는 것도 아니고..편지는 나하고 나 아닌 다른 세계를 만나게 해주는 유일한 통로였지요.”
지금은 편지가 사라진 시대이다. 하지만 편지가 지닌 따뜻함, 다정함, 은근한 속삭임, 위로, 격려, 부추김, 건강의 기원, 행복과 희망의 감지 등등 이 여러 가지 미덕을 다시 되살릴 수 있도록 우리 모두가 편지쓰기를 새롭게 펼쳐가면 어떨까 한다.
그것은 가파르고 생기가 없는 우리 삶에 분명 획기적인 변화를 불러 오리라.
東洵 兄께
늘 웃음 짓는
선한 모습이 눈에 선합니다.
어려운 부탁을 들어주셔서 고맙구요.
서울 오시면 연락주십시요.
품값을 따로 치르겠습니다.
더 힘차시고!
1991년 3월 25일
정 채 봉 (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