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기우의 행복한 도전 27] 교원공제회 이사장 16개월···기업 경영 배운 시간

구례 지리산 자락에 위치한 지리산가족호텔

[아시아엔=이기우 한국전문대학교육협의회 전 회장, 이해찬 국무총리 비서실장 역임] 차관이 바뀌면서 교육부 장관도 바뀌었다. 바뀐 윤덕홍 장관은 나와 같이 일하고 싶어 했다. 윤 장관은 차관보 자리를 제안했다. 상사의 명이라 그 앞에서는 그러겠다고 답하고 나왔지만 며칠이 지나지 않아 이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차관이 후배인데 나와 같이 일하려면 얼마나 껄끄럽겠는가. 그만두겠다는 의사를 밝히고 곧바로 한국교직원공제회 이사장으로 가게 되었다. 2003년 3월에서 2004년 7월까지 1년 4개월 동안 이사장을 역임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이 시기는 내 인생에 있어서 빼놓을 수 없는 시간이었다. 특히 교육부 공무원 시절에는 배울 수 없었던 ‘기업 경영’을 배울 수 있는 소중한 시간이기도 했다. 이 시기의 경험이 있었기에 나중에 대학 총장으로서의 일을 제대로 수행할 수 있었다는 생각도 든다.

처음 부임했을 때 한국교직원공제회는 타성에 젖어 있었다. 체질 개선이 필요하다는 판단이 들었다. 파트별로 업무 보고를 받겠다고 주문하고, 우선 서면으로 보고서를 미리 받아 3주 동안 공부를 했다. 보통 이사장으로 취임하면 이틀 뒤부터 업무 보고를 받았는데 그렇게 하지 않았다. 내가 모든 업무를 다 파악할 시간을 먼저 마련한 뒤, 보다 실질적이고 구체적으로 업무 보고를 받겠다고 선언한 것이다.

3주 동안 공제회의 업무 내용을 전부 내 것으로 만든 뒤, 담당자들을 불러 업무 보고를 받았다. 업무 보고를 받으면서 나는 수시로 질문을 쏟아 내었다. 이런 일에 익숙하지 않은 직원이 많다 보니 말을 더듬거나 내용 설명이 부정확한 경우가 많았다.

“여러분에게 시간을 주겠습니다. 전부 각자 위치에서 1등을 하겠다는 마음을 가지세요.”

그렇게 직원들을 독려했다. 열두 개 부처 부장들에게 다 1등을 만들라고 주문했다. 그 당시 한국교직원공제회는 전국 각지에 수익 사업체로 호텔을 소유하고 있었다. 내가 부임하면서 더케이호텔, 경주와 속초의 교육문화회관과 지리산가족호텔, 라마다프라자제주호텔 등을 새로 오픈하고 사업에 더욱 박차를 가하게 되었다.

더케이손해보험

더욱 중요한 것은 2003년 12월 1일, ‘에듀카’라는 온라인 자동차 보험을 만들게 된 일이다. 선생님들은 교통사고를 내도 경미한 경우가 많았다. 주로 아침저녁 출퇴근으로만 운전을 하니 큰 사고가 날 확률이 다른 업종보다 낮았던 셈이다. 보험의 경우 사고율이 낮으면 낮을수록 이윤은 높아진다. 이에 근거하여 온라인으로 체계를 바꾸면서 가입자의 보험료를 싸게 책정하는 방식으로 가입자와 회사 모두가 이익을 얻을 수 있는 보험을 만들었다.

신공항하이웨이(주)

그다음으로 한 일은 인천 ‘신공항하이웨이주식회사’를 인수하는 일이었다. 인천공항을 진입하는 고속도로는 민자 1호로 건설된 도로였다. 이 도로를 만들 때 열한 개 기업이 컨소시엄으로 참여했는데 민자 1호였기에 2030년까지 정부에서 수익을 보장해 주는 방식으로 수익 구조가 설계되었다. 바로 이 회사에 공제회는 6666억 원을 투자했다. 나중에 이 회사 인수에 다들 망설일 때 내가 3천억 원을 준비하라고 지시해서 결국 이 회사를 공제회가 가져왔다. 그 뒤에 이 회사가 공제회에 엄청난 효자 기업이 된 것은 물론이다.

