美 동북아전략 20년간 지연시킨 돌발적 사건들-6.25전쟁과 9.11테러

6.25 당시 중공군의 인해전술

[아시아엔=이종은 아메리칸대 국제학부 강사, 북한계발연구소 연구위원] 세계정치에서는 예상치 못한 사건이 발생하여, 국제정세의 흐름을 바꾸는 현상을 ‘블랙스완’, 또는 ‘검은 백조 현상’이라고 부른다. 미중관계도 두개의 돌발적인 역사적 사건들로 인해 당시 미국 정책가들이 추구한 외교방향과는 다른 전환을 겪어야 했다.

1949년, 미국의 트루먼 행정부는 중국 내전에서 공산당이 승리할 것이라는 현실을 인지하면서, 공산중국을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정책논의를 하고 있었다. 조지 케난, 딘 애치슨 등 당시 국무부 관료들은 중국과의 갈등을 최소화하는 방안을 건의했다. 당시 애치슨 국무부 장관은 중국과 전략적 제휴로 중국-소련의 동맹 균열을 유도하고, 동북아에서 소련의 전략적 영향력 억제를 위해 트루먼 행정부가 중국-대만 갈등에 개입하지 않도록 노력하였다.

미국 제33대 대통령 해리 트루먼

1950년 1월 12일 애치슨은 기자들과 만난 자리에서 이른바 ‘애치슨 라인’(Acheson Line)을 거론하면서, 대만은 미국의 안보 경계선 범위 밖이라고 암시했다. 비록 공화당의 조 매카시 상원의원 등 강경파들이 트루먼 행정부가 중국의 공산화를 방치했다고 압박하였지만, 트루먼 행정부는 중국의 내전 상황이 진정되면 중국과 국교정상화를 논의할 방안을 고려하고 있었다. 실제로 1950년 3월, 애치슨은 “중국의 유엔 가입을 용인할 수 있다”는 의사를 밝혔다.

하지만 그 직후 6.25 한국전쟁이 발생하면서, 미국의 대중외교는 20년 동안 지연되는 결과를 가져왔다. 트루먼 행정부는 한국전 참전을 결정했고, 그해 가을 중국의 참전으로 한반도는 미군과 중국군의 전투현장이 되었고, 미중수교 가능성은 사라졌다. 이에 미국의 아시아 정책은 전반적인 대공산권 봉쇄로 전환해 미국은 일본·대한민국·필리핀·대만과 안보동맹을 체결하고, 이후 베트남전에 개입했다.

그로부터 20년 후, 닉슨 행정부는 다시 대중국 외교접촉을 시도하면서 중소 분열 유도전략을 재개했다. 1972년 닉슨은 중국을 방문한 최초의 미국 대통령이 되었다. 1979년 카터 행정부는 중국과 국교정상화를 통해 소련 패권을 함께 견제하는 공동보조를 선언했다. 1970년대에 비로소 성사된 미중수교는 냉전시기 후기, 미국이 전략적 균형에서 소련에 대한 우위를 달성한 요인 중 하나로 평가된다.

만일 한국전쟁이 발생하지 않고, 미중 전략적 제휴가 20년 더 일찍 성사되었으면, 냉전 흐름이 어떻게 변천했을까? 국내 정치적 반발에도 불구하고 트루먼 행정부 또는 차기 아이젠하워 행정부가 냉전초기에 미중수교를 이룩하고, 중국이 소련 영향권에서 조기 탈퇴하도록 유도하는데 성공했으면 對소련 패권경쟁에서 보다 일찍 전략적 우위를 통해 소련 압박 가능성이 커졌을 것이다. 하지만 한국전쟁은 이런 전략적 가능성을 모색할 기회를 차단해버리고 미국은 20년 지연 끝에 동북아 전략을 재조정할 수 있었다.

부시 대통령 부자, 아버지(왼쪽)와 아들

2001년, 부시 행정부는 임기 초기에는 강경한 대중외교를 실시할 의향을 내비치고 있었다. 대선후보 시절, 부시는 클린턴 행정부가 중국을 ‘전략적 파트너’로 묘사한 것을 비판하면서, “중국은 전략적 경쟁자”라고 표현했다. 부시 후보는 중국 위협에 맞서 대만을 보호하겠다는 굳건한 의지를 보였고, 부시 행정부 주요 공직자가 될 예정이던 럼스펠드와 울포위츠 역시 미국이 명확한 대만 수호 전략을 취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대선 당시 부시의 외교정책 자문이던 콘돌리자 라이스는 잡지에서 “중국은 아시아 힘의 균형을 자국에게 유리하게 기울게 할 수 있는 신생 강대국”이라고 했다.

2001년 1월 취임식 이후 부시는 주요 정상들과 전화통화 하면서, 중국의 장쩌민 주석은 제외했다. 2001년 4월 미국 E-3정찰기가 중국 전투기와 충돌해 동반추락했을 때, 양국은 책임소재와 미군 조종사 귀환을 놓고 2주간 대치했다. 사건 종료 이후 부시 행정부는 대만에 1992년 이후 최대 규모의 무기수출을 했다. 같은 해, 미국 국방부는 중국을 잠재적 위협으로 명시하고 대처방안을 제시하는 국방보고서 초안을 작성했다.

