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동순의 추억과 사유] 은사 김춘수 시인과 ‘일관성에 대하여’

 1974년 봄, 대학원 석사과정 재학시절 이동순 시인(왼쪽)과 김춘수 시인. 대구 경상감영공원 뜰을 거닐며 찍었다고 한다. 웃는 얼굴이 극히 드문 김춘수 시인의 이례적 사진이라고 이 시인은 썼다.

김춘수(金春洙, 1922~2004) 시인은 대학시절의 은사였다.

1960년대 후반, 경북대학교 문리대 국문학과에 입학해서 현대문학사, 시론 등의 강의를 들었다. 성품이 차갑고, 온유함을 느끼지 못했다. 그러나 강의는 시종일관 멋스럽고 지적 매력이 감도는 분위기를 지녔다. 오죽하면 강의노트를 받아적으며 기침소리까지도 기록했을까.

대학원에 진학했을 때는 석사과정 지도교수를 맡으셨다. 졸업논문은 1930년대 김기림 모더니즘의 서구수용 연구였다. 지도방식은 오로지 자율과 자유방임이었다. 막막한 벌판에 혼자 내던져진 심정이었지만 그저 선생님이 좋아서 종일 가까이 머물러 있기만 해도 행복했다. 그것은 오로지 나의 일방적 짝사랑이었다.

그 후 선생님께서는 경북대를 떠나 영남대로 옮겼다. 거기선 곧 학장을 맡으셨다. 뜻밖에도 1980년 봄 광주민중항쟁을 총칼로 진압하고 들어선 잔학무도한 정권의 창당발기위원이 되었다. 나중에는 그 정당의 국회의원까지 지냈다. 스승의 분별을 잃은 남루한 선택을 지켜본 뒤 사제간의 관계는 끊어졌다. 내가 일방적으로 끊었다는 말이 맞다. 옛 스승에 대한 사랑과 존경심은 씻은 듯이 사라졌다.

이 사진은 1974년 봄, 대학원 석사과정 재학시절 대구 경상감영공원 뜰을 거닐며 찍었다. 웃는 얼굴이 극히 드문 김춘수 시인의 이례적 사진이다. 50대 후반 쯤으로 짐작된다.

삶의 길을 종생까지 일관되게 보전하는 일이 얼마나 어려운지 스승은 제자에게 몸으로 보여주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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