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국제정세 체스판에 유연한 ‘나이트’ 역할로 기여를
[아시아엔=이종은 미국 노스그린빌대학교 조교수(정치학)] 국제정세는 거대한 체스게임으로 비유되기도 한다. 강대국들의 패권경쟁이 마치 체스판에서 벌어지는 체스 말들의 치열한 승부를 연상시키기 때문이다. 체스게임의 비유는 국제정세를 좌우하는 냉철한 외교전략을 연상시키기도 하지만, 강대국들에 의해 회생될 수 있는 약소국가들의 냉혹한 현실을 암시하기도 해서 논란이 되기도 한다.
국제정세에서 한국은 체스판에서의 작은 체스 말로 묘사되는 경우가 많았다. 가령, 한국전쟁 발발이 미국의 냉전의지를 테스트하기 위한 소련의 전략적 계산에서 비롯되었다는 해석이 있다. 미국이 한국전쟁에 개입한 이유는 약소국가 하나라도 공산권에게 점령되면 지정학적으로 더 중요한 주변국가들도 공산주의 위협에 노출된다는 이른바 ‘도미노 이론’을 참고해서 한반도를 냉전의 방패막이로 사용했다는 해석도 있다.
한국전 휴전협정 체결 70년 이후, 한국이 지금도 작은 체스 말이라는 불안감이 존재한다. 미중 패권경쟁에서 한국이 희생될 것이라는 불안감, 북핵 위협에서 미국이 한국을 보호하지 않을 것이라는 불안감들이 국내정치에서 자주 제기된다.
하지만, 체스게임의 비유가 자주 간과하는 체스판의 특성 중 하나는 여러 유형의 체스 말들이 존재한다는 사실이다. 비숍, 룩, 나이트와 같은 말들은 킹이나 퀸보다는 중요성이 덜 하더라도, 폰보다는 더 가치 있고, 성공적인 체스전략을 위해서 필수적인 역할을 수행한다.
마찬가지로 강대국과 약소국만을 비교하는 이분법적 묘사는 국제정세에서 중견국가들의 역할과 중요도를 간과한다.
가령 미국 대통령에게 있어서, 뉴욕의 안보가 파리의 안보보다 더 중요하다 해도 파리는 미국이 지정학적으로 쉽게 포기할 수 있는 도시가 아니다. 비록 강대국이라도 외교전략을 수행하는데 있어서 중견국가들의 협조가 필요하고 후자의 이의제기를 무시하기에는 부담이 크다.
미국 정부는 현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에서 확전을 우려하는 프랑스와 독일의 입장을 예의주시하고 있다. 또 중동/아시아 지역에서 인도, 터키, 사우디아라비아를 전략적 파트너로 유지하기 위해서 이 국가들이 때로는 미국의 의지에 반하는 국내외 정책을 추진하는 것을 묵인하고 있다.
오늘날 한국도 세계 10위 경제력, 6위 군사력을 보유한 중견국가다. 과거의 한국은 지정학적 완충지대로서 주로 주목되었지만, 지금의 한국은 세계 경제, 기술, 문화에 직접적으로 기여하는 국가로서의 가치도 주목 받고 있다.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 발발 이후, 한국은 무기수출로 유럽의 안보에도 기여하고 있으며, 세계 8위 방위사업 국가로서도 주목 받고 있다. 즉, 오늘날 한국은 하드파워와 소프트파워 측면에서 미국이 쉽게 포기하거나 희생시킬 수 있는 약소국이 아니다.
물론 한국은 지금도 여러 안보적 위협에 직면하고 있다. 그러나 과거에 비해서 한국이 국제정치에서의 체스판에서 보다 더 큰 레버리지를 가지고 있다는 자신감을 가지고 국제외교에서 더 적극적인 역할을 수행할 수 있다.
필자는 체스판의 말들 중 ‘나이트’의 특성을 주목한다. 일직선으로만 이동할 수 있는 룩이나 비숍과는 달리 나이트는 가로행, 세로열, 대각선을 결합한 이동방식으로 다른 말들을 뛰어 넘을 수 있는 유연한 기동성을 보유한다.
한국 역시 유연한 외교로 미국을 포함한 우방국가들과 함께 직면한 국제정세의 과제들을 때로는 정면으로, 때로는 우회적으로 돌파하는 역할에 기여해야 한다.
한국의 안보와 동북아 안정을 위해서 선명한 외교행보가 필요할 때도 있다. 북핵 위협 억제를 위한 한미일 연대강화 및 한미 핵협의체 설립, 대만해협의 평화와 안정 수호 표명은 지역 당사국으로서 한국의 적절한 안보 대책이다.
반면, 때로는 지정학적 분쟁에서 한국이 보다 더 우회적인 역할을 수행하는 것이 다른 우방국들에게도 도움이 될 수 있다.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에서 한국의 신중한 개입은 향후 동북아 외교에서 러시아와의 외교 창구를 유지하는데 필요하다. 현 남북관계는 고착상태이지만, 향후 한국이 다시 다방면에서 북한과 협상에 나서야 하는 상황도 미리 대비해야 한다.
유연한 외교행보가 자칫 모호함으로 비쳐져서 한국의 외교적 신뢰도를 실추시킬 수 있다는 우려도 있다. 물론 한국이 우방국들과 일관된 신뢰와 협력을 구축하는 게 매우 중요하다. 그러나 필자는 우방국들의 다양한 역할 수행이 (roleplaying) 미국의 동맹체계에도 도움이 된다고 본다. 이에 한국의 외교 역할에 대해서 우방국들과 긴밀한 협의와 소통이 절대 필요하다.
특정지역 정세에만 집중하거나, 강경 내지 온건 외교노선을 고수하는 다른 우방국들과는 달리 한국의 ‘나이트’로서의 역할은 동북아, 유럽 등 다양한 지역에서 다양한 외교전략에 협조할 수 있다. 이는 여타 우방국들과의 역할보완을 의미하기도 한다. 이런 역할은 고착 우려가 있는 국제정세에서 새 돌파구를 찾는데 기여할 수도 있을 것이다.
체스에서 이런 격언이 있다. “The knight on the rim is dim.”(가장자리의 나이트는 암울하다) 나이트는 체스판 중앙에 가까워질수록 위력이 강해지지만, 반대로 가장자리로 물려날수록 약해진다. 현 국제정세에서 한국은 더 이상 ‘폰’ 같은 약소국가가 아니다. ‘나이트’를 지향할 수 있는 중견국가이다.
하지만 이와 같은 국력도 한국이 국제무대에 적극 참여할 의지가 없으면 별 위력을 발휘하지 못할 수 있다. 또 한국의 국력만으로는 국제정세의 체스판에서 한국의 국익을 보호하기에는 역부족이다.
반면, 미국을 포함한 우방국들과 협력속에서 한국의 외교적 역할을 확립하는 것이 한국의 지정학적 안보에 기여하는 효율적인 방법이다. 강대국 수준의 국력을 보유하지는 않지만, 군사, 환경, 기술, 무역, 문화 등 다양한 외교전략에 일조할 수 있는 기동성과 유연함을 갖춘 중견국가로서 다른 우방국들 사이에서 각인되는 것이 한국의 성공적인 체스전략이 될 수 있다. 이런 외교전략이 체스판과 같은 국제정세의 판도를 한국에게 보다 유리하도록 바꾸어 나가는 데 기여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