9.11 테러

하지만 그 직후 9.11테러가 발생하면서 부시 행정부의 대중외교는 재조정됐다. 2001년 9월 11일, 알카에다 테러집단이 세계무역센터와 펜타곤을 공격하자, 미국 외교정책은 중국에서 중동으로 외교 초점을 전환해야 했다. 즉 중국을 대테러전쟁의 전략적 협력자로 인식해 중국에 대한 비판 수위를 완화하고, 신장자치구에서 실시되는 중국의 반테러 작전 역시 묵인했다. 2001년 10월 18일 부시는 상하이를 방문해 중국이 테러와의 전쟁에서 미국과 협력하고 있다고 호평했다. 2004년 라이스 국가안보보좌관은 “미국이 중국과 정직하고, 협조적이며, 건설적인 관계를 만들고 있다”고 했다.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

오바마 행정부 시절, 미국 정책입안자들 사이에서 “다시 아시아로 회전해야(pivot) 한다”는 주장이 제기되기 시작했다. 하지만 중동에서 지속되는 전쟁과 혼란은 미국의 전략적 재원과 시선을 여전히 중동에 집중케 했다. 이에 트럼프 행정부 마지막 해까지 미국 외교전략은 중동현안에 고착돼 있었다.

미국이 최근 아프가니스탄과 시리아에서 철군을 완료하면서 (철군방식은 논란이 많았지만), 바이든 행정부는 보다 적극적으로 중국을 전략적 경쟁자로 견제할 수 있는 여유를 갖게 됐다. 대만·신장자치구·남중국해 등 지역에서 바이든 행정부는 첨예하게 중국과의 외교적 이견을 표출하고 있다. 또 ‘자유롭고 개방된 인도-태평양 수호’를 선언하면서, 쿼드와 오커스(AUUKUS) 등 지역 네트워크를 통해 중국의 지역패권 확장에 대응하고 있다.

만일 9.11 테러가 발생하지 않았으면 동북아의 지정학적 동향에 어떤 변화가 있었을까? 중동분쟁에 장기간 개입하는 대신 부시 행정부가 20년 더 일찍 중국과의 전략적 경쟁에 집중할 수 있었을까? 2001년 당시 중국은 현재에 비해 군사적·경제적 역량이 크게 못 미쳤다. 지금의 바이든 행정부보다 더 압도적인 국력 우위를 보유하고 있던 부시 행정부가 적극적인 대중견제를 실시했다면 중국의 호전적인 변화와 상승세를 조기에 억제하고, 변화를 유도했을 가능성이 높았을 것이다. 하지만 돌발적으로 발생한 9.11 테러는 미국이 20년 후, 보다 더 강성하고 담대해진 중국과의 전략경쟁에 본격적으로 돌입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물론, 한국전쟁과 9.11테러가 발생하지 않았더라도 미국 정책입안자들이 추구하는 對中외교에 여러 저항이 있었을 것이다. 만일 1950년대에 트루먼과 아이젠하워 행정부가 중국과의 국교정상화를 시도했다면, 또 2000년대 초기 부시 행정부가 강경한 대중노선을 실시했다면 냉전시대 부활을 우려하는 미국 국내여론의 격렬한 반발을 불러왔을 것이다.

하지만, 미국의 ‘냉전시기’ 외교정책은 여러 난관을 거치면서 종국에는 중국과 전략적 제휴를 선택했다. 미국의 ‘냉전후기’ 외교정책 역시 여러 우려에도 불구하고 종국에는 중국과 전략적 대결 방향으로 전환하는 추세다. 그렇다면 한국전쟁과 9.11테러라는 역사적인 ‘블랙 스완’ 사건들은 미국의 전략적 지향의 궤도를 15~20년 동안 ‘탈선시키는’ 효과를 가져왔다”고 분석할 수 있다.

카터 대통령과 김일성 주석. 김 주석 뒤로 김정일 위원장이 보인다

북한 김일성이 한국전쟁을 시작했을 때, 그리고 알카에다의 빈 라덴이 9.11테러를 시작했을 때, 그들이 미국의 대중국 전략에 차질과 혼선을 주려는 의도는 없었을 것이 분명하다. 하지만, 그들이 일으킨 사건들보다 돌발적인 여파에 의해 탈선한 미국의 전략궤도가 오히려 더 큰 국제적 파장을 일으켰다.

한국전쟁이 소련 붕괴로 끝난 냉전 흐름을 결정적으로 바꾸지는 못했다. 다시 말해서, 미국은 한국전쟁이 가져온 20년간의 지연을, 종국에는 ‘전략궤도 정상화로’ 바로잡을 수 있었다.

그렇다면 9.11테러는? 미국 외교전문가들이 “20년 세월을 허비하게 만들었다” 자책하게 한 9.11 테러의 장기적인 여파는 어떠할까? 동북아에서 미중 패권경쟁 일정에 차질을 가져옴으로써, 기존 패권국인 미국과 신흥 패권국 중국 사이의 경쟁 추세와 결말에 결정적인 변화를 주게 될지, 아니면 단기간적인 탈선에 그칠지 계속 주목하지 않을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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