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기우의 행복한 도전 31] 中시진핑 당서기, 北김영남 위원장 ‘단상’

김영남 위원장과 환담 중인 이기우 국무총리 비서실장

[아시아엔=이기우 한국전문대학교육협의회 전 회장, 이해찬 국무총리 비서실장 역임] 국무총리 비서실장 시기에 많은 외빈을 만났다. 우리나라를 방문하여 찾아오는 경우가 있고, 총리를 수행하는 국빈 외교 해외 출장이 있었다.

국내에서는 시진핑 저장성 당서기(2005년 7월), 후진타오 중국 국가주석(2005년 11월), 압둘라 사우디아라비아 국왕(2005년 11월) 등 굵직굵직한 인사들과의 만남이 있었다. 이 중에서도 시진핑 당서기가 기억에 남는다.

이해찬 총리가 한국을 방문한 시진핑 당서기와 악수를 나누고 있다,

시진핑 당서기의 경우 면담 요청 때부터 달랐다. 대사관을 통해 섭외가 들어올 때 면담을 요청한 쪽에서는 주로 고위급 인사와 만났다는 모양새를 갖추는 데 신경을 쓰는 경우가 많다. 그런데 시진핑 당서기는 요청 사항이 있었다. 총리 면담 시간을 많이 할애해 달라는 것이었다. 실제로 이해찬 총리와 만났을 때 예리한 질문이 많았다. 국정 전반에 관한 질문이었고, 여느 사람 같으면 그 자리에서 대답하기 힘든 질문도 있었다.

그러나 이 총리가 업무를 다 꿰고 있었기에 대답에 어려움은 없었다. 유창한 질문과 유창한 대답이 오고 갔다. 그렇게 한 시간이 넘게 면담이 이루어졌다. 나는 옆에서 이 모든 과정을 지켜본 뒤 면담이 끝나고 다른 비서관들을 만나자마자 이런 말을 꺼냈다.

“저 양반 예사롭지 않은데? 인물이야 인물.” 감탄과 함께 자연스럽게 나온 말이었다. 시진핑 당서기는 한 시간 동안 우리나라 국정 전반에 대해서 상세하게 파악하려고 진지한 태도로 질문하고 대답을 경청했다. 나중에 그가 상하이 당서기를 거쳐 마침내 중국 국가주석이 되는 것을 보면서 한 나라의 지도자는 역시 격이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국무총리 비서실장직을 수행하면서 총 9회에 걸쳐 20개국에 총리를 동행하여 국빈 외교 순방을 경험했다. 중동 5개국 경제 외교 순방, 원자바오 중국 총리 초청 국빈 방문, 베트남 국빈 방문, 싱가포르 국빈 방문, 헝가리 진보 정상회의 참석, 남아시아 지진해일 피해로 인한 인도네시아 대통령 위문 예방, 인도네시아 자카르타에서 개최되는 아시아·아프리카 정상회의, 교황 요한 바오로 2세 서거 조문 사절단의 바티칸 방문, 파드 빈 압델 아지즈 사우디아라비아 국왕의 조문 외교 순방 등이 있었다.

이 중에서도 아시아·아프리카 정상회의에 얽힌 이야기를 소개한다. 북한 권력 서열 2위인 김영남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장과의 만남이 인상 깊었다. 2005년 4월에 아시아·아프리카 정상회의 때 자카르타에서 총리를 모시고 김영남 위원장을 만났다.

보통 총리나 국가원수들이 회의장에 들어가면 각국 수행원들은 수행원들끼리 따로 모여 있는 경우가 많다. 우리는 우리끼리, 북한 수행원들 역시 자기들끼리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그 당시 남북관계가 교착 상태에 빠져 있을 때였다. 우리는 일부러 북한 수행원들 쪽으로 다가가 먼저 말을 걸었다. 물론 그들은 잔뜩 경계하면서 접근 자체를 거부했다.

둘째 날이 되었다. 각국 정상들이 회의하다가 잠깐 나와서 차를 마시는 휴식 시간이 있었다. 마침 휴게실에 김영남 위원장의 모습이 보였다. 원래는 정상이 아니면 들어가지 못하게 되어 있는 휴게실이었지만 나는 일부러 들어가서 김영남 위원장에게 정중하게 인사를 건넸다.

“안녕하십니까. 이해찬 총리를 모시는 비서실장 이기우입니다. 이해찬 총리께서 김영남 위원장님을 정말 훌륭하신 분이라고 말씀해 주셨습니다. 온화한 모습에 깊은 인상을 간직하고 있었는데 여기 앉아 계셔서 인사드리러 왔습니다.”

사실은 김영남 위원장이 어떤 반응을 보일지 예측하지 못한 상황이었다. 그런데 김 위원장은 넉넉한 미소를 지으며 내 말을 받아 주었다. “그래요, 이해찬 총리는 어떤 분인가요?” 나는 반가운 마음에 이해찬 총리에 대해 설명을 드렸다. 김영남 위원장은 “아, 그래요.” 하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그날 내가 김 위원장과 이야기를 나눈 시간이 8분 정도였다. 때마침 나와 김 위원장이 대화를 나누는 모습이 KBS 카메라에 잡혀 그날 저녁 뉴스에 보도되었다. 며칠 동안 회의장에서 밥 먹으러 오가는 사이 만날 때마다 김 위원장에게 인사를 했다.

어느 순간부터 김 위원장도 내 인사를 받고 나를 반겨 주는 것이 아닌가. 김 위원장의 태도가 변하니 수행원들의 태도 역시 훨씬 부드럽게 바뀌었다. 그러한 과정을 거쳐 이해찬 총리와 김영남 위원장의 대담이 이루어졌다. 총리급 이상의 남북 지도자급 면담은 2000년 남북 정상회담 이후 처음 있는 일이었다.

이날 면담에는 북측은 외무성 관계자 여섯 명이, 남측은 나를 포함하여 외교부 차관 등 일곱 명이 각각 배석했다. 대담 일정은 외교부가 챙겨서 진행했지만, 총리와 위원장 사이에서 내가 결코 무시할 수 없는 역할을 했다고 평가할 수 있겠다. 평상시 국무총리 비서실장의 역할이 바로 모든 일이 부드럽고 유연하게 잘 돌아가도록 윤활유 역할을 하는 것이다. 이런 신념이 있었기에 어려운 순간이었지만 내 나름의 역할을 한 것이다. 이 대담으로 중단된 남북 당국자 회담을 다시 재개하는 데 뜻을 모으는 등 이후 남북 관계가 잘 풀려나갈 수 있는 계기가 마련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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