투자처를 찾아 임원들과 함께 몽골을 공식 방문한 적도 있다. 몽골에서도 가장 좋다고 하는 울란바토르의 칭기즈칸호텔에 묵었다. 나는 가장 좋은 방으로 배정을 받았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뜨거운 물이 안 나오는 게 아닌가. TV 역시 나오지 않았다. 비서실장을 통해 투숙객들이 자주 쓰는 작은 방으로 바꾸었다. 그러자 물도 잘 나오고 TV도 잘 나왔다.

알고 봤더니 내가 처음에 묵었던 큰 방은 평소에 가격이 비싸서 투숙객이 없었다. 그러다 보니 고장이 나도 어디가 고장 났는지 알 수 있는 기회 자체가 없었던 것이다. 이때의 경험은 나중에 라마다프라자제주호텔을 오픈하고 그대로 적용되었다. 하룻밤 자는 데 448만 원을 지불해야 하는 방을 평소에 그냥 놀리지 말고 수학여행 인솔 책임자를 찾아서 일부러 그 방을 쓰게 하라고 지시를 내린 것이다. 수학여행 단장이나 대학 총장이 투숙할 경우 리스트를 확인하고 큰 방을 쓰게 하면 방에도 사람의 기운이 돌고, 지속적으로 방을 관리할 수 있으니 오히려 그 편이 낫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또 ‘대한교원공제회법’을 개정한 일이 기억에 남는다. 공제회 회원은 실질적으로 선생님과 교직원, 교육 기관에 근무하는 직원으로 되어 있다. 그런데 기관명이 ‘대한교원공제회’이다 보니 선생님들만을 위한 기관인 것처럼 오해되었다. 선생님 외 회원들이 민원을 계속 제기했다. 법을 개정하는 것이기 때문에 쉬운 일이 아니었지만 서둘러 고쳐야겠다고 생각했다. 국회교육위원회 의원들을 설득하여 2004년 1월 20일 자로 ‘대한교원공제회’를 법률 개정을 통해 ‘한국교직원공제회’로 기관명을 변경했다. 이를 통해 회원들의 권리를 제대로 찾아 주었다는 뿌듯함을 느낄 수 있었다.

이처럼 다양한 투자와 복지 혜택을 위한 경험들이 모여 공제회 자산이 1조가 늘어나는 성과를 거두기도 했다. 비로소 내가 기업 경영에도 눈을 뜨게 된 시간이었다.

또 하나 잊을 수 없는 일이 있다. 2003년 8월에 교육 관계자들과 평양을 방문하면서 글로벌 NGO 굿네이버스 관계자와 북한 보위부 사람을 만나 느닷없는 백두산 개발을 제안받았다. 떨리는 마음으로 귀국 후 개발 부장을 불러 취지를 설명하고 은밀히 중국 베이징을 오가며 방북을 조율했다. 그 결과 남북 기업과 직접 교류를 시도하던 북한의 가장 힘 있는 기업인 코스타회사로부터 초청장을 받게 되었다. 초청장 내용을 근거로 국정원, 통일부의 승인을 얻었다. 2003년 10월에 방문단 일행과 백두산 지역 관광 사업 추진을 위하여 일주일 정도 평양을 거쳐 백두산 삼지연을 답사했다. 그 당시는 신변 안전이 보장되는 시절이 아니어서 살얼음판을 걸었던 생각을 하면 아직도 가슴이 뛴다.

초청장

우리는 남측(이웃사랑회) 관계자들인 리윤상, 리기우, ???, ???, ???, ??? 선생들이 편리한 시기에 평양을 방문하도록 초청하면서 체류 기간 편의를 보장하고 신변 안전 및 무사귀환을 담보합니다.

주체 92(2003)년 10월 2일

코스타회사

백두산을 다녀온 사람은 많다. 중국을 통해서다. 하지만 평양을 통해 백두산을 오른 사람은 많지 않다. 우리 국민의 절대 다수는 중국이 아니라 북한 땅을 통해 민족의 영산인 백두산을 오르고 싶어 한다. 한국교직원공제회 이사장으로서 희망의 사다리가 되기 위해 노력했던 기억이 새롭다. 희망의 길이 아직 열리진 않았지만 그때의 노력들이 마중물이 되어 반드시 백두산 천지 길이 열리기를 기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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