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기우의 행복한 도전 41] “날 믿고 도와준 교직원과 학생에 너무 감사”
[아시아엔=이기우 한국전문대학교육협의회 전 회장, 이해찬 국무총리 비서실장 역임] “총장님, 전철에서 학교 안내 방송이 안 나옵니다.”
학생들과 학교의 관계가 처음부터 좋았던 것은 아니다. 특히 학생을 대표하는 학생회는 학교를 불신하고, 학교 역시 학생회를 불신하는 그런 관계였다고 말하는 것이 맞을 것이다. 오랜 기간 재능대학은 직원 노조는 노조대로, 교수협의회는 교수협의회대로, 또 학생회는 학생회대로 자신들의 권리만을 주장하면서 갈등을 빚어 왔다. 서로에 대한 불신이 깊어만 갔다.
일례로 이런 일이 있었다. 재능대학 총장으로 부임하면서 학생회 간부들과 면담을 나눌 기회가 있었다. 여러모로 학교에 대한 요구와 불만이 많았다. 건의사항이 있는지 물었더니 대뜸 이런 말을 했다.
“총장님, 저희들이 제물포역에서 내리는데 제물포역에는 우리 학교 안내방송이 안 나옵니다. ‘인천대학교, 인천전문대학 학생들은 여기서 내려 주시기 바랍니다’라는 안내만 나오고 끝입니다. 선배들 말로는 제발 재능대학 이름도 넣어 달라고 10년 전부터 학교에 건의한 거랍니다.”
확인해 보니 철도공사에서는 한 역당 두 개 이상의 학교명이나 장소명을 쓰지 못하게 되어 있다는 것이 아닌가. 학생들의 서운한 말을 들으면서 나 역시 의문이 들지 않을 수가 없었다. 인천에 있는 다른 대학은 방송에 나오고 재능대학만 빠져 있으니 우리 학생들이 사기가 떨어지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이런 것조차 해결하지 못하면서 학생들에게 변화를 요구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나는 그 자리에서 바로 전부터 인연이 있었던 철도공사 이철 사장에게 전화를 걸었다. “이철 사장님, 이게 말이 됩니까? 이거 고칩시다. 세 개 못 할 게 뭐 있습니까? 이런 말도 안 되는 규정 때문에 우리 학생들 사기가 말이 아닙니다.”
그 자리에서 걱정 말라는 이철 사장의 답변을 받아 냈다. 그러나 바로 그다음 날, 철도공사 영업본부장에게서 전화가 왔다. 사장의 지시를 받았지만 규정상 하기 어렵다는 말이었다. 나는 알겠다고 대답하고는 다시 이철 사장에게 전화를 걸었다. “철도공사 사장 그거 뭐 껍데기 아닙니까? 어제 된다고 해서 우리 학생들한테 다 이야기했는데 밑에서는 안 된다 하니, 이거 하나 해결 못 하면 뭣 때문에 사장 자리에 앉아 계십니까?”
그렇게 이철 사장의 마음에 불을 확 질러 버렸다. 물론 이후로도 실무자와 끈질기게 합리적인 의사소통을 했고, 마침내 제물포역 안내 방송은 인천대학교, 재능대학 그리고 인천전문대학 순으로 수정되었다. 나중에는 인천대학교가 송도 캠퍼스로 옮겨 가면서 재능대학이 가장 앞서 안내 방송으로 나오게 되었다. 그것도 총장인 내 목소리로 직접 소개하는 멘트였다.
“안녕하십니까. 재능대학 총장 이기우입니다. 재능대학을 방문하시는 고객께서는 이번 역에서 내리셔서 2번 출구를 이용하시기 바랍니다.”
이 일은 작다면 작은 일이었지만 학생들에게 학교에 대한 자긍심을 일깨워 주었다. 특히 ‘이기우 총장은 한다고 하면 제대로 하는 사람’이라는 인식을 심어 주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전철로 통학하는 타 대학 학생은 이 안내 방송을 듣고 “우리 대학 총장님 목소리는 한 번도 들은 적이 없는데, 재능대학 총장님 목소리는 매일 들어서 익숙해졌다.”라는 의견을 자신의 SNS에 올리기도 했다.
또 하나, 학생들이 학교와 총장에 대한 인식을 바꿀 수 있는 사건이 있었다. 경인고속도로를 타다가 재능대학으로 빠지는 가좌인터체인지 동인천 방향 표지판에 재능대학 방향을 알리는 표시가 없어 불편하다는 건의사항이 있었다. 이번에는 도로공사 손학래 사장에게 바로 전화를 걸었다. 내가 국회 파견 과장 시절에 같이 일했던 분이었다. 여기도 마찬가지였다.
