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동순의 추억과 사유] 등단 40년 고운기 시인의 ‘고요의 이유’ 사례
고운기(高雲基, 1961~ ) 시인은 전남 보성 출생이다. 한양대 국문과와 연세대 대학원을 졸업했다. 한국 고전문학, 그 중에서도 <삼국유사>에 대한 연구가 깊어 여러 권의 저서를 발간했다.
<길 위의 삼국유사>, <우리가 정말 알아야 할 삼국유사> 등이 그것이다. <삼국유사> 및 일연스님 관련 유적지 답사와 해설로는 그를 능가할 사람이 없다. <삼국유사>의 문학성에 관해서는 가히 국내 최고의 전문가다.
1983년 동아일보 신춘문예 시가 당선되어 문단에 나왔으니 나와는 같은 신문의 동문이다. 시창작 활동도 활발해서 <밀물 드는 가을저녁 무렵>, <섬강 그늘>, <나는 이 거리의 문법을 모른다>, <자전거 타고 노래 부르기>, <구름의 이동속도>, <어쩌다 침착하게 예쁜 한국어> 등의 시집을 꾸준히 발간했다.
‘시힘’ 동인이며 현재 한양대 문화컨텐츠학과 교수로 있다.
고운기의 여러 대표시 중에 ‘나무는 바람을 만들고’를 나는 특히 좋아한다. 이 시는 바람에 대한 존재론적 통찰이 아름답게 갈무리되어 있다. 우리가 삶에 지치더라도 더 이상 흔들린다고 생각하지 말자. 내가 주체가 되어 흔들고 있다는 자신감을 가지는 것이 무엇보다도 중요하다. 그래야만 삶의 좌절과 실패가 없다. 시인은 그런 지혜를 우리에게 한 수 가르쳐준다.
떡갈나무 가지가 흔들리네요, 세상의 가지들이 흔들려
지상에 바람 먼저 일으켰다는군요
나무는 바람을 만들고
바람은 나무와 나무가 전하는 안부
바람 속에는 가지 찢기운 소식도 있더군요
내 두 손으로 받아 읽다가 접어두면
가슴 속 어디선가 맴돌며 구르는 잎의 소리
떡갈나무 가지가 흔들리는 날
더 이상 흔들리는 것 아닌 흔드는 것
-시 ‘나무는 바람을 만들고’ 전문
고운기 시인이 최근 내 등단 50주년 시집 <고요의 이유>를 읽고 정성스런 손 편지를 보내왔다. 정갈한 필체의 가지런한 세로 쓰기로 써내려간 편지. 나는 이 그윽한 편지를 읽으며 우리 옛 선비들의 고담한 전통이 지금도 여전히 살아서 그 정신의 맥을 잇고 있다는 확신을 가졌다.
세상 모든 것이 문자와 카톡, SNS를 이용한 간편한 방식으로 대세를 이루는데 고운기 시인의 이런 편지를 받으니 얼마나 감격스러운지 모르겠다.
李 선생님께
보내주신 詩集을 받고도
답장을 드리지 못한 채 여러 날이 지났습니다. 학기말의 분주함에다 핑계를 댑니다만 죄송스럽기 그지없습니다. 登壇 50년을 뜻깊게 기념하는 귀한 책을 제게도 보내주시니 감사하고 영광스러울 따름입니다. 고맙습니다.
한 편 한 편이 세월과 交感하는 아름다운 흔적이어서 이것으로 살아온 지난날의 선생님의 풍경이 떠오르지만 더불어 읽는 저 또한 비슷한 추억이라든지 기억을 더듬게 되었습니다. 값지고 행복한 시간 주신 것, 다시 한 번 감사드립니다.
저는 선생님보다 꼭 10년 뒤지니 올해로 40년입니다. 졸작(拙作) 몇 편으로 선생님의 흉내를 내볼까 하는데 나중에 받으시거든 그저 가상(可賞)케나 여겨주시길 빕니다.
바야흐로 더운 계절, 늘 옥체 강안(康安)하시옵길, 근간 반가운 얼굴 뵈올 기회 또한 만들어지옵길 바랍니다. 시집 발간을 축하드리며, 두서없는 글월 줄입니다.
임인(壬寅, 2022) 6월 길일(吉日)
고 운 기 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