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밌는 올림픽 육상 이야기③] 100M 10초벽 깬 지미 하인스

1968년 멕시코올림픽에서 세계신기록 수립 당시의 지미 하인즈

[아시아엔=김현원 연세대 의대 교수] 멕시코올림픽에서 100미터와 200미터에서도 놀라운 신기록이 나왔다. 100미터에서 미국의 지미 하인스는 오랫동안 난공의 벽으로 존재하던 10초의 벽을 깨뜨렸고, 200미터에서 미국의 토미 스미스는 최초로 20초의 벽을 깨뜨렸다.

당시 육상 100미터 신기록은 1960년 독일의 해리 아민이 세운 10초였다. 해리 아민은 특별히 스타트의 재능을 갖고 있었다. 지금도 슬로 비디오를 보면 스타팅부터 해리 아민이 다른 모든 선수들보다 두세 걸음 앞서 나가는 것을 볼 수 있다. 놀라운 반응신경이었다. 해리 아민 때문에 여러 번 다시 출발을 해야 했다. 하지만 해리 아민은 항상 같은 스타트를 보였다. 현재는 해리 아민과 같이 다른 선수보다 스타팅 블록을 먼저 차고 나가는 선수는 부정출발이 된다. 해리 아민이 보여준 것과 같은 스타팅에서의 반응신경 능력을 100미터 경주에서 제외한 것이다.

1968년부터 육상 단거리에서의 모든 기록은 전자계시를 하였다. 0.1초 단위의 측정을 할 수밖에 없는 수동계시가 아니라 0.01초 단위까지 측정하는 전자계시도 동시에 인정했고, 1975년부터 육상 단거리에서의 모든 기록은 전자계시 기록만 인정하기 시작했다. 인간의 한계를 향한 신기록 행진은 계속 진행되어서 이제는 계측방법을 더 정밀하게 바꿀 때가 된 것이다. 1975년부터 해리 아민의 기록을 넘어선 1968년 지미 하인스의 기록은 수동계시에 의한 9.9초가 아니라 9.95초로 바뀌었다.

1968년 10월 멕시코올림픽 금메달리스트,토미 스미스와 동메달리스트 존 카를로스가 미국의 인종 차별 항의 표시로 검은장갑을 낀 손을 하늘을 향해 들어올리고 있다.

지미 하인스에 의해 무너진 100미터 10초의 벽은 이후 칼 루이스에 의해서 9.86초로 깨진 후 여러 선수들에 의해 점차적으로 무너졌고 2005년 미국의 아사다 파월에 의해서 9초8의 벽이 무너지고 9초77이 기록되었다. 영원할 것 같았던 이 기록은 자메이카의 우사인 볼트에 의해서 순식간에 무너졌다. 우사인 볼트는 비먼과 같이 일순간 괴력을 발휘한 선수는 아니었다. 그는 나아가서 베이징올림픽에서 9초69 그리고 독일에서의 세계육상선수권대회에서 9초58이라는 믿기 어려운 세계신기록을 기록하였다.

우사인 볼트는 100미터 달리기의 상식을 깨뜨렸는데 그 모습에 전 세계가 경악할 수밖에 없었다. 엄청나게 큰 키의 선수가 공기저항을 줄이기 위해서 몸에 달라붙는 경기복을 입는 다른 선수들에 비해 펄럭거리는 옷을 입고 나와서 두리번거리면서도 예선인지 결선이지 모를 정도로 세계정상급 선수들을 멀리 떨어뜨려 놓으면서 결승전을 통과하기도 전에 옆을 기웃거리며 딴전을 부리면서 세계신기록을 세웠다.

볼트는 100미터뿐 아니라 200미터의 세계기록마저 완전히 바꾸어버렸다. 난공불락으로 알려졌던 애틀란타올림픽에서 기록한 마이클 존슨의 기록 19초32를 2008년 베이징 올림픽에서 19초30으로 깨뜨렸고 2009년 베를린 세계육상선수권대회에서 19초19의 엄청난 세계신기록으로 정상을 밟았다.

1968년 멕시코올림픽 육상 200미터 경기에서 20초의 벽을 깨뜨린 놀라운 세계신기록을 세우고 시상대에서 금메달을 획득한 미국의 흑인선수 토미 스미스와 동메달의 존 카를로스는 시상식에서 인종차별에 항의하는 의미로 맨발로 서서 함께 검은 장갑을 낀 주먹을 하늘 높이 들었다. 맨발은 흑인들의 가난한 처지를 상징하고, 검은 장갑은 미국의 인종차별에 항의하는 상징이었다.

1968년은 노벨평화상 수상자로 인종차별에 항의하는 상징이라고 할 수 있는 미국의 마틴 루터 킹 목사가 살해된 해였다. 세계신기록으로 우승했지만 정치적 행위를 했다는 이유로 그들은 미 육상계에서 제명당했다. 미국의 두 선수는 그 이후 미국의 인종차별에 항의하는 아이콘이 되었다. 미국의 이 두 선수의 인종차별에 항의하는 행위가 밥 비먼을 자극하여 비머네스크를 촉발하였다고 보는 전문가들의 견해도 있다.

미국의 두 선수 외에 은메달을 받았지만 인종차별 항의에 동참하는 배지를 흑인선수들과 함께 가슴에 달았던 호주의 육상영웅 피터 노만마저 이단자로 낙인이 찍혀 호주 육상계에서 매장당하고 매스컴으로부터 완전히 잊혀진 존재가 되었다. 호주 역시 미국 못지않게 백호주의라는 이름으로 인종차별이 진행되고 있던 나라였기 때문이었다. 피터 노만은 인종차별에 항의하는 지지를 철회하면 징계를 풀고 공식적인 무대에 설 수 있게 해주겠다는 호주 육상계의 회유를 물리쳤다. 그는 공식적인 직업을 갖지 못하고 모두에게 잊혀진 채로 잡일들을 하면서 어렵게 살다가 2006년 쓸쓸히 사망했다. 2012년 호주의회는 이 위대했던 선수에게 공식 사과성명을 발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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