사장은 알겠다고 했지만 실무자가 똑같이 안 된다고 전화를 걸어왔다. 그러나 포기하지 않았다. 이번에도 지속적인 협의 과정을 거쳐서 경인고속도로 표지판에 재능대학 이름이 써지게 되었다. 사정상 1년반 정도밖에 유지되지는 못했지만 그런 식으로 학생들에게 총장으로서의 신뢰를 주었다.
한번은 학교 축제를 진행하면서 학생회에서 학교가 지원해 줄 수 있는 이상으로 예산을 초과해서 올린 일이 있었다. 한눈에 딱 봐도 주먹구구식 예산이었다. 말을 들어 보니 그런 식으로 예산안을 올린 것이 부지기수였다. 예산은 그런 데서도 새 나가고 있었다. 구석구석 절약하고 깎아야 할 대목이 많이 보였다. 예산안의 수정을 요구했다. 기존의 관성이 있었기에 학생회가 반발했음은 물론이다.
동시에 나는 연예인을 초청하는 비용으로 책정된 수백만원을 내 사비에서 바로 현금으로 지급해 주었다. 그러자 학생들이 총장을 바라보는 시각이 달라졌다. 그런 식으로 학생들의 신뢰를 쌓아 가면서 접촉면을 늘려 나갔다. 고쳐야 할 것은 고칠 필요가 있었다. 학생회 임원들이 2박 3일 연수를 할 때에는 일부러 학교 간부들을 보냈다. 무조건 서로를 불신할 것이 아니라 학생회가 학교 사정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어야 서로 간의 신뢰를 바탕으로 협의도 하고 제 역할도 할 수 있다는 판단이 들었기 때문이다. 우선 학생회장과 부회장을 불러 다음과 같이 말해 주었다.
“자네들도 리더로서 역할을 하려면 여기저기서 많은 요구를 받는데, 요구받는 내용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면 그게 나중에 엉뚱한 결과로 나올 때가 많아. 축제 예산안이든 뭐든 학교를 믿고 학교도 자네들을 믿어야 진행할 수 있지 않겠나. 학교에 무조건 요구할 것이 아니라 학교 상황을 제대로 알아야 학교 입장도 이해하면서 일을 진행할 수 있지 않을까?”
그렇게 학생회 임원 수련회에 교무처장과 과장들을 보내서 학교의 비전과 예산 절감 노력 등에 대한 설명회도 진행했다. 그렇게 하자 학생회에서 엉뚱한 요구나 지원 요청을 하지 않게 되었다. 그때부터 학교를 적대적으로 보는 시각이 사라지면서 같이 성장해야 하는 동반자로 인식하기 시작한 것이다.
졸업 앨범도 마찬가지였다. 그때까지 학생회에서는 졸업 앨범을 제작하면서 십몇 년간을 한 제작업체와만 관계를 지속해 왔다. 이 과정에서 업체는 학생들에게 대가를 주고, 학생들은 그 대가를 받아 앨범 제작비가 높아지는 것을 묵인해 주는 관행이 있었다. 졸업생들만 손해였다.
내가 개입하여 공정한 입찰을 통해 보다 합리적인 가격으로 앨범을 제작하도록 유도했다. 부임 첫해에는 종전대로 앨범을 제작했지만 그다음 해부터 입찰제로 제작 방식을 바꾸었다. 그런데 문제는 졸업 앨범을 사 가는 학생이 적다는 것이었다. 앨범 사진을 아예 찍지 않는 학생도 많았다. 그만큼 학교에 대한 애정이 없다는 말이었다. 나는 학생회에 제안을 했다.
“앨범을 공짜로 주고, 앨범을 한 권에서 두 권으로 만들자. 졸업생들 개인의 이야기도 넣고, 사진도 많이 넣어서 더 알차게 만들자.” 그러자 분위기가 바뀌었다. 사진을 안 찍는 학생들이 확 줄어 들었고, 대부분의 학생들이 앨범을 받아 가게 된 것이다. 이런 식으로 학교를 사랑하는 마음을 가지도록 변화시켰다. 이제 총학생회도 학교의 정책을 이해하고 동참하게 되었으며, 학교를 위해 도울 일이 없나 먼저 찾아보는 등 학교의 변화와 발전에 당당한 주역으로 함께하게 되었다.
지금도 우리 대학의 개혁 이야기는 이런저런 뉴스로 계속 회자된다. 이렇게 된 데에는 무엇보다 어려운 과정 속에서도 모든 교직원과 학생이 나를 믿고 잘 따라와 준 힘이 크다. 또 개혁의 결과가 학생들의 변화로 이어지고 있는 것을 보면 스스로도 참 잘됐다고 여긴다. 재학생들이 우리 대학에 다니고 있다는 사실에 매우 큰 자부심을 가지고 있는 것을 보면, 정말로 상전벽해(桑田碧海)라는 말이 실감 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