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동순의 추억과 사유] 신간발행 중독증과 제자의 서명 요청

이동순 시집 <철조망 조국>

그간 시집이나 저서를 숱하게 발간하곤 했지만 제자들이 자기 선생의 신간을 직접 구입하는 경우는 거의 없거나 드물다고 해야겠다.

어쩌다 어디선가 내 시집을 구해와서 서명을 요청하는 경우는 썩 드물게 있었다.
그런데 이 편지의 주인공은 아주 특별한 경우다. 자기 선생의 시집 발간 소식을 듣고 일부러 서점을 찾아가서 시집을 현금을 주고 구입했기 때문이다.

이 제자는 재학시절 한국현대문학사 강좌의 세미나 때 발표와 준비를 워낙 잘 해서 칭찬을 받았다. 발표도 잘 했지만 토론을 특히 돋보이게 했다. 문제의 핵심을 명료하게 파악해서 자신의 견해를 설득하며 정당화시키고 질문자의 궁금증에 대해 아주 친절하고 자세하게 그가 납득할 때까지 답변을 정성껏 해주었다. 이러한 토론 자세에 대해 높은 평가를 했다.

칭찬이면 고래도 춤춘다고 했던가. 이 학생은 그후 더욱 열심히 공부했고 두드러진 활동을 펼쳤다. 대학원은 아쉽게도 다른 대학으로 진학을 했지만 석사논문 테마가 백석 시인이라 종종 전화로 궁금한 것을 의논하고 구체적 상담도 청했었다.
내가 1991년 시집 <철조망 조국>을 발간했을 때 신문에서 신간소개를 접하고 그 시집을 득달 같이 구한 소식을 전해왔다.

이 얼마나 기쁘고 흐뭇한 소식인가. 아마도 학창시절 내 칭찬에 대한 보답이리라.
만약 내가 호된 꾸중을 했더라면 과연 내 시집을 일부러 구입할 수 있었을까.

나에게 이런 제자들로 넘쳐나게 된다면 어떤 저서도 곧 재판을 찍고 판매부수가 기하급수로 늘어날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나의 갈망일 뿐 제대로 팔리지도 않는 저서만 줄곧 발간하면서 나는 또 시집이나 각종 저서를 낼 새로운 궁리나 기획을 한다. 가히 신간발행 중독증이라고나 할까.

그동안 이렇게 저렇게 책의 꼴을 갖춘 저서가 무려 70권에 다다르니 그것이야말로 중독증이 아니고 무엇인가.

이동순 시인 제자(연정)의 편지

교수님께

시집 <철조망 조국>의 탄생을 진심으로 축하드려요.

교수님. 전에 시집이 곧 출간될 것이라는 선생님의 말씀을 듣고는 몇 달간은 늘 서점에서 찾곤 했었어요.

그런데 9월엔 이런저런 일들에 밀리다 보니 (새 학기가 시작된 탓에) 어제 교수님의 말씀을 듣고서야 대하게 되었지요. 사실 제가 먼저 알지 못했다는 것에 무척 속이 상했었죠.

그렇지만 어제 서울서 밤 늦어서 천안에 왔음에도 불구하고 막 닫으려고 하는 서점 문을 밀치고 들어가서는 너무나 기쁜 마음으로 <철조망 조국>을 빼내어 들었습니다.

그리곤 집에 와서는 아주 깊은 밤까지 소중히 시집을 안고 있었지요. 교수님, 이만하면 그래도 교수님의 제자로서 아주 많이 뒤처지진 않겠지요. 네? (좀 억지인 감도 있지만)

교수님, 소중한 글을 읽게 해주신 교수님께 깊은 감사를 드립니다.

뵙게 될 때까지 몸 건강히 안녕히 계셔요.

1991년 10월 9일

연 정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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