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밌는 올림픽 육상 이야기⑤] 그리피스 조이너···“즐겁고 황당한 동화이야기”
[아시아엔=김현원 연세대의대 교수] 플로렌스 그리피스 조이너는 필자가 가장 좋아하는 선수다. 현대과학은 물질 패러다임의 과학이다. 물질이라는 우물 안에서 보는 세계라고 할 수 있다. ‘팬다임’은 팬 패러다임(Pan-Paradigm)의 약자로 우물 안에 갇히지 않고 편견없이 바라보는 과학이라는 뜻이다. 필자가 만든 단어다.
팬다임 과학은 패러다임으로 시작하는 것이 아니라 현대과학이 해결하지 못하는 팩트로부터 시작한다. 어떤 패러다임 안에서 세상을 보지 않고 편견 없이 팩트를 설명하고자 하는 노력으로 시작한다.
팬다임 과학 학자의 입장에서 나는 칼 루이스와 같이 꾸준하게 탁월한 실력을 보였던 선수들보다는 우사인 볼트, 마이클 존슨, 밥 비몬, 딕 포스베리와 같이 실력 외에도 뭔가 상식을 깨뜨리는 듯한 선수들을 좋아한다.
앞서 소개한([재밌는 올림픽 육상 이야기④]) 남아공의 니케르크는 100미터 10초 미만, 200미터 20초 미만, 400미터 44초 미만의 꿈의 기록을 세웠을 뿐 아니라, 그의 전공 400미터에서는 오랫동안 깨지지 않았던 ‘넘사벽’이던 마이클 존슨의 기록을 깨고 43.03초를 기록했다. 앞으로도 오랫동안 깨지기 힘든 세계신기록이다. 멋진 영웅의 행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이렇게 대단한 니케르크도 조이너에 비하면 오히려 떨어진다고 보인다.
조이너는 1988년 여자 100미터와 200미터에서 엄청난 세계신기록을 기록하였다. 그리피스 조이너의 여자 100미터 기록 10.49초와 200미터 서울올림픽에서 기록한 21.34초는 30년 넘도록 깨지지 않고 있을 뿐 아니라 그 세계기록이 너무나 엄청나서 아무도 그 후로 근처에 갈 생각도 못할 정도였다.
여자 100미터 역대 2위의 기록은 10초64이고, 올림픽 200미터를 제패한 캠벨 브라운의 기록도 21.74초에 불과하다. 100미터에서는 역대 2위의 기록과 거의 0.2초, 그리고 200미터에서는 무려 0.4초의 차이를 보인다.
조이너가 여자 100미터 신기록을 세운 때는 1988년 서울 올림픽의 결승전이 아니라 미국 올림픽 예선전의 준준결승전이었다. 당시 100미터의 최강자는 미국의 애시포드였다. 실제 미국 예선전에서 해설자는 애시포드를 우승후보로 보고 애시포드에 대해서만 얘기하고 있었다. 모두가 애시포드를 지켜보고 있을 때 미국 예선전 준준결승전에서 조이너는 애시포드를 10미터 이상 앞서며 ‘말도 안 되는’ 세계 신기록을 세웠다.
보통 선수들은 예선전에서 최선을 다하지 않고 마지막 결승전을 위해서 힘을 비축한다. 그러나 조이너는 역사상 다시 깨지기 힘든 세계신기록을 미국 예선전에서 기록했다. 이런 패러다임을 벗어난 황당함이 비로 내가 조이너를 좋아하는 이유이다. (미국 예선전에서 사실 풍향계가 고장 나서 실제는 뒷바람이 3미터가 넘었는데도 기록이 인정되었다는 뒷얘기가 있다. 하지만 애시포드를 10미터 이상 앞섰던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서울올림픽 100미터에서도 조이너는 준결승에서 10.62초, 결승에서 10.54초의 기록으로(이 기록은 뒷바람에 의해 공식 인정되지 않았다) 그녀의 라이벌이라고 할 수 있는 애시포드를 무려 0.3초의 차이로 제치고 금메달을 땄다. 200미터 경기에서 조이너는 준결승에서 세계신기록 그리고 결승에서도 21초34의 세계신기록을 세웠는데 이는 2위와는 0.4초의 차이가 나는 넘사벽의 기록이다.
0.01초를 다투는 올림픽 육상 단거리에서 0.3-0.4초는 상상하기 힘든 차이라고 할 수 있다.
정말 나를 깜짝 놀라게 한 것은 4X400미터 릴레이에서 미국 팀의 마지막 주자로 조이너가 나타난 것이다. 모두를 놀라게 한 순간이었다. 400미터에서 1위 소련에 한참 떨어진 상태에서 2위로 바톤을 받았다. 거리를 좁혔지만 따라 잡지는 못했고 금메달을 차지한 소련에 이어 은메달에 그쳤다.
더 놀라운 점은 서울올림픽을 마지막으로 은퇴한 후 그녀가 400미터에 집중해서 400미터의 세계신기록을 목표로 훈련하겠다고 한 것이다. 나는 서울 올림픽의 4X400미터 릴레이의 마지막 주자로 우승을 다투었던 조이너의 모습을 보고 큰 감동을 받았다. 그녀가 빈 말을 한 것이 아니라 400미터에서도 언젠가 세계신기록을 세울 수도 있을 것으로 기대했다. 하지만 그녀는 그 약속을 지키지 못했다. 취침 중에 뇌전증으로 인한 질식으로 38세에 사망한 것이다.
조이너의 기록이 너무나 뛰어났기 때문에 그녀에 대해서 끊임없이 도핑 의혹이 제시되었으나 당시만 해도 매우 엄격했던 어떤 테스트에서도 조이너가 문제가 된 적은 없었다. (서울올림픽 100미터에서 시대를 초월한 세계신기록을 세웠던 벤 존슨의 도핑이 적발되어 벤 존슨의 기록은 3일천하로 끝났다)
조이너는 달리는 패션모델로 불렸다. 처음에는 기록보다는 손톱을 아주 길게 기르는 등 튀는 외모로 더 유명했다. 세계신기록을 세운 후 그녀의 튀는 외모와 미적 감각도 각국 언론의 주목을 받게 되었다. 더구나 서울올림픽에서는 매 경기마다 다른 패션을 선보이면서도 넘사벽의 실력으로 우승했다.
그녀는 스포츠 패션이 이렇게 세련되고 멋질 수 있다는 것을 전 세계에 알려준 최초의 선수이다. 서울올림픽 직후 은퇴한 후 그녀는 아동용 책을 펴내고, 시를 쓰기도 했다. 조이너는 패션 디자이너로 미국 NBA농구팀 유니폼을 디자인하기도 했고, 배우로도 활동했다. 만화의 스토리로 나올법한 화려한 동화 이야기이다.
7월31일 열린 도쿄올림픽 여자 결승전에서 자메이카 선수가 금 은 동을 휩쓸었다. 처음부터 선두로 치고 나가서 끝까지 선두로 질주한 자메이카의 일레인 톰슨은 세계기록은 아니지만 조이너가 서울올림픽 100미터 준결승에서 세운 올림픽 기록을 넘어서 논란이 남아있는 조이너의 넘사벽 10.48초의 세계신기록에 이어서 10.61초의 세계 2위의 대기록을 세웠다.
안타깝게도 이 날은 한국의 축구 야구 배구 경기가 열리던 날이라서 대기록을 세운 육상경기는 결승전임에도 불구하고 어디에서도 중계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