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동순의 추억과 사유] 백석 애인 ‘자야’의 35년 전 편지 다시 읽으며

이동순 시인이 엮은 <백석시전집>

옛 편지를 정리하다보디 백석(白石) 시인의 애인이었던 할머니 자야(子夜) 여사의 편지가 많이 쏟아져 나온다.

정식 문장수업을 받지도 않았을 텐데 문장의 흐름이 반반하고 단정하다.
문학에 대한 관심이 남달랐고 또 1930년대 문학인들과의 교유가 많았던 덕분이다.

마치 내간체를 읽어가는 듯 강물처럼 담담히, 때로는 격정을 쏟기도 하고
가슴 속 켜켜이 쌓인 마음의 실타래를 하염없이 풀어내는 솜씨가 비범하다.

이 편지는 1930년대 후반, 사랑의 숨바꼭질 끝에 백석 시인을 떠나보내고
영영 다시 만나지 못한 후회의 마음을 낱낱이 펼쳐내려는 초입의 단계이다.

‘Regret’이란 영어 단어를 표제로 삼은 것이 이채로운데, 사실 자야 여사는
중앙대 영문학과 졸업생이었다. 6.25전쟁 중 부산의 전시합동대학에서 이양하 교수의 강의를 들었다.

이런 편지를 백여 차례 보내오며 그것을 내가 다시 컴퓨터에 담아 정리한 것이
바로 <내 사랑 백석>(문학동네)이란 회고록이다.

시인과 기생의 사랑은 과연 특별했다. 두 사람 사이에 이별이 있었으니 이처럼 눈물겨운 사연이 빚어졌지 만약 함께 살았다면 단지 통속적 흐름이었으리라.

세상에 감추어진 아름다운 사랑의 이야기는 밤하늘 별처럼 많고도 많을 것이다.
그 사연을 만들었던 주인공들은 다 어디 갔나.

이젠 백석도 가고 그를 사랑했던 기생 자야 여사도 떠나고 메마른 세상엔 이들의 사랑 이야기만 남아서 그 시절을 증언해줄 뿐이다.

자야의 편지

“Regret(후회)”

커다란 부인 방에 왜소한 몸 없는 듯이 누워서 모든 세상사 잊은 듯 통 속같이 부인 가슴 적적히 지나쳐 적막감에 지루하야 몸을 틀어 뒤치고 목침을 돋우고 나니
깜짝 20대의 가장 수줍던 역사 얽힌 모습이 환상에 비치니 꿈을 깨고 청춘이 회생(回生)된 듯 엉뚱한 생동감에 몸을 다시 뒤쳐서 반듯이 바로 누워 두 손 뒤로 허리에 받치고 눈만 깜빡이는데 도저한 추억이 분명 꿈속에서 내 청춘이 아니고 도저한 추억이 분명 꿈속에서 내 청춘이 아니고 꿈을 깬 흐뭇한 생소한 흥분된 추억!

만리원정(萬里遠征) 가신 님 기다리듯 기다려지는 마음.
했던 말 다시 하기를 만리성(萬里城)을 쌓아 올릴 만치 차곡차곡 다지던 백년가약. 그 무엇인가 부족해서 불안해서 고통과 절망에서 울던 그 어린 생명. 그 아니면 이 생명 구할 이가 없을 것만 같아 흐느끼던 한 많은 어린 영(靈)이여!
당신이 살아서는 ‘이별이 없는 나의 마누라’라고 하시던 그 중천금의 말씀을 어느 세상에 몇 년 다시 태어난들 잊고 아니 찾아뵈오리까.

1988년 4월 14일 子夜

자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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